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데 잘 먹고 잘 사는 이 남자 [브랜더쿠]
국내 1세대 보드게임 작가 김건희
좋아하는 일 하기 위해 과감히 퇴사…새로운 길 개척하여 유럽에서 쾌거
좋아하는 일 하기 위해 과감히 퇴사…새로운 길 개척하여 유럽에서 쾌거
‘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
서바이벌 예능의 인기가 뜨겁다. 출연자들 간 치열한 전략 싸움과 심리전이 펼쳐지는 ‘더 지니어스’, ‘피의 게임’ 등이 대표적인 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되는 게임들 대부분은 보드게임에서 영감을 얻거나 보드게임의 룰을 변경해 만들었다는 것. 실제로 앞서 언급한 예능들에 보드게임 전문 기업 ‘코리아보드게임즈’가 자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보드게임’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다. 2002년 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에 최초의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고 이후 보드게임 카페가 성황을 이루며 ‘보드게임 붐’이 불었다. 그러나 수익모델과 콘텐츠 공급의 문제 등의 이유로 보드게임 카페는 빠른 속도로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런 보드게임은 대체 누가 만들까? 특히 보드게임마다 존재하는 정성스러운 세계관과 치밀한 게임의 룰은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1세대 보드게임 작가 김건희(Gary Kim)를 만났다. 김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국내 보드게임 역사의 산증인이자, 보드게임 작가라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내 최대 보드게임 개발 및 유통사 ‘코리아보드게임즈’의 매출은 설립 이후 매년 성장해 왔다. 3억(2004)→29억(2006)→102억(2010)→306억(2017)→490억(2020). 2022년 매출은 약 634억 원에 달한다.
BRDQ. 초등학교 때부터 보드게임을 했다고 들었다.
김건희 작가. 당시에는 게임이라고 하면 ‘부루마블’이랑 ‘졸리 게임 시리즈’ 밖에 없었다. 졸리 게임은 내 나이 또래들은 알 텐데 일본에서 나온 게임을 카피해서 팔았던 게임이다. 시리즈가 200개 넘게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사실 모두 불법이다. (웃음) 졸리 게임을 동네 친구들과 매일 했다. 근데 중학교 가면서 다 버렸다. 할머니가 공부나 하라며 다 버리신 거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도 보드게임을 못했다.
그러다 대학에 갔고, 제대하고 난 시기가 보드게임 붐이 불던 때다. 대학로에 위치한 프랜차이즈에서 ‘카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에 할 때보다 훨씬 재밌었다. 그 뒤로는 그냥 늘 보드게임을 했다. 보드게임방도 계속 가고 학교에 보드게임을 매일 가져가 게임을 했다.
회사 재직 시절에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고.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는데 보드게임은 너무 하고 싶었다. 주말에 하는 정도로는 성에 안 찼다. 퇴근하고 무작정 혼자 보드게임방에 가서 사장님한테 ‘저 게임 하고 싶은데 다른 모임에 좀 끼워 달라’고 하면 사장님이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통성명도 안 하고 앉아서 게임만 하고 헤어지고. 나는 익스트림 ‘I’ 인간인데도 정말 보드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다.
보드게임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처음 만든 게임도 궁금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관심이 갔다. 책이랑 비슷한 것 같다. 누구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누구는 나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나.
대학교 재학 당시 벤처학 수업을 들었는데 조당 100만 원을 지원받아 뭐든 만들어내는 게 과제였다. 그때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보드게임을 너무 좋아하니까, 우리 조는 보드게임을 만들자고 조원들을 설득했다. 학기 말에 각 조의 아이템을 전시했는데 게임 배경이 되는 건물도 모형으로 만들고 LED 조명도 달았다. 주사위를 굴려서 도착한 칸에 따라 주식을 사거나 파는, ‘부루마블’하고 당시 하던 ‘어콰이어’라는 게임을 합친 버전이었다. 사실 별 재미는 없었다.
당시에는 게임을 만들기 위한 정보를 얻거나 공부를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게임 개발을 위한 자료나 정보, 사람 등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 그냥 내가 다음 카페를 만들었다. 마침 국내에 보드게임 개발자 모임이 없길래 그럼 한국을 대표해보자 싶어 ‘한국 보드게임 개발자 모임(Korea Boardgame Designers Association)’이라고 멋지게 이름도 붙였다.
당시 한창 다음 카페가 유행이어서 그런지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와 가입하길래 내심 깜짝 놀랐다. 정모를 하면 몇 십 명이 모이고 그랬다. 다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개발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테스트도 하고. 근데 아이디어들은 허접했다. 게임을 만들기는 하는데 출시는 안 되고. (웃음) 다음 카페를 2003년에 만들었는데 2010년이 되어서야 내가 만든 첫 게임이 출시됐다.
모임이 오래 유지된 것 같다. 지금도 만나거나 다른 이들도 보드게임 개발을 계속 하고 있는지?
물론이다. 코로나19전까지 계속 정모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면 나오는 멤버가 많지는 않았는데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계속 나오더라. 대부분 지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는 ‘보드게임작가협회’를 공식적으로 만들었는데, 협회장이 그때 정모에 나오던 친구 중 한 명이다.
취업 당시에는 보드게임과 관련된 직업을 가질 생각을 안했나.
대학 재학 시절 보드게임방을 차릴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시간당 과금을 하고 음료를 파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어려워 보였다. 먹고 살아야 하니 돈이 될 것 같은 일을 하자 싶어, 투자 회사 마케팅 담당으로 7년 정도 일했다.
회사
국내 1세대 보드게임 작가 김건희
좋아하는 일 하기 위해 과감히 퇴사…새로운 길 개척하여 유럽에서 쾌거
좋아하는 일 하기 위해 과감히 퇴사…새로운 길 개척하여 유럽에서 쾌거
‘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
서바이벌 예능의 인기가 뜨겁다. 출연자들 간 치열한 전략 싸움과 심리전이 펼쳐지는 ‘더 지니어스’, ‘피의 게임’ 등이 대표적인 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되는 게임들 대부분은 보드게임에서 영감을 얻거나 보드게임의 룰을 변경해 만들었다는 것. 실제로 앞서 언급한 예능들에 보드게임 전문 기업 ‘코리아보드게임즈’가 자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보드게임’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다. 2002년 서울대학교 앞 녹두거리에 최초의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고 이후 보드게임 카페가 성황을 이루며 ‘보드게임 붐’이 불었다. 그러나 수익모델과 콘텐츠 공급의 문제 등의 이유로 보드게임 카페는 빠른 속도로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런 보드게임은 대체 누가 만들까? 특히 보드게임마다 존재하는 정성스러운 세계관과 치밀한 게임의 룰은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수소문 끝에 1세대 보드게임 작가 김건희(Gary Kim)를 만났다. 김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국내 보드게임 역사의 산증인이자, 보드게임 작가라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국내 최대 보드게임 개발 및 유통사 ‘코리아보드게임즈’의 매출은 설립 이후 매년 성장해 왔다. 3억(2004)→29억(2006)→102억(2010)→306억(2017)→490억(2020). 2022년 매출은 약 634억 원에 달한다.
BRDQ. 초등학교 때부터 보드게임을 했다고 들었다.
김건희 작가. 당시에는 게임이라고 하면 ‘부루마블’이랑 ‘졸리 게임 시리즈’ 밖에 없었다. 졸리 게임은 내 나이 또래들은 알 텐데 일본에서 나온 게임을 카피해서 팔았던 게임이다. 시리즈가 200개 넘게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사실 모두 불법이다. (웃음) 졸리 게임을 동네 친구들과 매일 했다. 근데 중학교 가면서 다 버렸다. 할머니가 공부나 하라며 다 버리신 거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도 보드게임을 못했다.
그러다 대학에 갔고, 제대하고 난 시기가 보드게임 붐이 불던 때다. 대학로에 위치한 프랜차이즈에서 ‘카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에 할 때보다 훨씬 재밌었다. 그 뒤로는 그냥 늘 보드게임을 했다. 보드게임방도 계속 가고 학교에 보드게임을 매일 가져가 게임을 했다.
회사 재직 시절에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고.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는데 보드게임은 너무 하고 싶었다. 주말에 하는 정도로는 성에 안 찼다. 퇴근하고 무작정 혼자 보드게임방에 가서 사장님한테 ‘저 게임 하고 싶은데 다른 모임에 좀 끼워 달라’고 하면 사장님이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통성명도 안 하고 앉아서 게임만 하고 헤어지고. 나는 익스트림 ‘I’ 인간인데도 정말 보드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다.
보드게임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처음 만든 게임도 궁금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관심이 갔다. 책이랑 비슷한 것 같다. 누구는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누구는 나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나.
대학교 재학 당시 벤처학 수업을 들었는데 조당 100만 원을 지원받아 뭐든 만들어내는 게 과제였다. 그때 처음으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보드게임을 너무 좋아하니까, 우리 조는 보드게임을 만들자고 조원들을 설득했다. 학기 말에 각 조의 아이템을 전시했는데 게임 배경이 되는 건물도 모형으로 만들고 LED 조명도 달았다. 주사위를 굴려서 도착한 칸에 따라 주식을 사거나 파는, ‘부루마블’하고 당시 하던 ‘어콰이어’라는 게임을 합친 버전이었다. 사실 별 재미는 없었다.
당시에는 게임을 만들기 위한 정보를 얻거나 공부를 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게임 개발을 위한 자료나 정보, 사람 등을 찾기가 너무 어려워 그냥 내가 다음 카페를 만들었다. 마침 국내에 보드게임 개발자 모임이 없길래 그럼 한국을 대표해보자 싶어 ‘한국 보드게임 개발자 모임(Korea Boardgame Designers Association)’이라고 멋지게 이름도 붙였다.
당시 한창 다음 카페가 유행이어서 그런지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와 가입하길래 내심 깜짝 놀랐다. 정모를 하면 몇 십 명이 모이고 그랬다. 다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개발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테스트도 하고. 근데 아이디어들은 허접했다. 게임을 만들기는 하는데 출시는 안 되고. (웃음) 다음 카페를 2003년에 만들었는데 2010년이 되어서야 내가 만든 첫 게임이 출시됐다.
모임이 오래 유지된 것 같다. 지금도 만나거나 다른 이들도 보드게임 개발을 계속 하고 있는지?
물론이다. 코로나19전까지 계속 정모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면 나오는 멤버가 많지는 않았는데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은 계속 나오더라. 대부분 지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는 ‘보드게임작가협회’를 공식적으로 만들었는데, 협회장이 그때 정모에 나오던 친구 중 한 명이다.
취업 당시에는 보드게임과 관련된 직업을 가질 생각을 안했나.
대학 재학 시절 보드게임방을 차릴 생각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시간당 과금을 하고 음료를 파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어려워 보였다. 먹고 살아야 하니 돈이 될 것 같은 일을 하자 싶어, 투자 회사 마케팅 담당으로 7년 정도 일했다.
회사 다닐 때도 워크샵을 가거나 하면 보드게임을 바리바리 챙겨 갔다. 방 하나에서는 술을 마시고, 또 다른 방 하나에서는 보드게임을 하는 거다. 당시 대표님도 술을 잘 못 드셔서 같이 보드게임을 하곤 했다. 회사 그만둘 때 “보드게임으로 먹고 살겠다” 하니 다들 수긍하시더라. “그래. 너 좋아하는 거 해라.”라며.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보드게임이었는지?
7~8년 회사 생활을 하는 내내 취미이자 부업으로 게임을 계속 만들고 종종 출시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모를 하면 막 너무 좋았고 게임을 만드는 게 너무 즐거웠다. 사실 직장 생활 자체가 성향에 잘 맞지 않았다. 그만두겠다고 하니 아내도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얼굴도 점점 안좋아지고 다 죽어가니까,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라.
보드게임을 업으로 삼자 마음 먹고 처음엔 취업을 생각했다. 보드게임 회사의 개발팀으로 면접을 봤는데 떨어졌다. 이유는 여러가지였겠지만 나이 탓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신입 자리였는데 연차가 높았으니. 그때 나랑 다른 한 분 해서 총 두 명이 면접을 봤는데, 그분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이후 ‘보드게임 카페를 할까?’하는 생각도 다시 들어 보드게임 카페를 인수하려고 했다. 근데 하루 일해보니 나랑 너무 안 맞는 거다. 손님을 응대하는 일이 너무 어렵고 스트레스였다.
익스트림 ‘I’ 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보드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으니 어땠는가.
맞다. 그래서 결국 개발을 하게 된 거다. 그전에도 계속 해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처음 3년이 정말 힘들었다. 수입이 없으니까. 그래도 운이 좋았다. 회사를 그만 두고 나온 뒤 만든 게임이 다 잘됐다. ‘고려’, ‘토끼와 거북이’, ‘아브라카왓’ 같은 대표작들이 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직장 다닐 때의 연봉만큼 되더라. 업으로 삼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프리랜서 근무 형태에 대한 만족도도 높지만, 늘 하는 일인데도 게임을 하고 만드는 일이 여전히 재미있다.
이름을 알린 계기였던 ‘고려’의 경우 프랑스에 팔렸는데, 처음 담당자를 만난 게 일본 게임 마켓에서였다. 당시 수출하려고 국내에서 반응이 좋았던 ‘선물입니다!(Present)’라는 게임을 가져갔다. 시연을 하던 중 프랑스 보드게임 출판사 대표가 관심을 가지길래 속으로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계약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프랑스에 그런 게임이 이미 많아서 차별화가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올 일이 있으니 또 만나보자고 연락이 왔다. 다른 카드 게임 프로토타입을 보여주니 바로 마음에 들어 했고 계약도 바로 했다. 한국적인 이름으로 출시하자며 게임 이름은 ‘고려’가 되었다. 게임 이름이 ‘고려’일 뿐 고려 인물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웃음)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보드게임은 무엇인가?
가장 좋아하는 건 늘 ‘달무티’(신분 격차를 테마로 한 카드 게임)였다. 그 외는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에는 ‘재치와 눈치’라는 게임이 재밌었다. ‘화요일을 가장 좋아하는 한국인은 몇 퍼센트일까요?’ 같은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눈치껏 숫자를 맞추거나 정답에 베팅하는 게임이다. 입문자도 하기 쉽고 어느 그룹에서 해도 실패하지 않는다. 심지어 처갓집에서도 성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 보인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힘들었던 직장 시기가 있었기에 만족도가 더 높은 것 같다. 처음부터 보드게임을 했어도 이렇게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좋아하는 취미나 해보고 싶은 일을 업으로 꼭 삼고 싶다면 부업으로 먼저 시도 해봐도 좋은 것 같다. 꼭 목숨 걸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필요는 없다.
보드게임의 역사가 오래된 곳이자 가장 큰 시장이 유럽이다. 유럽에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할아버지 작가들이 있다. 나 역시 그들처럼 할 수 있는 한 계속 게임을 만드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