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보기] 상품은 흘러야 한다, <동인도회사>
<동인도회사>는 해상 무역을 테마로 한 유로 게임으로, 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른 물가 변동과 주식 등의 개념이 잘 녹아 있습니다. 상품 공급량을 결정하는 주사위 굴림으로 인한 운 요소가 약간 있으나 대부분은 플레이어 인터랙션으로 매 양상이 변화합니다. 그렇기에 상호작용이 꽤 강하고, 줄서기 시스템이 있어 플레이어 수가 많을수록 진가를 발휘합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독자적인 메커니즘은 없습니다. 그러나 게임의 진행과 상황 변화가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복잡하지 않은 규칙으로 상당히 다채로운 변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게임 속에서 주요한 요소들을 제가 몇 가지 설명드리고 나면, 아마 여러분은 규칙서가 없이도 이 게임이 무엇을 즐기는 게임인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둘. 선박과 항해
위에서 계속 이어서 생각해 봅시다. 타지 시장에서 누군가가 먼저 상품을 사가면 그 상품이 희소해지고, 자연히 가격은 올라가겠죠. 반대로 현지 시장에서 누군가가 상품을 먼저 팔면 시장에 공급량이 늘어나니 후주자들은 상품을 저가에 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 경쟁이 생깁니다. 어느 시장에든 먼저 도착하는 게 이윤 폭을 키우기 좋죠.
그러면 누가 먼저 사고 누가 먼저 팔까요? 선적/판매 단계에 차례를 진행하는 선박 순서는 [1. 그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 / 2. 속도가 더 빠른 선박 / 3. 그 항구로 먼저 출항한 선박]입니다.
여러분의 선박에는 속도와 적재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대개 이 둘은 반비례 관계입니다. 많이 사오려면 속도를 양보해야 하고, 속도를 중시하면 남들이 상품을 넉넉하게 살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보낼 수 있는 권역은 총 3군데입니다. 어느 권역이든 차는 기본으로 판매하고, 중국(권역 I)에서는 비단을, 동남아시아(권역 II)에서는 커피를, 인도(권역 III)에서는 향신료를 판매합니다.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는 차가 제일 마진율이 떨어지고, 어지간해서는 언제든 살 수 있으니 대개 차순위 구매 품목이 됩니다. 즉 그 이외 품목 가운데에서 시장 상황에 따라 팔기 좋은 걸 남들보다 먼저 사서 먼저 팔기 위해 속도에 투자하든지, 타이밍과 박리다매를 노리고 적재량에 투자하든지 할 겁니다. 남들보다 너무 뒤에 도착해서 살 물건이 없다면, 이번 차례의 희생을 각오하고 선박을 그곳에 알박기해 버리는 것도 유효합니다(다만, 차례에 매출이 너무 낮으면 주가가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어느 권역에 보낼지, 어느 선박을 보낼지, 남이 출항시키기 전에 보낼지 후에 보낼지, 온통 눈치 봐서 고민할 것들이 잔뜩입니다. 그걸 위해 시장 상황도 읽어야 하고 남들이 뭘 노리는지도 예측해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의 판단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겁니다.
셋. 대리인 보내기
본격적으로 배들을 출항시키기 전, 여러분은 이 상업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에게 대리인을 보내서 수익 극대화를 위한 각종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미 위에서 게임의 기본 흐름을 충분히 설명했으니, 그게 이해가 되었다면 이 아래에 나오는, 누구를 만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를 보면서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거의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 교역상(Trader)을 만나면, 차를 제외한 상품 중 하나를 이번 라운드 동안 1원 더 비싸게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 투자자(Investor)를 만나면, 선박을 구입할 수도 있고, 유럽 카드(현지 시장 카드)를 내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거나 앞사람이 선택한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 총독(Governor)을 만나면, 타지 시장에서 상품을 1원 싸게 사게 해 주는 교역소를 설치할 수도 있고, 극동 카드(타지 시장 카드)를 내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거나 앞사람이 선택한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 선주(Shipowner)를 만나면, 선박을 구입하거나, 추가 구입한 선박을 대놓을 수 있고 화물을 보관하게도 해 주는 부두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 선장(Captain)을 만나면, 출항 순서를 좌우하는 우선권을 높이거나, 항해 비용을 낮출 수 있습니다.
넷. 주식
플레이어마다 주식 7개씩을 증권 거래소에 둡니다. 여러분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주식을 사서 그 돈의 가치를 불립니다. 주식을 살 돈을 벌려면 라운드 동안 경영을 잘 해야 하는데, 경영을 잘 한 사람은 주식 가치가 그만큼 쭉쭉 올라갑니다. 내가 경영에서 좀 밀린다고 생각된다면, 잘나가는 사람의 주식을 눈치껏 쌀 때 잘 사 놓으세요. 주식 투자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지만 운용에서 약간 밀린다 싶은 부분은 충분히 받쳐줄 겁니다.
주가는 매번 상승하지 않습니다. 이전 라운드보다 매출액을 높여야 상승합니다. 매출 규모가 떨어지면 당연히 주가가 하락합니다. 주가가 올라가면 뭐 얼마나 올라가겠나 싶겠지만, 누군가가 주식을 사도 1칸 올라가고 매출액을 잘 달성해도 1~5칸 올라가니 총 다섯 시대, 즉 5라운드를 진행하는 게임에서 성장 폭을 꽤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믿고 무턱대고 주식에 투자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결국 주식 매수란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건데, 선적과 판매가 좋지 못하면 돈이 벌리지 않으니 주식 매수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거든요. 한정된 돈으로 언제 회사에 투자하고 언제 주식에 투자할지, (하다못해 주식을 담보 잡더라도)어떻게 돈을 벌어들일지 등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디테일한 규칙들이 규칙서에 나와 있지만, 게임에서 중요한 건 위에서 이야기한 일련의 흐름입니다. 메커니즘적인 특성이 강해서 외운 뒤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류의 게임이 아니라, 일정한 원리에 따라 (특히 플레이어들의 선택과 행위에 의해) 매번 동적으로 변화하는 게임 상황을 읽고, 적절한 예측과 과감한 도박 사이의 조율을 해내는 사람이 승리를 거머쥡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히트>가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진행되는 매우 미시적인 플로우를 따라가는 게임이라면, <동인도회사>는 시장 변동을 두어 라운드 정도 폭으로 바라보는 거시적인 조망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로 게임의 완성도를 잔뜩 가미한 <마닐라>(특히 인터랙션의 측면에서)라고 평가합니다만 마닐라를 떠올리는 사람은 저 한 사람 정도밖에 없긴 하더군요. 플레이 인원수를 4인으로 종종 맞출 수 있는 분이라면 특히 추천드립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 페스타에서 4명으로 현장 체험도 꼭 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 게임 도슨트 <동인도회사>
-
①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게 해줄 좋은 러닝화
② 물건 잔뜩 쓸어담을 수 있게 해줄 넉넉한 가방
③ 내일 나를 가장 앞자리에 있게 해줄 1번 대기석과 기다림의 미학
재미와 게임성을 믿고 소신껏 미는 <동인도회사>입니다. 개인적으로 2023년 올해의 게임 중 하나로 꼽고, 어쩌면 다른 분들의 올해의 게임 후보에도 오르지 않을까 싶은 게임이네요. 유명한 거장급 작가 + 화려한 구성물 + 제작사 파워라는 수저를 물고 태어난 <다윈의 여정>과는 달리, 이 게임은 취향이 갈릴 수 있는 테마인 데다가 명성은 커녕 생소하기까지 할 수 있을 텐데요. 당최 어떤 마성의 매력이길래 그만한 반열에 올리게끔 한 것인지, 일부 순간을 포착하여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2원에 사서 9원에 파는 상상.
간략하게 예시를 들어 수익 계산부터 해볼까요? 비단은 중국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런데 (사전에 대리인을 선장에게 보내서 지도 제작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선박 한 척을 보낼 때마다 운송료로 2원씩 들어요 .다행히 올 때는 비용을 물지 않습니다(
항해 비용 = 2원(중국) x 선박 2척 = 4원
이번 시대에는 풍년인 덕에 비단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생산되는 상품은 시장판의 아래에서부터 채워지고요. 그림에서 보다시피 비단이 3원짜리 2개를 채우고도 더 많이 생산될 경우, 가격이 더 떨어져서 초과량 2개는 개당 2원이 됩니다. 선박을 2척이나 보냈지만, 우리 선박의 적재량이 모자라서 비단 3개만 사 봅시다.
구입 비용 = (2원 x 비단 2개) + (3원 x 비단 1개) = 7원
이제 만선의 꿈을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 팔 시간입니다. 사실 사전에 교역상에게 대리인을 보내 둔 상황이라, 우리는 비단을 팔 때마다 1원 더 비싸게 팔 수 있답니다.
하지만 본국에 돌아와 보니 이게 웬걸, 모종의 이유로 우리보다 더 빠르게 비단을 팔아버린 사람들이 있었군요! 비단 가격이 갑작스럽게 7원 선까지 떨어집니다. 만약 이대로 판매한다면,
매출 = (7원 x 비단 1개) + (6원 x 비단 2개) + (교역상 보너스 x 비단 3개) = 22원
만약 비단 3개를 전부 9원의 시세로 팔았더라면 추가로 8원을 더 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거의 비단 1개 값…!). 눈물을 머금고 후려친 가격으로 팔아 봅니다. 매출 22원.
만약 우리에게 부두가 최대로 확장되어 있었다면, 팔지 않기로 할 수도 있답니다. 본국 창고에 잠시 묵혀 두었다가, 다음 시대에 선박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 때 그들보다 먼저 시장에 팔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빨라도 문 앞에서 대기하는 사람을 못 이기는 법. 바로 이것이 아까 모종의 이유로 우리보다 먼저 비단이 판매된 이유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창고에서 판매할 때에도 비단 가격이 치솟을지는…
매출이 22원이었으니, 매출 기록 마커를 20+ 칸으로 옮깁니다. 이전 시대에는 매출이 10원도 안 되었다고 가정하고(
마커가 2칸 전진했으니, 주식 가치도 덩달아 2칸 전진합니다. 9만전자에서 11만전자가 되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요.
당장 수중에 있는 돈으로만 따져도, 11원 투자해서 22원을 벌었고, 자사주 가치가 2원이 올랐으니 적어도 4원어치는 더 이득을 보았군요(게임 시작 시 각자 자사 주식 타일 2개씩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주식이 있는 게임이면 으레 배당도 있다는 것. 주가가 11~15원인 구역에는 배당금이 2원입니다. 예시 그림처럼 우리도 남들에게 우리 주식 타일 1개당 2원씩 배당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증권가 못지않은 정보전
이 게임은 수요와 공급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측을 못하겠다면 수요나 공급을 직접 창출할 수도 있고요. 거의 시장을 조작하는 수준의 게임 요소이니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거예요.
유럽의 시장 판입니다. 주사위와 카드에 그려진 상품 개수의 합만큼 상품이 소비됩니다. 주사위까지는 공개 정보라 모두가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카드는? 선택된 자만 볼 수 있답니다.
주사위만 보면 비단의 수요는 1개입니다. 1개가 소비되어도 비단의 시세는 여전히 6원이지요. 하지만 카드의 정보까지 알고 있다면, 비단이 총 5개가 소비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시세가 6원이 아니라 8원이 된다는 점을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안다는 것만큼 강력한 것이 더 있을까요?
사전에 투자자에게 대리인을 보내 두었다면 수요량의 정보를 시장 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고, 총독에게 대리인을 보냈다면 공급량을 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심지어 가장 먼저 이곳에 대리인을 보낸 사람은 카드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카드를 놓일지 직접 고르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시세 조작!
누가 빠르고 누가 많이 담는가
앞선 예시에서 선박을 중국에 보냈지요? 사실 이 과정은 선박을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보낼 뿐더러, 각자 비공개로 선박을 보내기 때문에 누가 어떤 적재량/속력의 선박을 어디로 보냈는지는 선적이 시작되기 전까지 알 수 없습니다. 오픈런 하자마자 제일 앞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큰 가방 든 사람과 발 빠른 사람이 앞서 가서 모두 쓸어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집니다. 공급량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인도로 달려갔다? 그렇다는 것은 인도에서만 파는 향신료 생산이 풍년일 것인가? 그로 인해 향신료 가격이 얼마나 떨어질 것인가? 저 배는 그럼 적재량과 속력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 내가 카레 코인을 타면 얼마 정도 익절할 수 있을 것인가?
게임 밸런스 상 대체로 빠른 배는 적재량이 작고, 많이 싣는 배는 속력이 느린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한다면 비록 생산/공급 정보를 손에 쥐고 있지 않더라도 눈치만으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예요.
대주주가 되어 보기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주식 배당의 현장. 결코 캡쳐가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주식 요소가 있는 게임에서 신나요님이 즐겨 하는 플레이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회사 운영은 뒷전으로 하고 주식 투자에 몰두하기. <동인도회사>도 그런 로망을 실현시켜 줄 여지가 있더라고요. 자기 회사 운영은 주식을 구매할 정도로 최소한으로만 한 다음, 그 매출로 번 돈으로 남의 우량주에 투자하는 방식입니다. 운과 무작위 요소가 생산/공급 주사위 정도뿐일 정도로 소위 실력 게임이 될 뻔했지만, 급등하는 주식을 사 두어서 신흥 주식 부자가 될 수 있는 요행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 게임의 큰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실력의 격차가 있더라도 투자의 꿈이 있는 한 그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