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 구독자 22명 | 프로코피우스 | Troubadour유스티니아누스 1세

포티오스 분열: 동서교회 갈등의 절정 (2)

앞서 이야기했듯 동로마의 실권자 바르다스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의 대립은 결국 이그나티오스의 바르다스 파문과 뒤이은 바르다스의 이그나티오스 총대주교 해임으로 끝이 났다. 고결했지만 완고하고 반대파에게 적대적이었던 이그나티오스의 해임은 온건론자(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 유화적인 기독교인들)들에게는 천금같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바르다스에게도 이그나티오스의 해임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대립하던 이그나티오스 대신 자신을 지지해줄 인물을 총대주교로 임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바르다스가 차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한 인물은 바로 자신의 친구이자 저명한 지식인이었던 포티오스였다.


그러나 포티오스에게는 한가지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성직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본래 주교가 되려면 부보제-보제-사제를 거쳐 주교 서품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며 이 과정은 수년에서 수십년의  그러나 포티오스는 주교는 커녕 부보제 서품도 받지않은 일반 평신도였다. 원칙상으로는 총대주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티오스는 단 6일만에 부보제-보제-사제-주교 서품식을 모두 치렀고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취임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초고속 서품은 과거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나 선임 총대주교인 파울로스 3세, 타라시오스, 그리고 니케포로스 1세도 경험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바르다스에 의해 해임된 이그나티오스가 아직 남아있었으며 그는 총대주교 자리에서 해임되고 섬으로 유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대주교자리를 내려놓으려 들지 않았다. 이그나티오스가 아직 총대주교좌를 내려놓지 않는한 포티오스는 적법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그나티오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되었으며 포티오스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임명도 완료되었기에 포티오스는 로마 교황에게 자신의 총대주교 임명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여기서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교황은 일반적인 인물이 아닌 니콜라오 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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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1세


니콜라오 1세, 위대한 교황이자 후대에 성인으로 시성된 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교황의 수위권 향상을 위해 투쟁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이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해임과 임명은 무언가 석연찮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포티오스의 서한과 보낸 선물을 받긴 했으나 포티오스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취임을 승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포티오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답신에는 다음해에 특사를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할테니 콘스탄티노플에서 직접 이번 이그나티오스의 해임과 포티오스의 취임에 관한 진상을 조사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니콜라오는 그 답신에서 기존에는 로마 교황이 관할하던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인 시칠리아, 일리리아, 칼라브리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등을 로마로 반환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지역은 과거 성상파괴론자였던 레온 3세가 로마 교황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지역으로 옮겼던 곳으로 니콜라오의 입장에서는 진상위원회에 특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실지를 되찾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적법성을 자신이 인정하여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그리스도교 세계에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860년, 루스족이 기습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했던 시기에 포티오스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민심을 안정화시키며 자신의 입지를 한껏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강제로 퇴임된 이그나티오스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입지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니콜라오가 파견한 특사 - 아나니의 자카리아스와 포르투의 로도알드 -가 콘스탄티노플에 왔던 것이었다. 오히려 니콜라오의 특사들은 포티오스의 능수능란한 외교술에 넘어가 포티오스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임명 및 이그나티오스의 총대주교 해임에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이들에게 요구했던 시칠리아, 일리리아, 칼라브리아 교구의 반환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는 니콜라오의 명백한 실패였다. 더욱이 이 뒤에 포티오스가 니콜라오에게 보낸 서신은 더더욱 노골적이었다. 포티오스는 서신에서 해당 교구들에 대해 '원칙상으로는 로마에게 반환하는 것이 옳으나 이는 황제만이 정할 수 있는 것이며 황제는 아직 해당 교구들을 로마에 넘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이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니콜라오에게 콘스탄티노플 - 그리고 포티오스- 가 보내는 명백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쌓여만 가던 니콜라오의 분노를 격화시킴과 동시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갈등을 더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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