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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전사 (2)


"불패의 전사님! 제가 살테니 같이 밥이나 먹어요."


"파산할 준비나 하시지, 루카스 이 노친네!"


"하하! 천년 씩이나 살았으면서, 제가 할말이죠!"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고기를 씹을 만큼 주둥이가 튼실하나 보군 그래!"


 이것이 일주일 전 불패의 전사가 아흔 아홉살 먹은 노인네 루카스와의 대화다. 지금 그는 루카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표하고 있다.


"임종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루카스. 그래도 자네라면 이해해주겠지."


 도시에는 매일매일 죽는 이들이 있다. 노환으로, 사고로, 순직으로. 그럼에도 불패의 전사는 매번 비통함을 느낀다.


"이건 그저 내 개인적인 고민인데."


"300년 전에 자네들을 결코 해치지 않겠다는 그 맹세, 자칫하면 깨뜨릴 거 같아서. 그러지 않으려면 내가 그쪽이랑 밥이나 먹으러 가야할 거 같아."


"조금만 기다리게."


 그는 도시를 벗어나 설산을 향한다.




 불패의 전사는 산기슭을 오르며 처음 자신이 평원에 내려왔을 때 저지른 위대한 위업에 대해 떠올린다. 늘 그렇듯 강자와 약자가 존재했으며, 강자는 약자를 괴롭히고 약탈하고 살해했으며 약자는 그들에 맞서 미약하게나마 저항하거나 굴복하여 하루하루 탄식을 내뱉으며 보냈다. 불패의 전사는 그런 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만의 방식으로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을 제지하여 자기 밑으로 들어올 것을 권했고, 강자들은 그렇게 불패의 전사에게 도전했다. 그에게 도전했던, 그가 도전했던 수 없이 많은 강자들. 귀 수집가, 다윗과 거인 늑대, 마녀 아우라, 돌풍의 할버드, 더스틴. 그들을 터트리고, 찢어발기고, 박살냈으며 때로는 살해 당하기 까지 했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상의 강자들은 악마들의 왕보다 강력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불패의 전사가 승리했다. 불패의 전사는 약자들에게도 정복당할 것을 권유했다. 그저 또다른 무뢰배가 자신을 지배하려든다며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불패의 전사는 주먹으로 협박하고 위협하여 자기가 정한 틀 안에 살게 했다. 그렇게 그는 자기만족을 이루었다.


 불패의 전사가 산중턱에 오르자 고개를 돌려 도시를 바라보았다. 중턱에서 내려다봐도 다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거대한 도시는 백성들에게 안전한 삶과 풍족함을 제공하는 안식처지만, 불패의 전사의 모자란 통치력 뒤틀린 배려심 그리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인해 이루어진 공포의 역사가 더욱 더 길다. 사소하게는 술자리에서 평소보다 훨씬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불패의 전사가 한걸음에 다가와 소란의 장본인들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으로 침묵시켰고, 각 가정의 불화나 다툼조차 그가 개입하여 주먹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끝났다. 기나긴 기근과 혹한으로 식량난에 시달렸을 땐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자 불패의 전사는 처음에는 각자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도 남아있는 자들의 뺨을 후려갈기고, 그래도 남아있는 자들은 그자리에서 죽여버렸다. 같은 시기에 횡령이 발생하면 진범을 찾아내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잔혹하게 죽이고 그 가족들을 휘몰아치는 눈폭풍 너머로 추방해버렸다. 그가 결코 백성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것은 불과 300년 전이다.


 불패의 전사는 피와 공포로 물들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다 공기를 찢는 듯한 폭포 소리를 듣고 계곡 상류에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며 물가로 향한다. 그대로 손에 꽉 쥔 채 계곡물에 처박는데, 수통에서 올라오는 기포를 보며 자신의 주먹 아래에 희생된 백성들의 환영을 본다. 불패의 전사가 두개골을 박살내기 직전까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허기가 괴롭다며 어떻게든 해달라고 울부짖던 청년, 적어도 자기 아들은 자신들을 굶기지 않았으니 당신보다 낫다며 쏘아붙이던 횡령범의 부모와 그 친지들까지. 그는 그런 짓들이 아직 남아있는 자신의 소유물, 백성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 후회했고,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최선은 커녕 그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백성들을 다루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발견했다. 한편 그의 마음 속 어두운 한켠에서 어차피 백성들을 전리품으로 삼은 것과 다른 게 없으니 어떻게든 상관 없다며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그럴 때마다 불패의 전사는 처음 평원에 내려왔을 때 그들을 보고 보듬고 싶어했던 마음을 다시 추억해냈다.


 그는 뒤늦게 자비를 베풀고 자기 손이 가는대로 내려지는 극단적인 처벌 대신 똑똑하고 정의감 넘치는 이들을 모아 법을 제정하고 백성들을 수호하겠다는 맹세를 하였지만, 그의 악행이 쌓아온 업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추방당한 횡령범의 후예들이 도시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 세월이 자그마치 100년이 넘는다. 그중에 돌풍의 할버드는 불패의 전사를 기습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산을 스무 번 갈라버리며 도시 밖의 힘겨운 생활을 아느냐며 그를 원망했고, 더스틴은 그저 불패의 전사를 꺾어보는 게 소원이라 말했지만 천지를 뒤흔들며 내리꽂는 천둥에는 다분히 감정이 실려있었다. 190년 전 그들과의 격돌이 최후의 싸움이 되었고 이후 불패의 전사와 대적할 자가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가루눈을 품은 채 갑옷 사이로 스며들자 불패의 전사는 산 정상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한걸음 더 내딛자 뽀득하고 신발 아래 만년설이 그를 반기고 불패의 전사는 이에 응하듯이 거침없이 사박사박 눈 밭을 오른다. 그의 최초의 기억, 그는 설산에서 어중간한 움막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부족에서 쫓겨난 견습 주술사로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 잠깐 말을 가르치고 이유식 같은 것을 먹였을 때 빼고는 주문을 외우며 지옥을 바라보는 창을 소환해 그 너머를 관찰할 뿐이었다. 불패의 전사가 머리가 제법 커지자 사냥을 비롯한 모든 생활은 그가 책임져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주술을 부려 지옥 너머를 보는 것은 시간 때우기 괜찮았던 것이 불패의 전사에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러던 중 불패의 전사가 청년이 되자 아버지가 속했던 부족의 추적자들이 둘을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한참 전에 추방당했으나 시간이 흘러 부족이 대충 망해버리자 부족원들은 그 정신나간 주술사 탓으로 돌렸고, 그에 따라 불패의 전사와 아버지를 죽이러 온 것이었다.


 불패의 전사는 생애 처음으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고, 추적자들을 처치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주술을 읊으려 했고 오히려 더 실성한 듯 실실 웃어댔다. 불패의 전사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뭐라 말을 걸어야할지 움찔대다 아버지는 그에게 그동안 자신이 부린 주술을 함께 봐주어서 고맙다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생애 최후의 주술을 보여주겠다며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 덕분에. 적어도 만년설을 다 파고 다닐 필요도 없군."

 불패의 전사는 산행 중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천년이란 세월이 흘러 집터는 커녕 인간의 흔적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만년설에서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시체와 그때 불패의 전사가 처단한 추적자들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둥근 타원이 붉은 번개를 퍼뜨리며 둥둥 떠 있기 때문이다.

"지옥문."

"아직 그대로인걸 보니 악마들이 문을 닫는 걸 포기했나 보군."

 불패의 전사는 이틀 전 브렌다가 부러뜨린 중지과 검지를 매만진다. 예전 같았으면, 적어도 10년 전만 해도 이정도 부상 쯤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 나았을 것인데 그는 아직도 의원에서 매어준 붕대와 부목을 달고 있었다. 그의 육신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

"이제 이 땅엔 더 이상 불패는 필요 없어."

 그는 오늘날의 도시를 떠올린다. 도시 곳곳에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차고 창고에는 혹한을 넘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보존식이 풍족하다. 의회는 그냥저냥 굴러가고 아픈 사람이 있다면 의원에서 고쳐준다. 외적의 침입이 잦지도 않으며 도시의 무장은 부족하지 않다. 불패의 전사에 대적하는 강적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나타나더라도 브렌다가 있다.

"내가 간다, 악마들의 왕."

"제가 안내해드리죠."

 불패의 전사가 혼잣말을 읊주리는 동안 지옥문 건너편에서 난데 없이 푸르딩딩한 악마가 나타나 그의 말에 대답한다.

"앞장서라."

"누군지 물어보시지도 않는 군요."

"알 필요 없다. 네가 아니었어도 그쪽 주민 하나를 때려서 안내를 시킬 셈이었다."

"아.. 으음."

 푸른 악마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다시 연다.

"왕자입니다. 당신이 처음 침공했을 때 왕 앞에서 인질로 잡고 두개골을 부숴버리겠다며 협박 당했던 그 아이요."

"그 푸르딩딩한 놈이군. 더 좋지. 네 아비에게 안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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