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무스메 | 구독자 17명 | 김고양이ミ●△●ミ

[괴문서] 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지땅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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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잔디와 더트를 넘나들며, 나란히 달리는 자에게 공포가 되던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그녀의 무자비한 출주에 어떤 이들은 절망하고, 누군가는 슬퍼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




「재팬 더트 더비, 디지털이 또 달린다.」


「더트를 넘어 잔디로, 다시 잔디를 넘어 더트로. 잔디도, 더트도 안심할 곳은 없다.」


「뜨거운 여름이 한층 달궈진다.」



"..."



8월에 있을 코믹마켓의 정보 수집을 위해 웹사이트를 서핑하던 중, 사이트 중앙에 걸려있는 디지털의 기사를 보게되었다.


본문은 하나 같이 디지털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더트와 잔디를 오가며 마일레이스 재패하는 파격적인 행보가 매우 놀랍다는 게 주된 반응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히아신스 스테이크스를 데뷔로 잔디 G1을 우승, 다시 더트로 돌아와 더트 G1 우승을 쟁취했으니까.


한두번이 끝인가? 그것도 아니다. 더트와 잔디를 오가는 최강의 우마무스메. 그녀가 바로 디지털이다.


일본 경마 역사에는 전례가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최초가 되었다.


「전장을 가리지 않는 '용사'」



"......"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는 솔직히 이 정도까지 잘 달리리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스퍼트, 모든 우마무스메를 꿰뚫어보는 무한한 지식.


결정적으로 절대로 그녀들을 동정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에서 나오는 전심전력.


그것이 지금의 디지털을 최강으로 만든 원인.


이는 그야말로 용사, 영웅의 자태.


마땅히 칭송받아 마땅할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진 그녀는 지금



"우효오옷~! 트레이너님, 트레이너님! 이거 보세요! 타카라즈카에서 골드쉽님이 전례없는 완벽한 달리기를!! 이건 귀하네요~!"



언제나 그랬듯이 우마무스메의 덕질을 한창 진행중이시다.


이번에는 누구냐, 골드 쉽이냐?



"이거! 이거! 이럴 수가! 평소에는 트레이닝도 땡땡이치고, 레이스에는 관심도 없던 골드쉽님이! 이렇게나 진지한 얼굴로 선행싸움이라니이~ 이건 희귀! 레어! SSR!!!"


"그렇구나."


"오호라~ 이기고 나서는 토센조던님을 향해 뭔가 말하는 걸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뭐 때문일까~? 궁금해! 하지만, 직접 물어보는 것은 내 신념에..!"


"흐음~ 그렇네~."


"크읏, 하지만 이 궁금함을 주체할 수가.. 어쩌면 좋죠... 아! 그래요! 트레이너님이 한번 물어봐 주시면!"



쾅!



"디지털!"


"네?"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동영상을 보던 디지털이 마침내 얼굴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집중을 해주는군.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딱 이 한마디만 하겠다.


진지한 얼굴로 나는 디지털에게 말했다.



"골드 쉽 타카라즈카 2연패 기념 인형이 나온다는데?"


"정말인가요?! 지금 당장 예약구매를!"


"이번 코믹마켓에서 트레센이 아예 부스를 내나 봐. 거기서만 구매할 수 있대."


"우햐앗~ 기대만발이네요! 이번 코밋마켓은!"


"인형 살 돈은 있어?"


"용돈도 모아놨고, 우승상금도 있으니 충분해요! 아, 그러고보니 곧 레이스가 있었죠! 한밤중에 더트를 달리는 최애들이라니... 모에에에엣!!"


"그럼 트레이닝이라도 하러갈까?"


"물론이지요! 노력 없이 모에는 없다!"


"노력 없이 모에는 없다!"



여름이었다.







"으햐~ 오늘도 힘들었네요. 하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난 뒤의 역 앞에서의 쇼핑은 참을 수가 없단 말이죠~"



으히, 하고 웃으며 역 앞 쇼핑몰을 둘러보는 디지털.



트레이닝을 끝내고 학원에서 잠시 나와 역으로 나왔기에 이미 역 앞 쇼핑몰은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해 시끌벅적한 하루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고


뉘엿뉘엿 져가는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고개를 젖혀 천천히 몸을 산에 뉘면서 반대쪽 하늘이 덮어주는 반짝이는 별과 구름으로 장식된 검은 이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어느새 살갑게 식어 지글지글 익은 음식들의 냄새만이 그 날의 온기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히히~ 오늘의 최애굿즈는 뭘까요~"


"저기..."


"으헤헤.. 에?"



열심히 최애의 굿즈들을 구경하며 침을 흘리던 디지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아그네스 디지털씨 맞으시죠?


"아, 네에. 본인입니다만."


"헉! 진짜 아그네스 디지털님이신가요?! 저 진짜 팬이에요! 마일 CS에서 뛰시는거 직관까지 했다구요!"


"아, 감사합니다. 여기서 팬분을 만날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아하하.."


"덕은계를못탄다는말이있는데저는거기서예외인가봐요이렇게디지털님도뵈고진짜너무행복해요이게진짜꿈은아닐까아니면평소에착하게산덕분에이렇게복을받는건지아아시라오키님감사합니다시멘라멘오멘키멘나무관세음시라오키보살평생이런행복이오리라곤생각도못했는데이런날도다있네요혹시시시시시시실례가안된다면싸인이라도한장아니두장아니기왕이면제가가진모든종이랑펜을다쓸때까지아니이건너무오바인가요역시민폐겠죠죄송합니다하지만이런저라도괜찮으시다면몸에다가싸인을해주시면정말평생의영광으로기록하겠씁니다평생씻지도않고포르말린에절여서집안대대로전하도록할게요정말영원히지구가멸망토록진짜삼여신이시여감사합니다제게이런행원을주시다니앞으로도열심히살겠씁니다감사합니다아혹시괜찮으시다면제가커피라도한잔아니혹시싫어하신다면원하시는음료몇잔이라도사드리겠씁니다제발한번만같이먹어주실순없나요제가이렇게빌게요앞으로나가시는모든레이스관람은물론이거니와응원마권도열장씩사겠씁니다진짜부디제게한번만위대한룩카데바카시여만세바알세불의언니이신바알이여영원하라모든마신보다나이많은모락스여감사합니다제게오늘의바람을맞이하게해주신바르바토스님사모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느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느닷없이 들이닥친 내 팬은 코앞에서 나를 봤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장렬히 산화하고 있었다.


하나 그것뿐이었다면 다행이었으리라, 내가 당황한 틈을 타 그는 디지털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세차게 흔들며 울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으앗? 이러시면 안되요!"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당혹스럽고, 또 불쾌했다.


자신의 경기를 봐주러 오는 팬들은 몇 번이고 봐왔다.


하지만 일상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가오며 과격한 팬을 만난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더욱이 자신은 우마무스메였고 상대는 인간이다.


힘을 잘못 주어 자신의 팬을 날려버리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은퇴수순을 밟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있을 뿐이었다.



'어..어쩌죠? 어떻게 해야...'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밖에다 세워놓을 게 아니라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서..!"


"중등부 아이를 함부로 데려갔다간 경찰한테 끌려가실 텐데요."


"예? 누구?"



그녀의 팬이 그녀를 데려가려던 순간, 누군가 나타나 우릴 가로막았다.



"그 애 트레이너 되는 사람입니다. 우선 손부터 놓아주시죠."



"헉! 죄송합니다! 아프셨죠!"



나타난 것은 트레이너.


단호한 표정으로 팬의 행동을 저지하며 나타났다.


화들짝 놀라며 잡고있던 손을 놓는 팬, 그리고 동시에 트레이너는 내 앞으로 들어오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팬심은 이해합니다만, 이렇게 사생활에 간섭하시면 곤란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들뜬마음에 그만.."



트레이너는 내 손을 잡아 트레이너의 등 뒤로 이끌었다.


평소에는 볼 일이 없던 트레이너의 등은 생각보다 더 넓었고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팬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트레이너가 팬을 돌려보내는 동안, 나는 트레이너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상황이 정리되기만을 기다렸다.


트레이너의 등은 크고, 따뜻하며, 포근했다.


어쩌면 조금 뜨거웠을지도 모르지만,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신경쓰이는 건 등이 아니니까.


그의 손.


나를 숨기기 위해 등 뒤로 끌어올 때 잡은 손.


그리고 여전히 놓지 않은 손.


아까 팬이라는 작자가 꽉 쥐고 있었기에 조금 아팠던 내 손을 부드럽게 맞잡아 주고 있었다.


어째서 일까.


분명 아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손잡기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따스한 것일까.


어째서 이리도 심장이 뛰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어째서,


나는 그가 와준 것이 기쁘다고 생각한 것일까.







"..."



그날 밤, 디지털은 책상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고민에 빠진듯한 얼굴은 덤이었다.


영혼이 빠진듯한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당황스러우리라.


그리고 그건 그녀의 룸메이트, 아그네스 타키온도 매한가지였다.



"어쩐지 최근 연구가 잘 풀린다더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로군, 디지털양?"


"네엣?! 아.. 그렇게나 눈에 띄나요?"


"평소 자네답지 않은 행동을 하니 당연하지.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 테니 한번 말해보게."


"정말인가요? 사실은 그게.."



디지털은 오늘 있었던 일, 그때 느낀 감정을 털어놓는다.



"그래서.. 얼굴이 뜨거워져서..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그랬어요..."


"흠, 과연.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자네의 트레이너도 꽤 감이 좋군. 그런 일이 생기자마자 바로 나타난 걸 보면."



후훗, 하고 웃으며 머그잔에 담긴 물을 마신 타키온은 말을 이어나갔다.



"대충 들어보니, 자네의 현 상태가 어떤지 알 것 같네. 원인도 말이지."


"정말인가요!? ..라고 하기엔, 사실 저도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어요. 뭐가 문제인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디지털이 말했다.



"역시 부정맥인거죠? 역시 트레이너님께 말하고 병원을 가보는 게─"


"─자네는 사랑에 빠진 걸세."


"좋겠..."



네에?



"네에?"



"못 들었나? 상사병이라고. 상.사.병."



그 말을 들은 디지털의 뇌가 잠시 꺼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네에에에에에ㅔ에ㅔ에엣?!"


"왜 그렇게 놀라나?"


"아니 아니, 보통 타키온님 같은 캐릭터는 이럴 때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걸로 봐선, 부정맥인 것 같군'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아서..!"


"자네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여튼 자넨 지금 자네의 트레이너에게 반한 걸로 밖엔 안 보이군."


"하지만! 그.. 그냥 우연일 가능성은..!"


"그게 우연이면 세상에 인연은 없다네."


"저는 우마무스메 애호가이고! 히토미미는..!"


"그거야 자네에게 달렸지. 그것보다 자네 호모필리아였나?"


"저는 학생이고! 트레이너는 성인이신데!"


"괴문서에서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자신의 주장을 모두 논파당한 디지털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그럴 리 없다며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누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있던 타키온의 한 마디.



"자네 그거 아나? 자네의 트레이너가 최근에 다른 이랑 밤을 새우고 아침에 복귀한 거?"


"...예?"



팔락거리며 격렬히 부끄러워하던 디지털의 양쪽 귀가 쫑긋 섰다.


눈의 안광이 사라지며 입꼬리는 바닥을 향했다.



"타키온씨. 혹시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사례라면 톡톡히 하겠습니다."


"연구비에 보탬이 되겠지만, 사양하겠네."



쾅!



디지털은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어째서요!"



노기가 서린 그녀의 모습에 타키온의 귀가 쫑긋 섰다.


디지털이 매우 사나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자 비로소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디지털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야 남자니까."



"..."



디지털은 아차 싶었다.


확실히 그녀는 다른 이가 여자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을 새웠다고만 했을 뿐.


당연히 여자라고 디지털이 넘겨짚고, 그걸로 타키온에게 화를 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직후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사과를 하는 디지털.


하지만 타키온은 사과를 받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자네, 화를 냈군?"


"죄송해요! 저는 당연히 타키온님이 일부러 숨기시는 줄 알고..!"


"아니, 그게 아닐세."


"그, 끝까지 듣지 않고 먼저 화부터 내서..!"


"자네는 방금 자네의 트레이너가 여자랑 외박을 했다는 데에서 화를 냈어."



"...!"



"자네가 정말 자네의 트레이너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방금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겠지. 하지만 자넨 화를 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라며 타키온은 말을 이어나간다.



"질문을 바꾸어 볼까? 평소에 자네가 생각하는 자네의 트레이너 장점을 말해보게."


"어.. 그게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디지털은 평소에 생각하던 그녀의 트레이너의 장점들을 나열한다.


자신의 덕질에 잘 어울려준다.


윽박지르지 않고 다정하게 말로 해준다.


항상 내 앞에 있어준다. 등등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렵사리 트레이너의 장점들을 말하자 타키온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자네는 그 누구보다도 자네의 트레이너의 장점을 잘 알고있군.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그에게 관심이 많다는 얘기기도 하지."



숨을 고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수긍일세. 자네가 자네의 트레이너를 좋아한다는 인정. 내가 반했다고 인정하는 용기. 그게 다일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다 한 것 같군. 불을 꺼도 되겠나?"


"옛? 타키온님?"



탁.



타키온은 스위치를 눌러 방안의 불을 끈다.


어두워진 방안. 그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 한마디를 건넨다.



"남은 건 자네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그뿐일세. 생각할 시간은 많으니까. 그럼 좋은 꿈 꾸길 비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부스럭거리는 디지털의 뒤척이는 소리만이 그녀의 고뇌를 말해줄 뿐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잘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침대에서 뒤척이며 잠들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눈을 감고 양을 세고, 베개를 바꿔도 보았지만 그녀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저 뛰는 심장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음속으로 자그만 다짐을 하면서.







다음날.



"얜 또 왜 안온다냐.. 어디 아픈가?"



트레이너룸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트레이너.


하지만 트레이닝을 약속한 시간이 다 되도록 그녀는 트레이너룸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릿토 생활관에라도 찾아가 봐야 하나 싶던 찰나, 트레이너의 핸드폰이 움직였다.



우우웅.



"음?"



트레이너에게 온 한통의 문자.


발신자는 디지털.



"뭐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긴 했으나 이런 형태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평소랑 다른데..? 정말 무슨 일 있나?



하여튼, 그녀로부터 온 유일한 연락을 읽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핸드폰을 켜고 그녀의 문자를 확인한다.



[트레이너씨, 재팬 더트 더비에 관해 연락드려요.]



긴 내용의 문자. 정리하자면 재팬 더트 더비는 저녁에 열리므로 낮에 연습하는 것 보다는 밤에 연습하는게 좋지 않겠냐는 내용.



"...뭐 제 할 일은 다 하는 애니까 이해는 된다만... 굳이 이런 얘기를 문자로 할 필요가 있나..?"



조금 께름칙하긴 했지만 별일은 아니겠거니 싶었다.



착실한 애니까. 뭐 나쁜짓 할려는 것도 아닐거고.



"...밤에 뛰면 키 안 클텐데."



키를 신경쓰는 것 같진 않았지만. 성장기니까...



그저 그런 잡생각만 날 뿐이었다.







"흐아아암... 왔냐?"


"흐에? 트레이너, 많이 피곤하신가요?"


"조금? 뭐 괜찮아. 밤새는 거 일도 아니고."


"그럼 안되죠! 트레이너룸으로 돌아갈까요?"


"너 트레이닝은 어쩌고? 메뉴는 다 짜 놨으니까, 몸부터 풀어라."


"메뉴만 알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트레이너룸으로 갈까요?"


"아까 낮에 너 없을 때 쉬엄쉬엄 일해서 괜찮아. 스트레칭이나 시작해."


"트레이너의 몸 관리도 직무중 하나잖아요! 트레이너룸으로 돌아가죠!"


"트레이너실에 꿀 발라놨냐?! 왜 이렇게 트레이너룸에 집착하는 거야? 뭐 놓고왔냐?"


"그.. 그건... 앗! 스포츠 드링크 병을 실수로 그만! 이건 어쩔 수 없네요! 돌아가죠!!"


"안 쏟아졌잖아! 너 진짜 뭐 하자는.. 야! 밀지마!"


"저는 땅에 떨어진 걸 입에 대면 부상을 입는 징크스가 있어요! 빨리 새 걸 가져오죠!"


"얘가 진짜 왜 이래? 알았어! 내 발로 갈 테니까 밀지 마! 신발 밑창 다 나가겠다!"



이상할 정도로 수상한 디지털의 행동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트레이너룸으로 향했다.



진짜 얘 왜이래? 뭘 잘못 먹었나?



당황 반, 걱정 반. 디지털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일단 트레이너룸의 앞까지 왔다.



들어가기만 해봐라. 마땅한 이유가 없으면 잔뜩 혼내줄테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선 트레이너룸.


시간이 늦은 만큼 트레이너실은 어두웠고 나는 무의식중에 문 옆의 전등 스위치를 눌러보았지만



"어라? 왜 안켜지지?"



전등 스위치는 반응이 없었다.



설마 늦은 밤이라고 전력을 끊어버린건가? 그건 아닐텐데...


아까 코스에 나오기 전까지 불을 쓰고 있었으니까.


잠깐 사이에 전기가 끊겼을 리가 없다.


그럼 대체..?



"퓨즈가 나갔나? 아님 형광등?"


"부르봉님이 만져서 그래요."


"아하, 부르봉이? 그렇다면야 그럴 수.."



어?



"부르봉이 만졌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거야.."



디지털이 말했다.



"제가 부탁드렸으니까요."



...뭐?



"부르봉님께, 트레이너씨가 나오시는 걸 보면 전등 스위치를 망가트려 달라고 제가 부탁드렸어요."


"뭐, 왜?"



디지털의 폭탄 선언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얘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철컥.



"저도, 제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는데... 죄송해요 트레이너씨."



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과 이 방을 분리하는 소리가.



문을 잠그는 디지털의 행동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디지털은 후하후하 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곧, 무언가 준비를 마친 듯, 디지털이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쵸로인이라고 말하셔도 괜찮아요. 맞는거 같으니까요."



등을 보인 채 귀를 파닥거리면서 디지털이 말했다.



"헤타레라고 하셔도 괜찮아요. 이제껏 겁을 먹고 있었으니까요."



몸을 돌려 내게 얼굴을 보인 디지털의 양 뺨이 붉게 물든 것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멘헤라일지도 몰라요. 당신이 없으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요."



천천히 내게 다가온 디지털은 붉게 물든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다.


그렇게 잠시 그녀의 얼굴이 묻힌 가슴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아니, 사랑하는 거 같아요. 이것만큼은 확실해요."



울먹이는 목소리, 움찔거리는 팔, 고양되는 그녀의 숨소리에 나는 그저 그녀를 양팔로 안아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말을 끊지 않았다.



"당신이 나타났을 때, 저는 안도했어요. 어째서였을까요? 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말이죠."


"...그건"


"후후, 알고있어요. 제가 너무 당황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싸인을 해줬다면 금방 끝날 일이었겠죠."



분명 그랬을 것이다.


과격한 팬이라고 하더라도 팬은 팬. 한낱 인간일 뿐이다.


우마무스메인 그녀가 큰 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고 당신이 나타나서 저를 지켜주었죠. 마치 영웅처럼."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제가 위험에 빠진 순간에만 나타나서요?"


"그럴 때가 아니더라도,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헤헤... 봐요, 이렇게나 멋있으면서."



그렇게까지 멋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말이지.


내가 막 엄청 잘생기거나 멋있는 일을 한거면 또 몰라.



"좋아해요 트레이너. 그 무엇보다 진심이에요."



나지막하면서도 진심이 서린 고백.


그녀에게 있어서도, 내게 있어서도 일생일대의 고백일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무겁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거절할 생각 만반이었지만...


내게는 이런 진심어린 고백을 듣고도 거절한 재간이 없다.



...디지털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좋아한다 디지털."


"...! 히극..."



으아앙─ 하고 또 한번 눈물을 터트리는 디지털.


그럴 법도 하지.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게 눈에 선하다.


딱해서 원.. 시간이 늦어서 어디 나갈 수도 없고.



"히끅, 끅. 트레이너.. 감사해요... 저 너무 무서워서..."


"뚝, 뚝. 울지마라. 누가보면 내가 널 울린 줄 알겠다."


"흑, 죄송, 해요. 울, 면 안 되는, 데. 훌쩍."


"그래그래. 울어라 울어. 다 울면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 오늘은 이만 들어가야겠다."


"끅. 기숙사요..?"



눈물을 머금으며 디지털.



"오냐, 오늘 트레이닝 하긴 그른 것 같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자. 괜찮지?"


"트레이닝.. 할 수 있어요. 늦게까지 할 수 있는거."


"됐다 됐어. 오늘만 날이냐? 내일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일단 좀 놔주고.."



언제부터인지 나를 꽉 안은채로 울고있던 디지털.


풀어달라는 말을 듣자 나를 꼭 잡고있던 팔을 풀어..


팔을 풀어..


풀..




풀어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세게..!



"...죄송해요 트레이너님. 하지만 저.. 오늘 잔뜩 준비해 온걸요."


"준비했다니?! 뭘?!"



이건 좋지 않다.


설마 이대로..?


안돼!


이대로 범죄자가 될 수는 없다!


아직 기회는 있다. 어떻게든 디지털을 잘 설득하면..



"디지털? 아직 늦지 않았으니 풀어주지 않을래?"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타키온님이 제 책상이 이런 걸 두고 나가셨더라구요. 쪽지랑 같이요."



한 손으로 날 꽉 잡은 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디지털.



타키온! 대체 뭘 한게냐!


뭘 했기에 이리 얌전한 아이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바뀐 거냔 말이다!



그리고 디지털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하나의 병이었다.


이렇게 적혀져 있는.




「타키온 특제 자양강장제」




"부작용으로 혈관확장 성능이 있데요."


"비아그라냐?! 비아그라냐고!"


"아, 참고로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어요."



「외박 신청서 받아놨으니, 오늘은 기숙사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말게나」



"타키온 네이놈!"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네요 트레이너."


"차! 나 차있어! 내가 차라리 호텔을 잡아줄게! 나가서 자자!"


"안되요 트레이너! 야간운전은 위험하다구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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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답니다?"



우리는 다음날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야 소파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재팬 더트 더비 압승! 오늘의 주역 아그네스 디지털양을 인터뷰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듀후후훗~ 디지땅입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차이로 오늘 레이스를 재패하셨습니다! 역시 현역 최강마! 대단하십니다!"


"앗, 그렇게나 띄워주시면 조금 부담스럽달까, 하여튼 감사합니다."


"올라운더, 만능명마라는 온갖 수식어가 디지털양에게 붙어있습니다. 이게 가능한 뭔가 특별한 트레이닝 방법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엣, 트레이닝법 인가요.. 그게..."



특별한 트레이닝 방법이라는 말에 디지털이 당황했다.


당황한 채 두리번거리던 중 나와 디지털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반쯤 감은 음흉한 눈을 하고선 실실 웃기 시작하는 디지털.



뭐야, 왜 날봐.


무슨 말을 할려고!



"특별한 트레이닝법인가요.. 뭐 대단한게 아니라서 대답하기가 좀 그렇네요~"


"뭔가 있긴 한거군요!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대답해주시겠어요?"


"음... 제가 이번 더트경기 이전까지는 거의 잔디에서만 뛰다 보니 너무 한쪽에 치중된 모습을 보였거든요~"


"네네? 그래서요?"


"그래서? 오늘 경기 뛰기 전까지 매일 밤마다 더트에서 열심히 운동했죠. 앞으로도 뛰어보고, 뒤로도 뛰어보고. 그러다 한 번은 위에서 앉아도 보구요."



뭔가 내 양심을 잔뜩 찌르는 듯한 대답이 나왔다.


어째서일까.



"헤에~ 뭐랄까 정말 대단한건 없네요. 순수히 훈련에 임하셨다는 거죠?"


"순수.. 뭐 그, 그런거죠. 아하하.."



순수? 쟤가?



"아! 가장 중요한걸 빼먹었네요."


"오! 뭐죠?"


"그건~"



와락.


어느새 내 옆으로 달려온 디지털이 나를 팔을 당겨 팔짱을 꼈다.



"언제든지, 뭘 하든지. 항상 트레이너와 함께하는 거요. 에헤~"


"두분 정말 사이가 좋으신가보네요. 그럼, 오늘 인터뷰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인터뷰 자리가 정리되고, 우린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우리들만의 공간.



"사람 많은 데서 뭐 하는 거야 인마."


"헤헤~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앞으로 한 것도, 뒤로한 것도."



그런 음흉한 눈빛으로 보지마라. 변태야.



"매일 했던 것도. 그렇죠?"


"눈치라도 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문제가 되나요?"


"시니어 시즌 도중에 사고 쳐서 은퇴하는 건 골드 쉽도 안 할 거다."


"저는 골드쉽님이 아닌걸요? 그렇죠?"


"에휴, 내가 어쩌다 그날.."


"후회하시나요?"


"물론, 아니지."


"그럼 키스해주세요."


"..이 상황에서?"


"싫으신가요?"


"..아니."


"그럼 해주세요."



디지털의 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천천히 다가간다.


끈적하고도 깊은 기나긴 키스는 너무나 달콤해서.


마치 성욕 가득한 변태들이 하는 키스와 같았다.



"트레이너."


"왜."


"좋아해요."


"...나도."


"...이히."




어느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우마무스메와 사람을 넘나들며, 옆에 있는 자에게 공포를 주던 우마무스메가 있었다.


그녀의 무자비한 식성에 누군가는 슬퍼하고, 나는 절망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하나뿐인 용사였다.


그녀는 사랑스런 나만의 변태였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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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활성화를 위해 이런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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