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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기3 - 조선 대궐과 종사(宗社)의 개요/ 종묘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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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제례악 -

 


 

 

* 우리나라 궁궐과 종묘사직의 역사 *

 

 

사람이 사는 곳에는 '공간' 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 그게 집이고, 집 내에서 방의 역할은 구분됩니다.

 

더 나아가 집단,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도 공간의 역할은 구분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가장 중심지인 수도와 그 근방, 외곽지역, 군사 요충지 같은 곳이요.

 

 

수도에서도 공간은 구분됩니다. 수도에는 왕과 중앙 관리의 정무공간, 생활 공간, 의례장소 따위가 있죠.

 

 

특히 수도에서 정치공간으로서 왕과 귀족을 위한 궁전, 성 등이 옛날부터 존재했습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수도를 '경(京)', '도(都)' '성(城)' 등으로 지칭하는데, 

ex) 평양성, 사비성, 금성(서라벌,동경), 개성(개경&송도), 한성부(한양)

 

우리나라의 수도는 외부 성곽을 둘러 구분을 두었고, 보통 강과 가깝고 뒷편에 산이 있는 식으로 

 

교통적 입지가 좋고 방어가 용이하며 물자조달이 좋은 곳에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수도 내에 백성들의 주거지와 관청들, 그리고 '궁궐'이 존재했습니다.

 

수도 내 궁궐은 보통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역사상 수도 내에 궁궐이 여럿 있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정식 대내외 행사를 위한 법궁(法宮), 

 

 

임시로 머물거나 피난처 용도로 지은 행궁(行宮), 별궁(別宮)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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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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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명활산성 -

 

 

처음 혁거세 21년(기원전 37)에 궁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며, 파사왕(婆娑王) 22년(서기 1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그 둘레가 1천23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8백38보였다.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9백6보였다.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8백4보였다. 시조 이래로 왕들은 금성에 살았고, 후세에 이르러서는 두 월성에서 많이 살았다.

 

 - 삼국사기 제 34권, 잡지 : 지리 1 -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부터 도성 내에 궁궐 외에도 전시수도 및 방어용으로 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국내성과 환도산성, 웅진성의 공산성, 월성의 명활성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는 고려,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그 유명한 강도(江都;강화도), 남한산성 행궁, 수원화성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조선~삼한시대부터 중국과 교류가 잦았는데

 

삼국시대때 본격적으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관직과 제도를 개편하고,

 

수도 조영계획 또한 중국의 것을 많이 참고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오늘날의 계획도시처럼 도로와 건물 구획을 아주 자세하게 구분해놓습니다.

 

 

장안성식 수도조영.png

 

그런 움직임은 한(漢)나라 때 부터 활발했지만, 

 

특히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7세기의 당(唐)나라 때 입니다.

 

당시 당나라는 문화적, 군사적 전성기를 누리면서 율령격식(律令格式:법과 제도)을 정비했고

 

이는 후대 중국 왕조는 물론이고 주변의 신라, 발해, 일본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당시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직 제도, 복식, 의례, 도성과 궁궐의 형태가

 

당나라의 것과 비슷한 면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이것을 표준으로 동양 삼국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독자적인 분위기를 간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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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거세 신궁터로 추정되는 경주 나정(蘿井) -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영성(靈星)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이를 수신(襚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그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는 다음과 같다. 제2대 남해왕(南解王) 3년(서기 6)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제22대 지증왕(智證王) 때에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비로소 5묘(五廟)를 제정하였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의 시조로 세우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五廟)를 만들었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 때에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백제는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도읍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제 32권, 잡지 1 : 제사 -

 


 

성종(成宗) 7년(988) 12월 비로소 5묘(五廟)를 정하였다.

성종(成宗) 8년(989) 4월 태묘(太廟)를 짓기 시작하였다.

성종(成宗) 11년(992) 11월 태묘(太廟)가 완성되었으므로 유신에게 명하여 소목(昭穆)의 위차 및 체협의(禘祫儀)를 논의하여 정하도록 하였으며, 마침내 협례(祫禮)를 거행하였다.

 

- 고려사 제 15권, 예(禮) 3 : 길례대사 : 제릉 -

 


 

 

이달에 대묘(大廟: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대묘(大廟)의 대실(大室)은 7간(間)이며 당(堂)은 같게 하고 실(室)은 따로 하였다.

 

- 태조실록 제 8권 : 태조 4년 9월 29일 - 

 


 

 

선사시대에 제사나 주술의례는 제사장 처럼 권위있는 사람의 전유물이었듯

 

역사상 어느 문화권에서도 국가의 제사는 아무나 지낼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수도에는 궁궐 뿐 아니라 왕이나 귀족의 제사시설도 있었습니다.

 

제사문화는 모든 문화권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애니미즘, 토테미즘이 이어져서 조상신과 천신에 제사지내는 의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각각 종묘사직이라는 형태로 '유교적 제사'화 된 것은

 

위에 언급했듯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주나라 때의 예법과 제도를 정비한 삼례(三禮 : 주례, 의례, 예기) 중 <예기(禮記)>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7위, 제후(諸侯)는 5위, 대부(大夫)는 3위, 사(士)는 1위를 모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천자국은 역대로 중국이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종묘(宗廟)에는 보통 5위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이러한 <예기>에 의거한 제사의 형태는 통일신라 신문왕때 처음 기록이 보이고

 

혜공왕때는 확실히 5묘를 제정했다고 하면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사직(社稷)에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하는데

 

땅은 천하를 이루는 가장 근본이고 땅의 작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직에 대한 제사의 중요성과 그 격은 매우 높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신라 선덕왕, 고려 성종, 조선 태조 때 각각 사직단을 세운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사직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는것 자체가 한 나라를 구성하고 있다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종묘의 제사는 조상 숭배를 통한 지배계층 내의 결속과 왕통을 재확인하는 의미라면

 

사직의 제사는 지배자가 국토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진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종묘와 사직단은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고, <예기>에선 '좌묘우사(左廟右社)' 라 하여

 

궁궐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으로 종묘를 왼쪽에, 사직단을 오른쪽에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 종묘와 사직단의 위치가 경복궁이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서울의 조선 5대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의 위치*

 


 

서울 5대궁궐과 종묘사직.png

 -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의거해 경복궁 남향 기준으로 종묘와 사직단이 좌우에 배치되어있다 -

 

 

* 경복궁(景福宮)1392~1592, 1867~

조선의 법궁(공식 궁궐).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정도전의 주도하에 지음. 

임진왜란때 불탔다가 흥선대원군이 대규모로 중건

 

* 창덕궁(景福宮)1405~1592, 1609~

태종 5년에 지은 이궁(별도의 궁궐).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때 복구. 

왕의 실질적 생활공간이자 조선 후기에는 실질적 법궁의 역할.

 

* 창경궁(昌慶宮)1483~1592, 1616~

원래 세종이 태종을 위해 지었던 수강궁(壽康宮)을 성종 때 확장한 후 창경궁이라 개칭.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구했으나 잦은 화재가 있었음. 

창덕궁과 묶어서 동궐(東闕)이라 부르기도 함. 

일제강점기 때 전각이 허물어지고 창경원으로 변경 후 관람지로 변모하는 풍운을 겪음

 

* 경희궁(慶熙宮)1617~

광해군이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가 다시 옮겨 온 것이 이곳. 

인조 이후 서궐(西闕)이라 불리면서 정사를 보는 중심지가 됨. 

 

* 덕수궁(德壽宮)1593~

본래 선조의 임시거처로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었는데 확장하면서 1611년 광해군때 경운궁(慶運宮)으로 개칭.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주요 거처로 삼으면서 대한제국의 정궁이 됨. 근대식 건축물인 석조전(慶運宮)이 존재.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퇴위하면서 순종이 덕수궁이라고 개칭함.

 

* 종묘(宗廟)1395~1592, 1608~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 사당. 태조가 한양 천도할 때 완공.

임진왜란때 소실됐다가 1608년 광해군 때 중건.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제례를 봉행함.

 

* 사직단(社稷壇)1395~

땅과 곡식의 신 및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 태조의 명으로 종묘와 같은 시기에 조영되었으며

 

후에 지방에도 각지에 사직단이 조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 종묘(宗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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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정문인 외삼문(外三門)과 그 앞의 하마비(下馬碑)입니다. 

 

하마비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궁궐 정문 밖이나 성균관, 종묘 등 주로 의식을 행하는 요하고 엄숙한 장소에 세워졌으며 

 

각 지방의 향교 문묘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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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입구부터 중앙에는 세 갈래 돌 길이 나있습니다. 이 길은 삼도(三道)라고 부릅니다.

 

중앙의 길은 신로(神路), 즉 조상신이 넘나드는 가장 성스러운 길로 아무도 함부로 다닐수 없었습니다.

 

신로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 그 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길입니다.

 

신하와 수행원은 삼도 바깥을 걸어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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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대청(香大廳)은 종묘제례에 쓸 향과 축문, 예물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또 제사를 지낼 제관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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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궁(齋宮)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는 등 준비를 하던 곳입니다. 세 채의 건물이 있는데

 

정중앙은 어재실이라 하여 임금의 대기실, 동쪽은 세자의 대기실, 서쪽은 목욕재계를 하던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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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에에에에에에.....

 

정전(正殿)이 공사중이었습니다 ㅠㅠㅠㅠㅠ

 

그 장엄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공사천막만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정전은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종묘제례(宗廟祭禮)를 행하는 장소가 이곳입니다.

 

19실의 신주를 놓는 신실이 있고 각 신실 앞에는 각각 예물을 놓는 장소가 따로 있습니다.

 

원래 '제후의 신주는 5위를 둔다' 는 <예기>에 의거해 정전이 지어졌지만, 

 

현재 19실인 이유는 불천위(不迁位)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 대가 내려갈수록 모셔야할 제사의 신주도 바뀌는 법인데 

Ex) 현조-> 고조-> 증조-> 조부-> 부-> 자 (현조의 신주교체)

 

불천위는 공적이 매우 커서, 신주를 바꾸지 않고 계속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를 말합니다.

 

재위한 왕이 늘어나면서 불천위에 모셔지는 왕도 늘어났고

 

원래 5위 신주 + 불천위가 합해졌기 때문에 계속 증축하다보니... 19칸이 된 것입니다.

 

 

총 19명의 왕의 신주와 30명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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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묘 정전의 평소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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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청(樂工廳)은 종묘제례가 있을때 악공들이 모여서 대기하던 장소입니다.

 

종묘제례 때 가무와 함께 악공들은 대단히 정제되고 엄숙한 음악을 켜도록 되어있었는데

 

왕조의 학문적 업적을 칭송하는 보태평(保太平)과 군사적 업적을 칭송하는 정대업(定大業)을 연주하니

 

이를 음악과 가무를 합쳐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라고 합니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200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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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과 악공청을 지나 왼쪽에 있는 마지막 주요건물인 영녕전(永寧殿)입니다. 

 

정전의 5위에 모셔졌다가 불천위가 아닌 경우에는 이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겼습니다.

 

이렇게 모실 대가 지난 신주를 따로 모시는 경우는 특이한데, 송나라의 경우를 참조했다고 합니다.

 

영녕전의 규모는 정전보다 작지만 거의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보기에는 훨씬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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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 중앙 추녀마루 끝 위에는 작은 토우(土偶:구운 흙 인형)가 좌우로 5개씩 있는데

 

이렇게 궁궐 건물 추녀마루 끝을 장식하는 토우를 일컬어 잡상(雜像)이라고 합니다.

 

궁궐 전각마다 잡상의 형태나 놓인 갯수가 다른데, 최소 4개에서 경회루의 경우 11개까지 있기도 합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하면 이 잡상은 <서유기>의 삼장법사, 손오공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각각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장식적인 의미에 더해, 건물을 보호하는 주술적 의미로 올린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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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에서 입구로 돌아가는 길에 찍은 사진입니다.

 

종묘 내부 공간은 건축물과 삼도가 있는 구간을 빼고는 녹음이 울창한 숲입니다.

 

우거진 고목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것 같다가도 몸체에 피어난 묵은 이끼에게서

 

신주가 하나 둘 늘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의를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갔을 오백년의 세월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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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종묘는 그 역사성과 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종묘와 궁궐 여행은 지난 일요일(11) 하루에 모두 했었지만

 

글을 쓰다가 분량이 너무 길어지고, 중간에 한 번 날려먹음으로써

 

종묘 부분까지만 쓰고 궁궐 탐방은 4편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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