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998 ~ 1043)
"그의 키는 3미터가 조금 안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선 언덕 꼭대기나 높은 산을 보듯이 눈을 들어야만 했다.
그의 태도는 부드럽거나 상냥하기하기보단 폭풍우를 연상시켰다. 목소리는 천둥같으며 손은 벽을 부수고 청동문을 파괴할 수 있어보였다. 그는 사자처럼 뛰어 오를 수 있었고, 찡그린 표정은 소름끼쳤다.
그의 모든 특성은 과도해보였다. 게오르기오스를 본 사람들은 그들이 미리 들었던 게오르기오스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절제된 것이라는걸 깨닫았다."
미카엘 프셀로스의 기록, 11세기 동로마의 학자, 정치가, 역사가
1. 개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11세기 활약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장군입니다.
요르요스 마니아케스, 마니아키스(Maniakis), 마니아체스(Maniaches)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선 게보르그 마니야크(Gevorg Manyak, Գևորգ Մանյակ),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조르조 마니아체(Giorgio Maniace), 바랑기인 근위대같은 스칸디나이바인들에겐 기어기르(Gyrgir)라고 불렸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사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게오르기오스는 키와 덩치가 무척 커 거인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당시 유럽에서 표준 신장이 큰 편이었던 북유럽인들이 기록한 것이니 로마인치고 왠만한 북유럽인들보다 덩치가 좋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1세기 동로마의 학자였던 미카엘 프셀로스 역시 회의에서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보곤
"그는 키가 3미터가 조금 안되었고, 그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높은 산을 볼 때처럼 고개를 들어야했다."
라는 기록까지 남겼으니 당대 기준으로 어마어마하게 크긴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의 수치기준이 지금과 다를테니 키 10피트가 현대의 3미터를 얘기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러나 묘사를 보면 거인병 환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네요.
그는 그리스인으로 보이지만 몇몇에선 게오르기오스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두각을 보인 곳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텔루크였던 점을 생각하면 사실일 수도 있고, 후술할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가 게오르기오스의 조상이 맞다면 그리스화된 아르메니아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가 게오르기오스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주장을 본 Art-A-Tsolum 이라는 아르메니아 역사 사이트에서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신뢰성이 높진 않습니다.
2. 마니아케스 가문
게오르기오스 개인의 성장과정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마니아케스 가문에 대한 정보는 남아있습니다.
마니아케스 가문 영지가 있던 아나톨리콘과 카파도키아 테마.
두 테마는 파플라고니아 테마와 함께 많은 군사귀족들을 배출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을 수호하는 군인으로, 그리고 황제 자리를 노리는 반란자로 활약했다.
마니아케스 가문은 아나톨리콘 테마(군관구)에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던 군사귀족 가문이었고, 아나톨리콘 테마에 있던 이웃 군사귀족 스클레로스 가문과 사이가 나빠 여러번 땅 문제로 다퉜습니다.
유독 11세기에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
시조로 추정되는 인물은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라는 아르메니아인입니다.
앞선 시대인 9세기에 콘스탄티노플 궁정의 고위 관리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는 아르메니아의 유서깊은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데, 9세기 중반 성상파괴주의자 황제 테오필로스의 치세(829–842) 중 830년 아르메니아 공국들의 대표단 소속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습니다.
성상파괴주의 운동은 8세기부터 100년 가까이 동로마의 심각한 내부 분쟁거리였으며 이 시기 고대 로마 시절부터 만들어진 수많은 성상과 성화들이 파괴당했다.
황제 테오필로스는 문화를 발전시키고 시민들에게 친절했으며 이슬람 제국을 상대로 열정적으로 싸워왔지만, 정치적으로 필요할 땐 기꺼이 성상파괴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인질 목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남겨졌는데, 좋은 지성과 외모를 가졌기에 곧 테오필로스 황제의 총애를 받아 동로마 궁정 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테오필로스의 어머니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는 것도 가산점이 되었을 수도?
테오필로스 제위 말기에 이르자 콘스탄티노스는 제국 상비 중앙군인 타그마 연대 중 비글라의 드룬가리오스(드룬가리오스 테스 비글라, 지휘관이라는 뜻)에 임명되기까지 했습니다.
상비군이었던 타그마(타그마타)는 여러 연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스콜라이, 엑스쿠비토이, 비글라, 히카나토이, 누메로이, 옵티마토이 등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외국 귀족 출신인 콘스탄티노스가 이 중에서 비글라 연대의 지휘관이 된 셈.
테오필로스가 죽고 여러 섭정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놀기만 하던 미카엘 3세 시대에도 콘스탄티노스는 기세 등등 했습니다. 남편 몰래 성상을 공경했던 태황후 테오도라와 오빠 바르다스, 섭정 테옥티스토스 시대가 도래하자 콘스탄티노스는 잽싸게 진영을 바꿨습니다.
그는 성상파괴주의자였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네스 7세 그라마티코스를 쫓아내는데 앞장서서 제국에서 명성높은 귀족들만이 받던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얻어내고 콘스탄티노플 정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바르다스의 음모로 테옥티스토스가 실각하고 감옥에 갇히자 콘스탄티노스는 테옥티스토스를 구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바르다스와 미카엘 3세의 협력으로 855년 테옥티스토스가 처형당하고 태황후 테오도라가 쫓겨나 바르다스가 권력을 독점하자 콘스탄티노스의 위치가 어떠하였을지는 알기 힘듭니다.
다만 콘스탄티노스는 바르다스 섭정 시대에도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진 않았고, 미카엘 3세의 전차경주 관람 놀이 상대를 해주며 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스는 바르다스와 절친하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티우스 1세의 정적이었으며, 포티우스 1세의 라이벌이었던 성직자 이그나티오스와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한 때 이그나티오스가 정쟁에 휘말려 바르다스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을 때도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모로 섭정 바르다스에 대항하는 궁정 내 야당 역할을 한 모양.
하지만 바르다스는 유능한 행정가였으며 키릴 형제로 하여금 불가르족, 슬라브족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고 이슬람 왕조와의 전쟁에서도 승승장구하여 그가 다음 황제가 되는 걸 막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때 콘스탄티노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온 한 아르메니아인을 후원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실리우스였습니다.
마케도니아 지방 농부 출신이라 무식하고 글도 못읽는데다 그리스어도 아르메니아 억양이 잔뜩 들어갔지만 힘이 세고 말을 아주 잘 다뤘으며,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총애한 미카엘 3세가 바실리우스를 궁정으로 데려오자 같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점에서 친밀함을 느낀 것인지 콘스탄티노스는 바실리우스에게 접근했고, 곧 바실리우스의 후원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카엘 3세가 바실리우스를 데려왔을 땐 860년대로 보이는데, 바실리우스는 811년생으로 이미 50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중장년이었을 콘스탄티노스와 비슷한 세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황제의 개인 경호원이자 친구, 곧 초고속 승진을 통해 시종장이 되었으며, 미카엘 3세가 시키는대로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미카엘 3세의 정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 위장 결혼을 하여 에우도키아가 황궁으로 들어와 마음껏 미카엘 3세와 불륜을 저지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하면서 신뢰를 얻었습니다.
바실리우스를 신뢰한 미카엘 3세는 자기 누이 테클라를 수녀원에서 꺼내와 바실리우스의 불륜 상대로 만들어주었는데, 바실리우스가 이런 걸 좋아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수단을 가리지않고 권력자로 성장한 바실리우스는 크레타 섬 원정 중 함대 안에서 바르다스를 암살하고 공동황제에 올라 제국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이 와중 콘스탄티노스는 미카엘 3세 근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내 미카엘 3세가 바실리우스에게도 질려하고 내치려는 낌새를 보이자 선수를 친 바실리우스가 침실에서 미카엘 3세를 죽이고 단독황제 바실리우스 1세에 올랐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전성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작이었습니다.
867년, 농부 출신에 글도 읽지 못하던 56세의 바실리우스가 동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는 미카엘 3세가 죽기 직전이던 866년 혹은 바실리우스가 권좌에 오른 867년 동로마에서 가장 권세가 높던 외무장관(로고테테스 투 드로무)에 올랐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사실상 제국의 1인자가 된 바실리우스의 인선이 있었으리라 추정됩니다.
농부출신이었던 바실리우스와 십수년을 궁정에서 버티고 있던 콘스탄티노스. 두 아르메니아인이 콘스탄티노플 궁정을 장악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이미 35년 이상 활동하던 노회한 인물이었고, 콘스탄티노스 마니아케스도 866년 전차경주 이후로 기록이 끊겼습니다.
노회한 정치인이었던 그가 무능한 술주정뱅이 황제 미카엘 3세를 위해 죽었을 가능성은 낮으니 그냥 늙어죽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이후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고 로고테테스(장관)를 역임한 토마스 마니아케스, 역사학자였던 요셉 게네시우스가 그의 후손들로 추정되지만 이 가설을 부정하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습니다.
비잔티움 역사상 마니아케스라는 성을 쓴 사람은 드문 편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인척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025년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을 때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의 그 어떤 국가보다 조직화되어있고, 강력했다.
3. 게오르기오스의 등장, 동방전선에서의 활약
마케도니아 왕조는 제위 내에서도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경쟁 국가들이 모두 몰락하는 가운데 바실리우스 2세의 강철같은 의지와 군략으로 살아남아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1025년 바실리우스 2세가 시칠리아 원정을 준비하다 죽고 3년 뒤 동생 콘스탄티누스 8세가 죽으면서 마케도니아 왕조는 끊어졌습니다.
딸들만 있던 콘스탄티누스 8세는 죽음이 다가오자 오랫동안 수도 관료로 일해왔던 중앙 귀족 로마노스 아르기로스를 소환했습니다. 로마노스가 궁정으로 들어오자 콘스탄티누스 8세는 로마노스가 현 아내와 이혼하고 자기 딸 조이와 결혼하여 황제가 될지, 아님 눈알이 뽑힐지 선택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콘스 8세 : 저 뒤에 있는 반역자 놈처럼 눈알 뽑힐래? 아님 황제할래?
니케포로스 콤네노스(반역모의자) : 이런 학대는 그만두는데스 바실레우스상 살려달란데샤아앗!!!
로마노스 아르기로스 : ...뎃?
그리하여 강제 이혼당한 로마노스가 조이와 결혼하여 로마누스 3세로 즉위하였습니다.
로마누스 3세를 선택한 건 나쁘지 않아보였는데, 로마누스 3세는 원로원 의원이자 최고 고등판사, 수도행정장관, 하기아 소피아 관리자를 역임하는 등 오랜 관료 생활로 입증되었고, 정계에서 교양과 기품을 갖췄다고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누스 3세는 자기 분야가 아닌데선 허접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였고, 지도자로서의 압박감과 훌륭한 황제가 되겠다는 지나친 고집 때문에 연속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협박 때문이라지만 기왕 황제가 된 거 고대 로마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같은 황제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졌는데, 자신만의 왕조를 세우겠다고 온갖 미신과 최음제를 사용하여 조이와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즉위 당시 로마누스 3세 나이가 60, 조이 나이가 50이었으니 아이를 낳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겠지만요.
그는 귀족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해서 건축 사업과 수도원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마케도니아 황제들이 유지하던 귀족에 대한 세금 압박, 자영농 보호 정책들을 차례로 폐기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영농들의 몰락으로 세수가 하락하고 동로마 군대의 모집 기반이 약화되었습니다.
미르다스 토후국(알레포 토후국 1024 ~ 1062)
미르다스 토후국은 시리아 북부 내륙지대를 점령하고 알레포를 수도로 삼았던 에미르국입니다.
바실리우스 2세 시대에 동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이 되었지만 이집트에 시아파 파타마 왕조가 들어서고 시리아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요새를 새로 건설하고 동로마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안티오키아 카테판(대도독?) 미카엘 스폰딜레스가 미르다스 왕조 합병을 노리고 알레포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하자, 로마누스 3세는 갑자기 친정에 나서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황제는 군사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에 주변의 관료들과 무관들이 말렸음에도 기어코 로마누스 3세는 출정했는데, 그는 이전 마케도니아 왕조 황제들처럼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명예욕과 알레포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에 마음을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20000명에 달하는 제국군이 다가오자 기겁한 알레포의 에미르는 다시 봉신이 되겠으며 조공 지불을 재개하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동로마 장군들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했지만 로마누스 3세는 콧방귀도 안뀌고 진군을 계속했습니다.
로마누스 3세 : 이교도쉑 넌 이제 X됐어.
1030년 8월 8일, 아자즈 전투(아자지온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참호를 파고 요새를 만들었지만 2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미르다스 군대는 동로마군을 따라다니던 상인들을 습격해 멀리 쫓아내고, 요새를 포위하여 동로마군을 굶주림과 목마름, 이질에 시달리게 만들었습니다.
로마누스3세 : 뭐지 어택땅만 찍으면 이기는 거 아니었나?
동로마군이 포위를 뚫으려다가 오히려 타그마 연대장이 사로잡히고 두 차례 패퇴당하자 시무룩해진 로마누스 3세는 그 다음날 후퇴를 결정했습니다.
1030년 8월 9일, 후퇴 중 동로마 소속 아르메니아 용병들이 주변 상인들을 약탈하면서 규율이 무너지자 그 틈을 노린 미르다스군이 동로마군을 습격했습니다.
동로마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로마누스 3세도 사로잡힐뻔 하다가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미드라스군은 70마리 낙타에 실려있는 보물, 황제의 호화스런 천막, 300마리 노새가 운송하는 금화, 성모 마리아 이콘 등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미르다스군이 전리품 노획에 집중한 덕에 동로마군의 사상자 수는 그렇게 많진 않았으나 개망신을 당했고, 10배나 수가 많았음에도 크게 패한 로마누스 3세와 동로마군은 국내외로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미르다스군한테 참패하고 도망치는 동로마군
미르다스 : X되는 건 황제폐하셨구요~
텔루크의 위치
한편 안티오키아 북쪽, 텔루크 군관구의 텔루크 요새에는 군관구 도독(테마 둑스)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있었습니다.
1030년 당시 게오르기오스는 32살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은 구델리오스(Goudelios)라는 슬라브계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자즈 전투에서 승리한 미르다스군 중 800명의 기병대는 텔루크 요새를 포위한 채 노획물을 자랑하고 로마누스 3세 황제가 전사했다고 선포하며 항복을 요구했는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겁에 질린 척하며 그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쳤습니다.
미르다스군이 긴장을 풀자 게오르기우스는 야밤에 습격해 미르다스군을 도륙했고, 그들의 코와 귀를 잘라내 황제를 뵈러 갔습니다.
거기다 아자즈 전투에서 빼았겼던 노략물의 상당수를 회수하였는데, 낙타 280대에 나눠싣던 양이었습니다.
사라센을 기습해 도륙하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카파도키아에 있던 황제를 찾아가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게오르기오스 : 황제 폐하 오겡끼데스까~
카파도키아까지 도망쳤던 로마누스 3세에게 군관구 도독이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침울해있던 로마누스 3세는 게오르기오스의 선물에 기뻐하며 대도시 사모사타를 포함하여 상류 유프라테스(하 메디아)의 카테판에 임명했고, 안티오키아엔 니케타스와 시메온이라는 장군들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카테판 혹은 카테파노는 두개 이상의 군관구를 책임지는 사령관을 뜻하는데, 일개 군관구를 담당하는 둑스(도독)보단 상위지만 이탈리아, 카르타고 등 한 지방을 책임지던 엑사르크(총독)보단 낮아 보입니다.
영어 단어 캡틴(Captain)의 원형이 되는 단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대도독, 통제사 정도가 되겠지만 일단은 카테판으로 부르겠습니다.
마니아케스의 관할지(추정)
상류 유프라테스의 사령관이 된 32살의 게오르기오스는 안티오키아의 장군들과 협력하여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안티오키아 도독으로 임명된 환관 장군 니케타스는 마라클레아에서 아랍 연합군을 격퇴하고 미르다스조의 영토인 이르카와 쿠린을 약탈, 파괴했으며 12월엔 동로마에게 굴욕을 줬던 아자즈 도시를 함락하여 불태웠습니다.
환관 장군 니케타스 : 어딜 도망치냐 이교도새기덜
비잔티움 장군들의 반격
니케타스는 아자즈를, 게오르기오스는 에데사를 공략했다.
1031년에도 니케타스와 시메온은 미르다스 왕조에게 사정없는 공격을 이어나갔고, 같은 해 게오르기오스는 638년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당한 뒤 4세기 동안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있던 에데사를 재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에데사는 소수의 지배층, 군인계층 이슬람교도와 대다수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시민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첫 쿠르드족 국가였던 마르완 토후국(990 ~ 1085)
아미드(디야르바키르)와 마야파르킨(마르티로폴리스)가 수도였다.
미르다스 왕조, 우콰이르 왕조와 같이 동로마 제국의 동방국경에 위치하던 마르완 토후국은 중세 최초의 쿠르드계 왕조였습니다.
아르메니아 서남부를 근거지로 삼아 1026년 우콰이르 왕조의 아랍인들로부터 에데사의 지배권을 빼앗았고, 술레이만 이븐 알 쿠르기라는 투르크인 성주를 임명한 상태였습니다.
1031년 게오르기오스는 로마누스 3세의 지원으로 술레이만 성주를 매수했습니다. 술레이만 부부는 두둑한 연금과 영지, 비잔티움 귀족 작위를 받는 대가로 동로마군 진입을 눈감았고, 게오르기오스와 동로마군은 한밤중 에데사의 중무장된 방어탑들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3개의 방어탑을 점령했을 때, 에데사의 이슬람교도 주민들은 로마군이 들어와있음을 깨닫고 로마군이 있던 방어탑들을 포위했습니다. 급보를 받은 마르완 왕조의 수도 미아르페킨(마야파르킨, 마르티로폴리스)에서 에미르 나스르(=아포메르만)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성밖에선 마르완 군대가, 성안에선 무슬림 시민군한테 포위당한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에데사 공성전
하지만 동로마군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냈고, 좌절한 나스르는 거대한 에데사 교회를 파괴, 도시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학살한 뒤 시내에 불을 지른 후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많은 아르메니아 시민들이 살해당했고, 이 과정에서 에데사의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한 아르메니아인들도 죽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에데사를 점령했고, 도시 한가운데 바위 꼭대기에 위치한 성채에 입성하였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에데사의 통치를 동맹 아랍 부족장에게 넘겨줬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부를 점령하여 마르완 왕조를 압박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에데사 지방 정복
게오르기오스는 귀중한 기독교 유물을 에데사에서 발견했는데, 고대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5세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고받은, 예수의 서명이 들어있는 서신들이었습니다.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르메니아계 국가 오스로에네 왕국의 국왕 아브가르 5세는 큰 병을 앎게되었는데,치료가 불가능하자 갈릴리 지방의 예언가 예수가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을 선지자로 믿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박해하는 것을 막아줄테니 부디 에데사로 와서 자신을 치료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를 거절했으나 "나를 보지않고 나를 믿은 그대는 복된 자입니다."라는 서신과 함께 자신의 제자인 사도 중 1명을, 혹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아마포 성화를 보냈습니다.
아브가르 왕은 예수의 성화를 보자마자 병이 나았고, 이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오스로에네 왕국은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이런 귀중하고 상징적인 유물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자 동로마인들은 이 유물에 크게 감동하여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에데사의 부유함 덕분에 게오르기오스는 연간 50파운드의 황금을 3년 연속으로 중앙정부 세금으로 상납할 수 있었고, 로마누스 3세를 기리고자 에데사 근방에 황제의 이름을 딴 로마노폴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로마누스 3세에게 예수의 서신을 보내다.
로마누스 3세 : 5성유물 겟또다제
1031년 4월 아자즈 전투에서 이겼지만 그 뒤 동로마군의 반격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고, 형제간 내전에 휩싸인데다 파티마 왕조의 압박을 받던 미르다스 토후국은 다시 동로마의 봉신국이 되기로 하였고, 매해 50만 디르함(은화)의 조공을 바치는 대신 동로마의 보호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마르완 왕조의 장군 발(bal)은 5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에데사를 함락시킨 뒤 아랍 부족장을 죽였지만, 바로 다음해 1032년 동로마군이 에데사를 다시 점령했습니다.
향후 50년간 에데사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주민들도 대다수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도들로 채워졌습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때 다시 이슬람측으로 넘어가버리지만 이후 1차 십자군 당시 에데사 주민들이 십자군 전사 보두앵에게 도시의 지배권을 넘겨 에데사 백국이 세워지게 됩니다.
1032년 10월 파티마 왕조의 시리아 총독이었던 아누쉬타킨은 주변 이슬람 토호국들과 연합하여 동로마를 공격했다가 보스라에서 안티오키아 도독 니케타스에게 패퇴당했습니다.
1030년 동로마군이 아자즈에서 망신당했지만 그 뒤 수년동안 동방전선의 동로마 사령관들이 노력하여 다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제국의 우위를 확인하였습니다.
한편 1034년 로마누스 3세는 계속된 정책 실패와 여론 악화, 황후 조이와도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틈에 목욕탕에서 의문사했습니다. 암살의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로마누스 3세가 목욕탕에서 죽었고, 프셀로스를 비롯하여 사람들은 암살을 의심했다.
새로운 황제는 조이의 애인이었던 미남 미카엘 4세였습니다.
미카엘 4세는 파플라고니아 지방 농부의 자식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같이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한 뒤 환전상으로 일했습니다. 이당시 동전 위조범이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큰형 요안니스가 콘스탄티노플 궁정에서 환관으로 성공하자 형 요안니스에 의해 황제부부에게 소개됬고, 황후 조이에게 접근하여 불륜 관계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미카엘 4세는 로마누스 3세의 개인시종이기도 하였기에 암살 의혹에 연루되었지만 별다른 증거는 없었고, 시민들도 로마누스 3세의 통치에 신물내고 있었기에 이 24살짜리 젊은이가 조이와 결혼하여 공동황제가 되는 것에 별 반발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24살 청년 미카엘 4세와 56세 조이의 결혼
미카엘 4세는 잘생기고 활력넘쳤지만 뇌전증을 앎았고, 교육받지 못했던지라 형 요안니스와 형제들에게 국정의 상당부분을 맡겨야 했습니다. 귀족들은 병든 황제를 못미더워했지만 로마누스 3세 시절 악화되던 재정문제가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환관 요안니스의 직책은 고아원장(오르파노트로포스)이었지만 그 직함은 이름만 그렇지 사실 복지부 장관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고아원장 요안니스가 재정에 손을 대자 세금 인상으로 귀족과 평민들이 불만을 가졌지만 개혁의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황후를 사고뭉치라고 판단한 파플라고니아 형제들은 조이는 정치에 손대지 못하게 유폐하였고 미카엘 4세와 형제 요안니스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잘 알고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지지를 받아내 정권의 명분성을 취득습니다.
그리곤 조이를 유혹할 수 있을만한 미남 귀족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를 9년이나 유배하는 등 유력 정치인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황위를 노리던 유력 군사귀족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를 추방하여 군인황제의 출현을 경계하던 관료귀족들을 포섭했습니다.
'파플라고니아인' 미카엘 4세
형의 도움을 받긴했지만 비천한 출신에 음모를 꾸며 제위를 차지했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비잔티움 정계와 대중정치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했다.
국내외로 자연재해와 귀족들의 반란, 페체네그족의 침략이 벌어졌지만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미카엘 4세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임지를 변경했습니다.
1034년 게오르기오스는 유프라테스를 떠나 제국의 최동단, 아르메니아 깊숙히있는 바스푸라칸 군관구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이곳들은 바그라티오니 가문 출신 영주들의 아르메니아 공국이 있던 곳이지만 주변 이슬람 토후국들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비잔티움 제국에게 공국들을 통째로 넘기는 대신 영주들 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나톨리아 내륙 혹은 킬리키아(아나톨리아 동남부)에 영지를 받아 이주해버렸습니다.
이 때 미카엘 4세는 게오르기오스의 칭호를 원로원 입회 자격이 주어지는 최하급 칭호 프로토스파타리오스에서 제국의 고위 귀족들에게 하사하는 파트리키오스로 상승시켜주었습니다.
안그래도 인기가 높은 게오르기오스가 시리아에서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되 칭호를 올려주는 당근을 동시에 준 셈이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전 황제 로마누스 3세에게 중용된 인물이기에 황제가 그를 탐구하고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떠난 뒤 에데사는 또 다시 아랍군대에 포위되지만, 긴 대치 상태 끝에 1037년 동로마의 영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마르완 왕조와 동로마의 대치 변화 gif
에데사는 에데사 테마가 새로 생겼다가 이후 멜리테네 테마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게오르기오스가 새로 배치된 바스푸라칸 테마(군관구)
1034년부터 1038년까지, 게오르기오스가 바스푸라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전임자가 점령한 베르크리를 일시적으로 상실했다가 중앙군의 지원으로 탈환했다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다만 이후 미카엘 4세가 그에게 중대한 일을 맡긴 것을 보면 충성심있게, 무난하게 일했으리라 추정해보겠습니다.
그러나 1037년 혹은 1038년 복무를 마치고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게오르기오스는 바랑기아 근위대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높아진 명성 혹은 로마누스 3세에게 중용되었다는 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게오르기오스가 범죄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그를 재판에 넘겼지만 원로원은 마니아케스 장군에게 무죄를 선포했습니다. 그럼에도 게오르기오스는 수도에서 쫓겨났고, 별 수 없이 고향 아나톨리콘으로 돌아가 몇 달 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임지 이동
텔루크 군관구 사령관 (~1030)
상류 유프라테스, 하 메디아의 카테판(1030~1034)
바스푸라칸 군관구 사령관 (1034~1037? 1038?)
1037년 마르완 왕조와 누마이르 왕조(에데사 동남쪽 하란의 소규모 아랍인 왕조)가 연합하여 에데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여전히 동로마가 강건함을 느낀 파티마 왕조는 동로마와 10년간 휴전 조약을 맺었고 미르다스 왕조는 다시 동로마의 피보호국으로 들어갔으며 누마이르 왕조는 동로마의 에데사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동방국경이 안정화되자 1038년 미카엘 4세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중앙으로 소환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깁니다.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 이슬람의 손에서 시칠리아를 재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에는 이후 유명해질 인물들이 참가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오트빌 가문의 창건자이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큰 형, 노르만 기사 강철팔 기욤 드 오트빌
훗날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잉글랜드 왕좌를 노려 정복자 윌리엄과 싸운, 바랑기아 근위대 하랄드 하르드라다
아나톨리아 군사귀족의 핵심인물로 콤네노스 왕조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등이 그러했습니다.
3. 동로마의 이탈리아 관리
반달 왕국을 정복해 아프리카를 회복하고,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한 명장 벨리사리우스
동고트인, 프랑크인, 알레만니족을 박살내고 이탈리아 원정을 끝낸 또다른 명장, 환관 나르세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손에서 벗어나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정복 사업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노력으로 이탈리아는 동로마의 땅이 되었습니다.
나르세스가 프랑크-알레만니 연합군을 카실리눔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562년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지만 나르세스가 죽고 10년도 되지않아 또다른 이민족인 랑고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해왔습니다.
이랬던 동고트 왕국을
동로마 제국이 힘들게 멸망시켰지만
짠!
영어론 롬바르드, 이탈리아어론 롱고바르드라고 불린 그들은 동로마가 동방전선에 정신이 팔리고, 나르세스같은 유능한 관리자도 없는 틈을 노려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였습니다.
572년 북이탈리아 파비아를 수도로 하여 정착한 랑고바르드족은 동로마 제국이 정치적 혼란, 이슬람 제국의 발흥, 성상파괴주의 논란으로 끊임없이 진통을 겪느라 이탈리아에 신경을 못쓰는 사이 세력 확장에 성공하였습니다.
8세기가 되자 사르데냐, 시칠리아,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까지 노리자 놀란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샤를마뉴는 파비아를 함락시키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켜 통째로 흡수해버렸습니다.
샤를마뉴 : 씨바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셈ㅋㅋㅋ
거기다 9세기부터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시켈리아 테마)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질병에 시달려서 여러번 후퇴함에도 꾿꾿이 재공격하여, 4차례 끝에 831년 시칠리아가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가 시칠리아 토후국이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남이탈리아에도 이슬람군이 상륙하여 바리 토후국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이탈리아까지 이슬람이 손을 뻗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교황, 이탈리아 왕국(프랑크 제국의 후계국), 동로마의 합공으로 24년만에 멸망했습니다.
871년 바리 토후국을 멸망시켰을 때 동로마에선 마케도니아 왕조를 세운 바실리우스 1세의 시대였는데, 바실리우스 1세는 그동안 방치하던 이탈리아에 관심을 가져 해군을 양성했고, 남이탈리아의 요충지들을 회복하였습니다.
해안지역인 바리, 베네벤토, 오트란토를 손에 넣었고 아말피 공화국과 나폴리도 동로마에게 신종했습니다.
프랑크의 반속국 신세였던 내륙 롬바르드 공국들도 동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사실상 남이탈리아가 다시 동로마의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이후 북이탈리아는 프랑크-이탈리아 왕국령이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중이탈리아는 교황령, 남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 양쪽에게 영향을 받는 랑고바르드 공국들과 동로마 영토가 있었고 바다 건너 시칠리아는 이슬람 토후국이 자리잡는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들의 불편한 공존은 수백년간 지속되었다.
후국 = 대공국
남이탈리아의 3개 군관구 롱고바르디아, 루카니아, 칼라브리아
이후 남이탈리아에 롱고바르디아 테마가 설치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흘러 동로마인들은 이들을 이탈리아식인 롱고바르드인으로 불렀으리라 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간단하게 롬바르드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9세기 '해당지역의 책임자'라는 두루뭉술한 뜻으로 시작된 카테판 관직은 960년즈음 군관구 제도가 개혁되자 '2개 이상의 군관구를 책임지는 사령관'이라는 명확한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리를 치소로 삼아 서방의 남은 이탈리아 영토를 관리하는 이탈리아 카테판령(카테파티콘 이탈리아스)이 만들어졌는데, 카테판들은 롬바르드인들을 관리하는데 힘들어했습니다.
처음엔 남이탈리아를 평정하고 곳곳에 요새를 세웠지만 동로마 정부의 관심이 줄어들자 롬바르드인들은 다시 독립을 꿈꿨습니다.
남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여러 민족이 부대끼며 살면서 동화가 이뤄져 남이탈리아인들은 자신을 롬바르드인 아님 그리스인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 롬바르드인 역시 남이탈리아인들과 동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급속하게 라틴화되었고, 자기들의 언어인 롬바르드어를 버리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과정에 있던 남이탈리아어를 사용했습니다.
내륙 지대는 대개 롬바르드인으로 인식되었고, 가에타, 아말피같은 해안 지역과 동로마가 갖고있던 도시들은 그리스인 혹은 라틴인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3개 군관구 중 칼라브리아, 루카니아에선 인구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롱고바르디아(아풀리아)에선 바리를 비롯한 동부는 그리스인, 서부는 롬바르드인이 주로 거주했습니다.
멜루스 : 폭군 침략자 로마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1009년 롬바르드인 바리의 멜루스와 처남 다투스는 비잔티움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고, 카테판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를 전사시켰습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바리를 점령했지만 다음해 1010년 새 카테판 바실레이오스 메사르도니테스와 케팔로니아 절도사(스트라테고스) 콘톨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진압군을 이끌고 바리를 포위하자 도시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진압군과 협상하여 멜루스와 다투스에게 도시를 떠나라 강요했고, 멜루스와 다투스가 가족도 못챙기고 도망치자 진압군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메사르도니테스 : 이탈리아는 원래부터 로마땅이란다.
1011년 6월 11일 바실레이오스 메사르도니테스는 항복한 도시나 멜루스의 가족들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고, 그저 멜루스의 가족들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했습니다. 그중엔 멜루스의 아들인 아르기루스도 있었습니다.
멜루스는 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롬바르드 국가인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3세에게 의탁했고, 다투스는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들어가 라틴 성직자들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둘 다 반 비잔티움 세력이었습니다.
메사르도니테스는 여기서 군사행동을 벌이는 대신 최대한 많은 이들을 동로마의 동맹으로 끌어드리는 외교책을 사용했습니다. 먼저 살레르노 공국을 방문해 과이마르 3세가 명목상 동로마 황제의 신하라는 점을 밝히며 설득했고 그 다음엔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들러 동로마 영토 내에서 수도원의 특권은 언제나 유지된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메사르도니테스와 얘기가 끝난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은 다투스를 추방했고, 다투스는 교황 베네딕토 8세에게 망명하여 가리글리아노 강변 요새탑에 머물렀습니다.
1016년 유능한 메사르도니테스가 죽고 1017년 케팔로니아 절도사 콘톨레온이 새 카테판이 되자 멜루스와 다투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용맹함과 뛰어난 무공으로 명성높던 노르만 기사들
그들의 조상 바이킹처럼 명예와 재물, 땅을 찾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1016년 반란 직전 멜루스는 몬테 가르가노의 성 미카엘 성당에 성지순례 차 와있던 노르만인들을 찾았습니다.
그곳엔 드렝고 가문(Drengot)의 노르만인 5형제 질베르, 오스몬드, 랄프, 라이눌프, 아스클레틴이 있었습니다.
원래 오스몬드는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공작령 루앙 근교의, 작지만 부유한 카로우(Carreaux) 지방 영주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몬드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리처드 2세. 정복자 윌리엄의 할아버지)의 친척을 죽인 죄로 노르망디에서 추방당한 김에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를 떠나기 전 모험가, 무법자, 계승 순위가 낮았던 귀족 자제들을 모아 250명의 노르만 기사대를 모집했고, 성지순례 겸 새로운 영지를 찾아 이탈리아로 들어와 노르만인들이 존경하던 교황 베네딕토 8세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수십년 전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3세가 노르만인들의 도움을 받아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면서 노르만인들은 이곳에서 용병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고, 노르만 5형제도 이렇게 용병 일을 하려고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이탈리아의 지방들(현대 기준)
크게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로 나뉘고 루카니아(바실리카타)는 중간에 애매하게 껴있다.
몬테 가르가노의 위치
드렝고 5형제는 이탈리아 동해안, 아풀리아 지방의 몬테 가르가노의 성 미카엘 수도원 근처에 요새를 세웠습니다.
이들의 군사력을 원한 멜루스는 그들을 방문해 반란에 동참해달라고 설득하면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과 풍부한 전리품을 얘기하였습니다. 멜루스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함으로서 남이탈리아에 노르만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1017년 드렝고 5형제의 맏형 질베르가 이끄는 노르만 용병대가 카푸아로 이동해 멜루스의 롬바르드 군대에 합류하자 콘톨레온은 반란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1차전에서 멜루스는 카테판 콘톨레온이 보낸 레오 파시아노스 장군을 격퇴했습니다.
반란이 심상치않음을 느낀 콘톨레온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2차전을 벌였으나 레오 파시아노스가 전사했고 전투는 패배했습니다.
3차전에서 멜루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었고 2연승을 더 해 포르토레와 트라니를 포함한 아풀리아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1017년 9월 콘톨레온을 해임하고 새 카테판 바실레이오스 보이오안니스를 파견했습니다.
바실레이오스 보이오안니스 : 어디서부터 손대야하나...
바실레이오스 보이오안니스는 경험많고 유능한 장군이었고 1017년부터 1027년까지, 약 10년 동안 이탈리아 카테파티콘을 맡게 되었습니다.
보이오안니스는 황제에게 노르만인들을 상대하기 위한 바랑기아 근위대(바랑기안 가드)를 요청했고, 1017년 12월 상당한 숫자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1018년 새해가 들어서자 보이오안니스와 롬바르드-노르만 연합군은 이탈리아 칸나이에서 한판 붙었습니다.
칸나이의 위치
바랑기아 근위대1 : 야 오늘도 많이 죽였다.(뿌듯)
근위대 2 : ㅇㄱㄹㅇㅋㅋ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웠던 그곳에서, 제2차 칸나이 전투는 로마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바랑기아 근위대는 노르만 기사대를 학살했고, 250명의 노르만 기사들 중 10명만이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노르만 지휘관인 질베르와 오스몬드가 전사했습니다.
5연승을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롬바르드 세력은 산산조각났고 노르만 기사대는 거의 전멸, 다투스는 다시 가리글리아노 요새탑으로 숨었으며 멜루스는 아예 이탈리아 밖으로 도망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있던 독일 밤베르크까지 달려갔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2세는 그에게 이름뿐인 작위지만 아풀리아 공작위를 하사하고 일단 가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멜루스를 지원하던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3세는 분위기가 역전되자 은밀히 사신을 보내 자신은 동로마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달했습니다.
과이마르뿐만 아니라 남이탈리아의 롬바르드 공국들 역시 2차 칸나이 전투 소식을 듣자마자 신성 로마 제국 대신 동로마 제국을 모시겠다고 일제히 편을 바꿨습니다. 특히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는 적극적으로 동로마에 협력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분쟁의 조짐이 이어지자 더 많은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로 유입되었습니다. 드렝고 5형제 중 둘이 죽자 랄프는 프랑스로 돌아가버렸고, 라이눌프 드렝고가 노르만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남이탈리아로 유입되는 노르만인들을 흡수하여 다시 서서히 세력을 키웠습니다.
보이오안니스는 아풀리아 지방으로 들어오는 아펜니노 산맥 통로에 요새 도시 트로이아를 건설했고, 노르만 용병대를 배치했습니다.
이런 남이탈리아의 정치적 지각 변동에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20년 독일 밤베르크의 황제를 찾아가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있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멜루스가 얼마 안가 죽어버렸고, 하인리히 2세는 멜루스에게 호화스런 장례를 치뤄지고 밤베르크 성당에 묻어줬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일어난 사건으로 남이탈리아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보이오안니스 : 싸게싸게 입수합시다 다투스 형씨.
1020년 황제와 교황이 의논하는 사이 보이오안니스와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는 가리글리아노 요새탑을 함락하여 다투스를 생포했고, 1021년 6월 15일 바리에서 다투스는 원숭이, 수탉, 뱀과 함께 자루에 묶여 바다로 던져지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던 것입니다.
1021년 보이오안니스가 본보기삼아 이런 만행을 선보이자 하인리히 2세는 대군을 이끌고 남이탈리아로 진군했습니다.
카푸아 대공국은 이내 함락당해 판둘프 4세가 사로잡혔지만 독일군이 남이탈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길목인 트로이아와 노르만 용병대는 포위를 버텨냈고, 독일군 내에서 질병이 퍼지자 결국 하인리히 2세는 후퇴를 결정했습니다.
하인리히 2세는 티아노 백작 판둘프 5세에게 카푸아를 넘겨줬고 판둘프 4세는 독일로 끌고갔습니다.
하인리히 2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했다.
보이오안니스는 신성 로마 제국군을 잘 막아낸 트로이아 도시에 특권을 하사했고,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죽고 잘리어 왕조를 창건한 콘라트 2세가 제위에 오르자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3세는 자기 처남 판둘프 4세를 풀어달라 간청했습니다.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의 신하에게 은혜를 베풀어 풀어주자마자, 판둘프 4세는 카푸아 대공국을 되찾기 위해 라이눌프 드렝고를 포함한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하여 카푸아를 포위해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한편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파티마 왕조와의 휴전조약을 맺어 발칸과 시리아를 안정화시켰습니다.
바실리우스 2세는 남이탈리아의 혼란과 시칠리아 토후국 상황을 보고받고 이번엔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원정을 준비했으나 원정 시작 전 죽어버렸고, 원정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원정 준비를 돕기위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있던 보이오안니스는 새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가 원정을 취소하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카테판 혼자서 남이탈리아를 안정시켜야 했습니다.
보이오안니스는 일단 판둘프 4세를 도와 18개월 동안 이어진 카푸아 공성전을 끝냈습니다. 판둘프 5세는 나폴리 망명을 허가받는 대가로 카푸아를 넘겼고 판둘프 4세는 다시 카푸아 대공국을 차지했습니다.
칸나이에서의 재앙 뒤로 라이눌프는 형제 둘과 노르만 기사들을 잃었지만 유입되는 노르만 전사들을 흡수하였고, 주변의, 전쟁에 미숙한 롬바르드 군주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그리고 가장 돈을 많이 주는 이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아남았습니다.
1027년 보이오안니스는 10년간의 이탈리아 근무를 마치고 소환되었으나 그가 돌아가자마자 시칠리아 토후국의 남이탈리아 침공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또한 나폴리 대공국은 카푸아, 살레르노처럼 동로마의 동맹국이었지만 판둘프 5세의 망명을 받아준 것에 불만을 가진 판둘프 4세는 보이오안니스가 동로마로 돌아간 틈을 노려 나폴리 대공국까지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판둘프 5세는 로마로 피신해 거기서 죽었고, 나폴리 대공 세르기우스는 가에타 대공에게 도망쳤습니다. 판둘프 4세의 야망을 막기위해 나폴리 대공과 가에타 대공은 라이눌프 드렝고의 노르만 기사들을 고용했고, 판둘프 4세를 공격해 나폴리를 되찾았습니다.
라이눌프는 이 공으로 아베르사 백작령을 차지했고, 남이탈리아의 첫번째 노르만인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남이탈리아 롬바르드인들은 서로 싸우고 그 사이에서 노르만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데, 1027년부터 이탈리아 카테판을 맡은 크리스토포로스, 포토스, 미카엘, 콘스탄티노스 오포스 등은 10년 동안 시칠리아 토후국의 침략을 근근히 막아내는데 바빠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1032년 아랍 해적들의 칼라브리아 침략이 특히 심했는데, 카테판 포토스 아르기로스가 전사하고 카사노를 점령, 아예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의 케르키라 섬까지 공격했습니다.
결국 니코폴리스 군관구의 반격으로 후퇴했지만 케르키라 섬을 불태우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시칠리아 토후국도 사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조들은 태생부터 아랍인이 베르베르인(아마지그인)을 지배하는 형태였고, 이 때문에 베르베르인들은 지배층 아랍인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시칠리아 토후국을 지배하던 칼비 왕조 역시 아랍-베르베르 분쟁을 겪고 있었고, 여기다 지배층들 사이에서도 내전이 발생하여 혼란스러웠습니다.
원래 시칠리아 토후국은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아글라브 왕조가 정복했고, 그 뒤를 이은 파티마 왕조가 유지했습니다.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근거지를 옮기면서 봉신인 베르베르계 지리 왕조에게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맡겼는데, 972년 파티마 함대가 이집트로 이동하면서 시칠리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해군력이 약해지자 시칠리아 총독이었던 칼비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시칠리아 토후국을 차지했습니다.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지리 왕조와 동로마가 신경을 썼고, 칼비 왕조 내 파벌들은 상황에 따라 각각 양쪽과 손을 잡았습니다. 시칠리아 에미르이자 칼비 왕조의 군주 알 아칼은 파티마, 지리조의 지원으로 1026년, 1031년 있었던 동로마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1032년 칼라브리아 침략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격으로 동로마 해군이 1033년부터 대대적인 작전을 개시해 지중해 아랍해적들을 궤멸시켜버려 수십년간 이슬람 해군들이 약화되었습니다.
거기다 알 아칼은 수단인, 슬라브인으로 구성된 용병대를 유지하기 위해 과세하려다 반란을 맞이했습니다.
아랍인들의 지지를 받는 에미르 알 아칼과 베르베르인들을 대표하는 형제 아부 하프스 간 내전에 시달렸고, 동생을 제압하지 못한 에미르 알 아칼은 동로마의 압바이라도 막고자 1035년 동로마 제국의 우위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휴전을 맺자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1036년 동생 아부 하프스가 북아프리카 튀니지 지리 왕조의 군주 알 무이즈와 동맹을 맺고 본격적으로 내전을 알 무이즈의 아들인 지리 왕자 압달라가 6000명의 병력으로 시칠리아를 침공했고, 발람(팔레르모)을 함락한 뒤 시칠리아 에미르 알 아칼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젊은 압달라는 아부 하프스도 금방 제거했다가 찬탈자로 몰려 시칠리아 전역에서 반란과 반발이 빗발쳤습니다.
미카엘 4세 : sicily에서 좋은 명분 얻다. 유료의 Roman expedition 증정.
비록 알 아칼이 죽었다지만 시칠리아가 혼란에 빠지고, 좋은 명분도 얻은 미카엘 4세는 미카엘 스폰딜레스(알레포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그 장군)과 니케포로스 도케이아노스를 이탈리아 카테판으로 임명한 뒤 바스푸라칸 사령관으로 지내고있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전격 소환했고, 황후 조이의 조언을 받아들여 게오르기오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1025년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뒤 13년 후인 1038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시칠리아 재정복을 시작했습니다.
4.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황후 조이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장군을 신뢰했고, 게오르기오스에게 서방 원정에게 맡기라고 조언했습니다.
조이를 정치권력에서 차단했던 미카엘 4세였지만 의외로 이 조언은 받아들여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했습니다.
아마 황제와 장군은 화해했을 것이고, 미카엘 4세는 게오르기오스를 롱고바르디아 군관구 사령관직에 임명한 뒤 원정 준비를 실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038년 초여름 게오르기오스는 부하 장수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미카엘 도케이아노스, 바실레이오스, 스테파노스, 노르웨이의 망명자 하랄드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바랑기아 근위대를 데리고 이탈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
카타칼론은 아나톨리아 동부 콜로네이아 출신의, 능력있는 군사귀족이었으며 도케이아노스는 단순하지만 용감했고, 니케포로스 도케이아노스의 친척이었습니다. 바실레이오스는 동로마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환관 장군이었습니다.
스테파노스 제독
스테파노스 제독은 파플라고니아 왕조의 일원으로 황제의 인척이었습니다. 파플라고니아 왕조는 벼락출세한 가문이다보니 황제와 고아원장 요안니스는 친인척을 신뢰해 그들에게 중책을 맡겼습니다. 스테파노스는 이 원정에서 함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스테파노스가 황제의 처남이었고 처남은 아내의 남자형제를 말하는데, 미카엘 4세의 아내는 조이였으니 아마 미카엘 4세가 아닌 다른 파플라고니아 형제의 처남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래 스테파노스는 콘스탄티노플 조선소에서 뱃밥을 채우고 징을 박는 노동자였으나 미카엘 4세의 인척이란 것 하나만으로 제독 자리를 얻었습니다.
프셀로스의 평에 따르면 스테파노스는 "사자가죽을 두르고 헤라클레스 놀이를 하고 싶어하지만, 곤봉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일뿐인 피그미" 였습니다.
미카엘 4세는 게오르기오스와 스테파노스 둘 다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총사령관)로 임명했지만, 원정 준비가 진행될수록 실질적인 최고 지휘권자는 게오르기오스로 밝혀졌습니다.
하랄드 하르드라다(하르드라데)
하르드라다(하르드라데)는 '엄숙한', '폭군', '심각한', '단호한'. '무자비한' 등의 뜻을 지닌 별명이었습니다.
하르드라데라고 불린 '단호왕' 하랄드 시구르드손은 원래 노르웨이 왕 올라프 2세의 이복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올라프 2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자 반발한 귀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올라프 2세는 1030년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기독교도이자 형의 측근이었던 하랄드는 15살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부상당해 덴마크를 거쳐 달아났습니다.
하랄드가 노르웨이에서 스타라야라도가로 넘어간 경로는 불확실하다.
스티클레스타드 전투 후 산을 넘어 스웨덴 북쪽으로 도망쳐 1년 후 스타라야라도가에 도착했다고는 하는데...
키예프 루스는 모험가였던 바이킹들과 현지 슬라브족들의 통합으로 세워진 국가로, 그 주민들은 루스인이라 불렸고 류리코비치 왕조의 일원들은 각지에 대공국을 세웠습니다. 키예프(현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의 대공이 그들의 군주였습니다.
1년 후 하랄드는 키예프 루스에 도착했는데, 마침 하랄드 본인은 키예프 대공부인의 먼 친척이었고, 쓸만한 군인도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키예프 대공 '현명공' 야로슬라브 1세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현명공 아로슬라브 1세 : 마 우리 친척아이가. 잘 지내보자!
하랄드(약 17살) : (감동)
야로슬라브 1세는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를 연 사람이었고, 하랄드는 그 밑에서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키예프 루스의 적들과 싸웠습니다.
몇년간 명성을 쌓은 20살 하랄드는 1033~1034년 즈음 부하 500명을 데리고 미클라가르드(콘스탄티노플)로 내려가 바랑기아 근위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어리지만 고귀한 출생의 망명 왕자는 미카엘 4세의 총애를 받았고, 그리스인들에게 '바랑기아 왕국 국왕(야로슬라브)의 양아들'로도 인식되어습니다.
대체로 바랑기아 근위대들이 황제 주변의 근위대로 있던데 반해 하랄드는 각종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하랄드는 황제를 따라 페체네그와 싸웠고, 동방전선에선 아랍인들을 무찔렀으며,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하던 황족들을 호위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랄드 : 이야 역시 미클라가르드(위대한 도시)는 때깔부터가 다르네.
게오르기오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데려온 바랑기아 근위대, 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 발칸과 아나톨리아 출신의 보병대뿐만 아니라 롱고바르디아 지역에서 새로 병사들을 모집했고, 많은 용병들을 고용함과 동시에 동맹군들을 소집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중앙군은 강력했지만 유지하는데 많은 돈이 들었고, 피해를 입으면 회복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현지인들로 구성된 군관병(테마군)들은 평소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 장기 동원 시 해당 지역의 농사와 경제가 파탄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동로마는 용병을 자주 고용해 사용했는데, 이탈리아 지방은 수도에서 먼데다 바다 건너라 함대를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심해 현지 용병들을 고용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노르만인들이 많이 고용되었고 그중엔 에르베 프랑코풀로스, 위그 투뵈프(Hughes tuboeuf), 오트빌 형제들같은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오트빌 형제들은 주목할만 합니다.
'강철팔' 기욤 드 오트빌
원래 오트빌 가문은 노르망디에 있던 노르만인 귀족 가문이지만 영주 탕크레드 드 오트빌이 두 아내 사이에서 12명이나 되는 아들과 여러 딸을 두었기에 상속받을 영지가 없던 아들들은 막막했습니다.
탕크레드의 자식들. 와글와글하다.
탕크레드의 아들들 대부분은 영지를 얻기위해 남이탈리아로 모험을 떠났고, 그중에서 주목할만한 이들은 기욤, 드로고, 옹프루아, 로베르 기스카르, 로제 등이 있었습니다. 고향에 남아있던 오트빌 가문원들은 이후 정복자 윌리엄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가해 잉글랜드에 영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기욤과 드로고, 옹프루아 등 오트빌 형제들은 1035년 남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를 모셨고, 1038년 시칠리아 원정을 위해 미카엘 4세 황제가 직접 지원 요청을 하자 살레르노 대공은 자신의 대리인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롬바르드 귀족 멜피의 아르두인이 이끄는 롬바르드 병사 200명과 오트빌 형제가 이끄는 300명의 노르만 기사들을 파견했습니다.
마니아케스는 원정대 예산 편성을 위해 남이탈리아 지방에 세금을 부과했고, 카테판 스폰딜레스는 징병관들을 각지로 파견해 주민들을 징병시켰습니다. 현지 남이탈리아인들은 불만을 품었지만 당장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원정 준비가 끝나자 게오르기오스의 원정대는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대략 이렇게 구성되었습니다.
카타프락토이(마갑은 입히지 않음)
카타칼론의 300 기병대(위의 카타프락토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음)
하랄드의 바랑기아 근위대(아마 500명)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 테마들에서 차출된 병사들
500명의 아르메니아인 보병대
아르두인이 지휘하는 200명의 롬바르드 병사
기욤 드 오트빌이 이끄는 300명의 노르만 기사
에르베 프랑코풀로스가 이끄는 또다른 노르만 기사들
스폰딜레스가 이끄는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의 군관병, 즉 콘테라토이(창병이란 뜻)
바오로파 신도들로 이뤄진 병사들 일명 '마니교도 타그마'
아마 원정대 숫자 대부분은 군관병과 징집병들이겠지만 주력은 게오르기오스가 이끌고 온 중앙군과 현지 용병대로 보입니다.
원정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15000명까지로 추론되고 있습니다.
바오로파부터 시작해서 보고밀파, 발도파, 카타리파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이단종파들
카타리파는 알비십자군 쳐맞고 궤멸당했다.
여기서 잠깐 바오로파를 설명하겠습니다.
마니교에서 영향을 받아 아르메니아에서 발흥한 바오로파(파울리키아파)는 원래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동로마에서 박해받자 아르메니아 내륙 깊숙한 곳을 점령하여 아예 독립국가를 세웠고 전성기엔 무려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에페소스까지 약탈했습니다.
참다못한 동로마는 9세기 내내 바오로파 국가를 집중 공격해 멸망시켰고, 동로마 정부에선 이들을 아나톨리아 동부와 트라키아에 식민시켜 국경 방위 병력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트라키아엔 20만명이나 되는 바오로파 교도들이 정착해 11세기에 전성기를 맞았고, 이탈리아에도 9세기 말 니케포로스 포카스 장군이 20000명의 바오로파 병사들을 정착시켰는데, 200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의 후손이 살아남아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원정에 투입된 바오로파 교도들은 트라키아에서 데려왔거나 칼라브리아에서 징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정대의 이동 경로
숫자도 정확하지 않고, 출신은 혼잡하기 그지없는 이 잡동사니 원정대는 스테파노스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탑승하여 1038년 여름이 끝나갈 때 시칠리아에 상륙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원정대는 단숨에 메시나를 함락시키고 팔레르모로 향하는 길인 로메타 요새를 포위한 후 이내 점령했습니다.
동시에 일부 분견대는 시칠리아 남쪽의 몰타 섬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동로마군 : 가자!!
노르만 기사 : 까꿍 십새들아!
바랑기아 근위대 : 조져!
지리 왕조의 아랍인들은 서둘러 아프리카에서 지원 병력을 불러와 대군을 모았지만 게오르기오스는 이들을 격파하고 13개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지속되면서 시칠리아 토후국보다는 덜해도 상당한 피해를 입자 게오르기오스는 바로 팔레르모(파노르무스)로 진공하는 대신 시칠리아 동해안을 장악하기위해 시라쿠사로 나아갔습니다.
4개 도시를 점령한 하랄드는 여기서도 일화를 하나 남겼습니다.
"하랄드는 한 도시를 포위했는데, 도시는 크고 인구가 많았으며 성벽은 튼튼하고 식량과 보급품을 비축해둔 상태였다.
하랄드는 비책을 찾았다. 도시 주변의 새들을 미끼로 사로잡은 뒤 새들의 등에 왁스와 유황을 바른 뒤 불을 지폈다.
도시 안으로 날아간 새들에 의해 갈대와 짚으로 만들어진 초가집들에 불이 붙었고, 금방 사방으로 번졌다. 도시의 시민들은 밖으로 뛰쳐나와 자비를 빌었다. 그들은 예전에 그리스인의 군대와 지도자를 경멸하던 거만한 자들이었으나 하랄드는 그들 모두를 사면했다."
(대충 나 하랄드가 이렇게 쩔고 지혜롭고 관대한 인물이라는 스칸디나비아 사가 내용이 출처)
동로마군은 1038년 기습적인 공격과는 달리 천천히 남하해 1040년에야 시라쿠사에 도착했습니다.
동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포위하자 시라쿠사의 이슬람 군대는 출병하여 맞서싸웠는데, 카이드라는 장군이 이들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노르만 연대기에 따르면 카이드는 시라쿠사의 에미르였다는데, 시라쿠사 성주로 보입니다.
카이드가 동로마군을 휘젖자 35살즈음이었던 기욤 드 오트빌이 앞으로 달려나가 검을 휘둘렀고, 단 일격에 카이드를 죽여 그리스인들과 시칠리아인들 모두를 경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강철팔(Iron arm)'이란 별명이 붙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로 도시로 도망친 이슬람 군대가 성을 굳게 지키자 동로마군도 포위 유지에 들어갔는데, 시라쿠사가 포위당했음을 알게된 지리 왕자 압달라는 군대를 모아 접근했습니다. 이에 게오르기오스도 포위를 풀고 군대를 움직여 서북쪽으로 이동, 시칠리아 중심에 가까운 트로이나(Troina)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트로이나 전투의 전개 사항
내용 이해를 위해 넣은 것이고 자세한 경로는 불분명하니 신뢰하지 말아주세요.
게오르기오스는 전통적인 비잔티움 진형을 사용, 3개의 열로 된 보병 전열, 군대의 중앙 전면부엔 카타프락토이와 노르만 기사, 군대의 측면에 경기병을 배치했습니다.
전투 중 갑작스런 모래먼지로 지리군의 진형이 흐트러지자 게오르기오스는 중장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했습니다. 카타프락토이와 노르만 기사들이 돌격해오자 이슬람 군대는 공포감에 무너져 수천명이 사살당했습니다. 과장된 기록일 수 있지만, 이슬람 병사 오만명 이상을 전사시켰다고 합니다.
실제론 오천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중세에서 이 정도 사살만 해도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카타프락토이와 노르만 기사의 돌격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카타프락토이들은 마갑이 없었지만.
전투 후 전장 주변의 강이 피로 물들 지경이었고, 게오르기오스는 이 승리를 기리기위해 성모 마리아를 위한 작은 수도원을 건설했습니다. 현재는 산타 마리아 디 마니아체 수도원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에트나 산 북부로 향하는 길들의 방위목적으로 직접 마을을 하나 세웠는데, 이 또한 마니아체 마을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1040년 트로이나 전투가 이슬람군의 대패로 끝나자 전의를 상실한 시라쿠사는 항복했고, 원정대가 시라쿠사로 들어와 162년만에 이슬람 통치를 끝내자 많은 그리스계 시민들이 환호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시라쿠사의 수호성인인 성 루치아의 유물을 도굴해 콘스탄티노플로 보냈고, 시라쿠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지금은 카스텔로 마니아체(마니아체 성)이라고 불립니다.
시칠리아 동부 인구 대부분은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들이었고, 15000명의 시칠리아 시민들이 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지를 밝혔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협력자고 실제 병력으로 가용한 건 소수였을 겁니다.
당시 게오르기오스가 점령한 대략적인 영역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팔레르모로 진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첫번째는 노르만인들과의 분쟁이었습니다. 기록이 두가지로 남았는데, 첫째는 아르두인의 말 문제 설입니다.
아르두인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에서 한 말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는데, 게오르기오스는 이 말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르두인이 이를 거부하자 게오르기오스는 아르두인을 잡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기고 채찍질했습니다.
다른 한가지 설은,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의 대표자이자 그리스어도 잘하는 아르두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마니아케스 장군에게 가서 노르만인들 자신들이 받을 돈(아마 공적에 따른 추가급)에 대해 물어봐달라는 것이었는데, 아르두인이 마니아케스 장군에게 그 안건을 물어보자 화가 난 마니아케스 장군이 아르두인을 채찍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채찍질(무진장 아프다.)
롬바르드인, 노르만 기사들 : (술렁술렁)
추측컨데 게오르기오스의 부하인 미카엘 도케이아노스가 직접 채찍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욕을 당하자 화가 난 아르두인과 기욤이 지휘하는 노르만인들은 원정에서 이탈해 남이탈리아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숫자의 바랑기아 근위대도 같이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지만 용병들과 달리 엄연히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정에 참가한 정규군인 걸 생각하면 남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란 게 더 신뢰가 갑니다.
당시 남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력이 시칠리아로 투입된 상태였기에 바랑기아 근위대가 남이탈리아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어쨋든 1000명 가까운 병력이 빠져버렸는데, 채찍질을 당한 사람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바로 해군 제독 스테파노스였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트로이나 전투 당시 스테파노스에게 해안을 봉쇄하고 바다로 도망치려는 이슬람 군대를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노스는 이를 실패했고, 지리조 왕자 압달라는 살아남아 배를 타고, 시칠리아를 탈출하고 말았습니다.
시라쿠사에 온 스테파노스가 총사령관을 만났을 때 그는 무척 화가 나 있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심한 욕설을 하면서 채찍으로 스테파노스의 머리를 몇번이나 때렸고, 스테파노스를 '황제의 기대를 배신한 게으른 겁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총사령관 게오르기오스가 채찍으로 스테파노스 제독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다.
게오르기오스 : 별달면 군생활 끝나냐? VIP 친척이면 더 잘 해야되는 거 아냐? 뭘 잘했다고 꼬라봐?
게오르기오스는 유능하고, 대부분의 전장에서 부하들과 같이 맨 앞에서 싸울만큼 용맹했지만 때때로 폭력을 사용해 잔인한 분위기를 형성했고, 그럴 때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기오스는 큰 실수를 했는데, 스테파노스 제독은 미카엘 4세의 인척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스 : 게오르기오스 이 나쁜 놈... 소원수리(반역모의 누명) 쓸테다...
이런 수치에 증오심을 품은 스테파노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서둘러 사자를 보내 게오르기오스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아르메니아인 장군 바실레이오스 테오도로카노스와 함께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고, 어떤 항변의 기회도 갖지 못하고 바로 감옥에 갇혔습니다.언제 풀려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게오르기오스 : 난 군대 내 구타를 한거지 반역을 꾸민 게 아니라고! 난 억울해!
병사 : 네네 다들 그렇게 얘기해요. 빨리 들어가기나 하세요.
이제 원정대의 지휘관은 스테파노스였지만 상당한 양의 병력이 유출되고 스테파노스 본인도 무능하고 무심함 때문에 시칠리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남은 칼비 가문의 지도자 알 하스 아즈 삼삼은 시칠리아의 무슬림을 결집하여 반격을 시작했고, 시라쿠사를 되찾았습니다.
2년에 걸쳐 원정대는 정복한 영토들을 상실하고 다시 시칠리아 동북쪽 끝 메시나로 내몰렸습니다. 스테파노스는 남이탈리아 반란을 진압하려다 전사했고, 환관 바실레이오스가 지휘권을 계승했지만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원정대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의 지휘로 승리한 메시나 공성전
결국 원정대는 시칠리아에서 철수했습니다. 1041년 5월 10일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만이 아르메니아인 보병대와 함께 싸워 메시나 공성전을 승리하고 아랍인들을 격퇴했지만, 그 역시 철수 명령을 받고 껄끄러운 마음으로 시칠리아를 떠났습니다.
1042년 결국 메시나도 아랍인들에게 점령당했고, 시칠리아 섬은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오기 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기오스가 시칠리아 토후국에 입힌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고, 이후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는 노르만인들은 게오르기오스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5. 1040 ~ 1041년. 강대해지는 노르만인, 혼란에 빠져드는 롬바르드인과 로마인
롬바르드인 귀족 아르기루스
아르기루스 혹은 아르기로라 불리는 남자는 롬바르드인이었고, 롬바르드 독립 전쟁을 시도했던 멜루스의 아들이었습니다. 1011년 바리가 동로마군에게 함락되면서 어머니 마랄다와 11살의 아르기루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습니다.
아르기루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죄수취급을 당했을지 궁정 교육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롬바르드식이 아닌 그리스식 아르기로스(Argyros)였고 당시 명문귀족 출신 황제 로마누스 3세의 가문도 아르기로스였다는 점이나 이후 행적을 보면 옛 로마인들이 그렇듯 외국귀족의 자제에게 동로마식 교육을 시킨 것 같습니다.
애초에 아르기로스란 이름이 아버지가 붙여준 본명이 아니고, 동로마 궁정에서 받은 세례명이거나 로마누스 3세가 붙여준 이름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인들조차도 그의 이름을 '아르지로'라고 불렀기에 그의 본명은 알 수 없습니다.
1011년부터 1039년까지, 27년간 아르기루스는 동로마 궁정에서 자라 38살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1039년 동로마는 드디어 그를 이탈리아로 보냈는데, 이탈리아 카테판 니케포로스 도케이아노스 밑에서 남이탈리아를 관리하고 아풀리아 지방에서 징병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아풀리아 반란군을 진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르기루스가 동로마 장군이 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지 멜루스는 18년전인 1020년에 죽었고, 이탈리아 카테판과 황제 미카엘 4세, 동로마 정부에선 당연하다는듯이 아르기루스를 동로마의 신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스콜리 사트라이노 반란군과 그를 진압하려했던 니케포로스
1039년 롱고바르디아 군관구, 아풀리아 서북부의 도시 아스콜리 사트리아노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퇴역한 롬바르드인 군관병들이 무거운 세금에 불만을 가졌던 것인데, 다음해 1040년 1월 니케포로스 도케이아노스가 반란 진압을 시도하다 군관병들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니케포로스 도케이아노스를 죽인 퇴역 군관병들은 5월엔 바리와 타란토 사이에 있는 도시 모톨라로 몰려가 재판관 미카엘 코이로스팍테스와 행정관 로마노스를 죽였습니다.
1040년 1월 콘테라토이들이 아스콜리 사트리아노에서 일으킨 반란은 5월엔 마테라와 모톨라, 타란토 근교, 비톤토, 바리에서도 반란이 번졌습니다.
이에 아르기루스는 남은 진압군을 이끌고 바리 근교에서 퇴역 군관병들과 전투를 벌여 이겼습니다.
진압군은 반란의 주동자 무산두스에게 상처를 입혔고, 패배한 반란군이 동쪽의 오스투니로 후퇴하자 그곳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반란의 일곱 주동자들 중 대표 2명 무산두스와 요한네스는 바리 감옥에 가뒀고, 4명은 바리에서, 다른 1명은 아스콜리에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니케포로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미카엘 도케이아노스가 1040년 11월 일부 바랑기아 근위대와 함께 바리에 도착했습니다. 새 카테판 미카엘 도케이아노스는 베노사, 라벨로, 바리 등 중요 도시의 통제권을 회복하고 징벌 목적으로 반란 주동자들을 징벌했습니다.
일단 바리 서쪽의 비톤토에서 3명의 목을 매달았고, 4명을 실명시켰습니다.
미카엘 도케이아노스는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아르두인의 도움을 받고자 혹은 화해하고자 그를 멜피의 토포테레테스로 임명했습니다. 토포테레테스는 부사령관이란 뜻으로, 즉 이탈리아 카테판령 넘버 2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아르두인은 자신을 채찍질한 마니아케스와 도케이아노스에 증오를 품고 있었고, 아풀리아 반란군을 지원하기 맘먹었습니다. 1041년 초 아르두인은 반란에 동참해 아스콜리 사트리아노와 베노사의 반란군을 지원했습니다.
롬바르드인 귀족 아르두인은 반란에 기름을 뿌렸다.
이렇게되자 미카엘 도케이아노스는 아풀리아 북부로 군대를 진군시켜서 상황을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수도 감옥에 갇혀버렸고 여전히 대다수의 병력은 시칠리아에 있는 상태.
도케이아노스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옵시키온, 트라키아 군관구에서 데려온 소수의 병력과 바랑기아 근위대 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시칠리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도케이아노스는 반란군을 격퇴하기위해 병력을 긁어모았습니다. 편제상 남이탈리아의 3개 군관구는 각각 2000명의 군관병이 편제되어 총 6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11세기엔 군복무 대신 세금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많았고, 상당수가 시칠리아 원정대 아님 반란군에 합류했던데다 도케이아노스도 급하게 움직이느라 이보다 훨씬 적은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3500명 정도로 추정되었습니다.
1040년 11월에서 1041년 초까지 바리 근방을 정리한 도케이아노스는 반란이 처음으로 일어난 아스콜리로 진군해 아스콜리 시민들을 처벌하고 반란 주동자 1명을 목매달았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스콜리 아래쪽, 멜피 근방에 모여있는 롬바르드-노르만 반란군에게 향했습니다.
멜피 주민들이 동로마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롬바르드-노르만 반란군은 멜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방에 진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멜피의 아르두인은 이미 있던 노르만인들 말고도 아베르사 백작 라이눌프 드렝고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역시 노르만인이었던 라이눌프 드렝고는 전리품의 반을 받는 조건으로 300명의 노르만 기사를 동원했습니다.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는 반란자들을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아르두인이 원래 과이마르 4세의 부하였음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041년 초 정황상 아르두인, 아르두인과 같이 있던 오트빌 형제, 위그 투뵈프, 에르베 프랑코풀로스를 비롯한 노르민인들, 그리고 어느순간 아르기루스까지 반란에 동참했고 반란자들은 멜피 근처에 모여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그들은 베네벤토 대공의 동생이던 아테눌프를 반란 지도자로 선출하였습니다. 베네벤토 대공국은 한 때 교황령 이남 남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동로마를 거의 밀어내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강성했으나 이 시기엔 이미 도시와 몇 개 현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원래라면 베네벤토 대공국의 섭정을 맡아야겠지만 형이었던 대공에게 쫓겨난 아테눌프도 불만을 가진 채로 반란에 참가했습니다. 여전히 베네벤토 대공국은 롬바르드인들에게 높은 위상을 가진 이름이었기에 아테눌프가 선출되었고, 베네벤토 대공(Prince of Benevento)로 불렸습니다. 실제 베네벤토 대공국은 그의 형인 진짜 베네벤토 대공이 다스리고 있었지만요.
원래라면 노르만인들도 자신들 사이에서 후보를 내세울 예정이었지만 아테눌프가 노르만인들에게 뇌물을 먹여 막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후계에 불만을 가진 가칭 베네벤토 대공, 전 동로마 장군 아르기루스, 아르두인, 노르만인들과 그 지도자 기욤 드 오트빌, 아베르사 백작 라이눌프, 위그 투뵈프가 반란의 핵심 구성원들이었습니다. 멜피의 회의에서 아르두인은 남이탈리아에서 영원히 그리스인을 쫓아내는 대가로 정복한 땅의 절반을 약속했습니다.
올리벤토 강(파란선)을 넘는 미카엘 도케이아노스
멜피와 라벨로 근방을 흐르는 강인 올리벤토 강을 동로마군이 넘어오자 반란군의 노르만 기사 700명과 보병 500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은 노르만 기사 300명, 보명600명이라고도 함)
도케이아노스로선 다행히도 아직 반란군의 규모는 카테판 군대보단 적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도케이아노스는 롬바르드-노르만 연합군에게 사신을 보내 얌전히 반란군을 해산하고 롬바르드 땅으로 돌아갈지 아님 수적으로 우세한 동로마군과 맞서 싸울 것인지 경고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분노한 노르만 기사 위그 투뵈프가 건틀릿을 낀 주먹으로 말의 뒤통수를 쳐 죽였고, 그리스 사신은 새 말을 받아서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설도 있음)
1041년 3월 17일 올리벤토 전투가 시작되어 하루 종일 이어졌는데, 아르기우스와 기욤 드 오트빌이 이끄는 노르만 기사대가 동로마 기병대와 바랑기아 근위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자 전세는 반란군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동로마군이 등을 돌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지만 도케이아노스는 탈출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3월 28일 아르두인은 노르만인들과 함께 멜피를 포위했고, 멜피 시민들은 동로마군이 패배하고 자신들은 포위당했음을 알자 항복했습니다. 아르두인이 멜피와 라벨로를 가지게 되었고, 멜피는 반란군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노르만인들은 올리벤토 전투의 승리로 남이탈리아 정복의 첫단추를 뀄습니다.
올리벤토 전투의 패배로 반란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패배한 후 바리로 피신한 도케이아노스는 시칠리아에 머물던 원정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반란군의 기욤 드 오트빌 역시 승리의 가능성을 보고 남이탈리아에 계속 들어오는 노르만인들을 자기 군대로 끌어모았습니다. 또 전공에 대한 대가로 아스콜리, 베노사, 그라비나의 통치권을 얻었습니다.
바리에서 도케이아노스는 병력을 다시 규합해 수천명의 병력을 모았고, 바랑기아 근위대도 보충되었습니다. 하랄드 하르드라다의 행적은 애매한데, 이 때 도케이아노스와 같이 있었다는 기록과 실제론 시칠리아 원정대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는 기록이 상충됩니다.
칸나이 근방인 몬테마조레에서 다시 두 군대가 맞부딫혔는데, 반란군의 규모는 2000명 이상, 노르만 기사들은 두 배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수적으론 진압군이 더 많았으나 장비와 군사력의 질은 노르만 기사들이 훨씬뛰어났습니다. 진압군의 유일한 정예 병력은 바랑기아 근위대였는데, 시칠리아 원정대를 생각하면 500명 전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 연대기에선 동로마군이 18000명이라 했지만 확실한 뻥이고 실제론 3000에서 50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1041년의 주요 전투들
노르만 기사들의 돌격
반란군들은 체계적인 병참 보급은 없었지만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진압군은 바리로부터 이어지는 보급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저지대에 진영을 세웠습니다. 서둘러 반란을 끝내야한다는 조급함인지 아님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자신감인지 도케이아노스는 먼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041년 5월 4일 몬테마조레 전투가 시작되자 이러한 판단이 틀렸다는 게 밝혀졌는데, 언덕을 올라가던 진압군은 불리한 형세에 처했고 노르만 기사들이 돌격하자 전열이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열병에 걸린 기욤 드 오트빌은 전장에 참가하지 않고 언덕 위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전투가 격화되자 흥분하여 싸움에 참가했습니다.
많은 바랑기아 근위대가 살해당했고 두 명의 주교를 포함해 진압군 병사들의 많은 수가 전사하거나 오판토 강에서 익사했습니다. 미카엘 도케이아노스도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포로가 될뻔했다가 종자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반란군은 패배한 진압군을 추격하는 대신 전리품을 얻는데 주력했습니다. 노르만인들은 동로마 군대가 가지고 있던 군용장비, 말, 천막, 귀한 직물, 금과 은을 포함한 전쟁 전리품 등 귀한 전리품을 처음으로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또 노르만인들은 약탈 보급에 의존하던 자신들과 달리 동로마군의 보급 체계를 보고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전투 후 반란군들은 아풀리아 롬바르드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어 영역을 확대했지만 크게 군대를 일으키진 않았는데, 몬테마조레 전투에서 반란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어 이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끝으로 아르두인의 기록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는데, 반란군 내에서 그의 입지가 줄어들었거나 몬테마조레 전투에서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욤이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란군 진영에서 퍼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르두인의 종적이 사라지다.
아르두인은 초기 롬바르드 반란을 주도한 실질적 지도자급 인물이자 그 자신부터 뛰어난 전사였고, 노르만인들을 오랫동안 통솔해 온 인물이었기에 그의 행방불명은 롬바르드인들의 노르만인 통제가 약해질 것을 시사했습니다. 이후 기록을 보면 어느새 멜피는 기욤 드 오트빌의 영지가 되어있었습니다.
진압군과 반란군 양측 다 4달 동안 재정비 시간에 들어갔습니다.
미카엘 도케이아노스는 바리로 후퇴해 시칠리아 원정대한테 더 많은 병력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몬테마조레의 패배 소식은 동로마 정부로 전해졌고, 그에 대한 신뢰를 잃은 정부는 도케이아노스를 시칠리아 원정대로 복귀시키고 새 카테판 엑사우구스투스 보이오안니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 원정대의 대부분도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메시나를 지키는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와 소수의 아르메니아인 보병대만이 남았습니다.
1041년 5월이 지나자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동로마 정부로 복귀했는데, 당시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황제 미카엘 4세가 친정을 나선 상태였고, 신뢰하던 하랄드를 근위대로 다시 불렀습니다.
잇다른 병력 유출로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확실해졌고 동로마 정부는 남이탈리아만이라도 사수하려고 했습니다.
동로마군이 연달아 패배하자 바리, 모노폴리, 지오비나초와 여러 해안 도시들은 동로마와의 동맹을 끊고 반란군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1041년 여름 배치된 엑사우구스투스 보이오안니스는 한 때 남이탈리아를 호령했던 바실레이오스 보이오안니스 장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젊은 보이오안니스는 아체렌자 북동쪽의 몬테 시리콜로에서 야영 중인 반란군과 멜피 사이의 연결을 끊고 롬바르드-노르만 군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그 사이에 위치한 몬테펠로소로 갔습니다. 성급하게도 병력이 소집되기도 전에 바랑기아 근위대만을 데리고 말입니다.
보이오안니스는 몬테펠로소에서 버티면서 이후 병력들이 다 모여들면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에서 모집 내지 지원으로 오는 현지인 군사들이 몬테펠로소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압군이 집결하여 포위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3000명 규모의 반란군은 보이오안니스를 끌어내기위해 몬테펠로소로 향하는 가축수송대를 습격했습니다.
결국 보이오안니스는 먼저 전투를 벌이기로 했는데, 상당히 멋들어진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의역 많음)
"전우들이여, 아녀자가 아닌 대장부답게 행동하라! 어떤 비겁함이 자네들을 항상 도망치게 만드는가? 전 세계가 그들에게 복종하게 만든 용기를 가졌던 그대 조상들을 기억하라.
가장 용감한 인간이었던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검에 쓰러졌다. 트로이는 그리스인의 분노로 화염에 휩싸였다. 인도는 필리포스의 용맹함을 알았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용기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그리스 앞에 무릎끓게 만들지 않았는가?
서방을 포함한 온 세상이 한 때 우리를 두려워했다. 그리스의 이름을 듣고 어떤 이가 감히 전장에서 우리와 맞서겠는가?
마을, 요새 그리고 도시들은 그들 자신만으로는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없다.
청컨데, 조상들의 담력을 기억하며 용기를 가져라.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조상들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다!
사나이답게 싸우는 자가 적을 쓰러트릴지니,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하며, 도망칠 생각은 버려라!
그대가 용기있는 자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아야한다. 프랑크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용기로든 숫적으로든 열등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몬테펠로소 전투
1041년 9월 3일 몬테펠로소 근방의 브라다노 강에서 벌어진 전투는 하루종일 지속됐고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에서 온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그 후 진압군의 중심 전열인 마케도니아인, 칼라브리아인, 바오로파 교도들로 이뤄진 부대를 공격했습니다. 오트빌 가문의 친척이던 노르만 기사 발티에르(Waltier, 구알티에로 Gualtiero)가 큰 활약을 했고, 다시 동로마 군대는 패배했습니다.
엑사우구스투스 보이오안니스가 노르만인들에게 사로잡혔고 진압군은 붕괴했습니다.
몬테펠로소와 아체렌자가 반란군에게 넘어왔고, 기욤의 부하이자 브르타뉴인 기사였던 트리스탄이 몬테펠로소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발티에르는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아풀리아 북쪽의 칸델라로 강변의 요새도시 치비타테를 받았습니다.
엑사우구스투스는 베네벤토로 이송되었는데, 아테눌프와 썩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이제 베네벤토 대공국도 반란군을 후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해 1042년 2월이 될 때까지 5달간 또 카테판 자리가 비어버렸고 남은 동로마 군대는 사령탑이 없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했습니다.
도시 마테라는 동로마 대신 반란군을 지지하기로 했고, 노르만인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바리, 모노폴리, 조비나초 도시들은 동로마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습니다. 아르기루스는 곧 바리의 통제권을 획득했습니다.
반란군들에겐 운이 따랐는데, 1040년 대대적으로 일어난 불가리아 반란이 1041년에도 계속 이어져 황제 미카엘 4세는 이탈리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의 이쁨을 받던 하랄드 하르드라다만 해도 동로마 중앙군으로 돌아간 후 18번 이상 전투를 치뤘다고하니 불가리아 전선에서의 치열함을 알 수 있겠습니다.
하랄드 : 바쁘다바빠.
하지만 반란군 내에서도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르만인들의 세력이 위험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는 걸 롬바르드인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남이탈리아의 주민들은 오랜 세기 동안 혼혈화되어 크게 롬바르드인과 그리스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때에 따라 지지를 바꿨습니다. 때론 롬바르드인들이 동로마를 지지하기도 했고, 초기엔 멜루스를 지지했던 것처럼 그리스인들이 롬바르드 귀족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서로를 경계시하면서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상대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르만인들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남이탈리아인에겐 풍습과 행동양식이 낯선 자들이었습니다.
노르만인들은 반란군에서 눈에 띠는 군공을 세웠고, 반란이 성공해갈수록 노르만인들은 더 많은 영지와 재물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롬바르드인들은 그리스인들을 압제자로 여긴 것만큼 노르만인들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롬바르드 지도자들은 서서히 노르만인들이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노르만인들은 군량 보급을 위해 롬바르드인들의 농장을 약탈하기도 했고, 반란의 명목상 지도자 아테눌프 역시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가 반란군 내의 노르만인들을 돈과 선심성 약속으로 포섭해나가고 있음을 걱정했습니다.
발칸 서부를 휩쓴 불가리아 반란
동로마에선 드디어 불가리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지만 미카엘 4세는 병에 시달리던 상태에서 전장을 누비느라 치명적인 건강 손상을 입었습니다.
1041년 12월 10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있던 미카엘 4세는 그 순간까지 황후 조이의 방문을 거부하면서 죽었습니다.
6. 1042년 풀려난 게오르기오스의 반란
1041년 12월 10일 미카엘 4세가 죽자 고아원장 요안니스가 조이로 하여금 양자 입적을 강요해놨던 조카 미카엘 5세가 12월 13일 새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부모가 땜장이 일을 했기 때문에 칼라파테스(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미카엘 5세는 권력욕이 강했고, 이내 삼촌 콘스탄티노스와 결탁해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고아원장 요안니스를 몰아냈습니다.
여기서 실수를 했는데, 미카엘 5세는 요안니스를 수도원으로 추방한지 얼마안되 콘스탄티노스를 제외한 모든 파플라고니아 왕조 남성들을 거세해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제위에 대한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였으나, 거꾸로보면 이후 왕조가 위험에 처할 시 도와줄 수 있는 왕족계층을 소멸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끝 장화뒤꿈치만 유지 중인 동로마군
1042년 2월 드디어 새 카테판 시노디아노스가 임명되었고, 그가 이탈리아에서 한 일은 크게 2가지였습니다.
붕괴된 동로마군들을 정비하고 포로로 잡힌 전 카테판 엑사우구스투스를 돌려받는 일이었습니다.
전자는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카테판 치소가 있던 바리를 포함해 아풀리아 대부분이 반란군에게 넘어가 시노디아노스는 대신 이탈리아 반도 장화 끝인 오트란토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 서신을 보내 다시 협력하려고 했으나 노르만인들이 무서웠던 남이탈리아 도시들은 제안을 거부했고, 남이탈리아의 동로마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흩어져버려 군대 정비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노디아노스는 엑사우구스투스를 돌려받기 위해 두둑한 몸값을 제시했고, 베네벤토 대공 아테눌프는 거래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눌프는 몸값을 다른 노르만인들과 나누는 대신 자신이 모두 차지했는데, 반란군 내에서 롬바르드인과 노르만인들의 신뢰 관계가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아님 그저 돈욕심에 눈이 멀었을 수도 있습니다.
노르만인들 : 아테눌프 이놈이 배신을 때려?
곧 아테눌프는 동로마에게 포섭되어 그 돈을 죄다 챙겨서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했고, 명목상 지도자가 사라진 반란군은 아르기루스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고 그를 아풀리아 공작이라 불렀습니다. 수십년 전 그의 아버지 멜루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받았던 호칭이었습니다.
한편 동로마 궁정에서, 미카엘 5세는 처음엔 양어머니 조이에게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미카엘 4세 때만 해도 음모를 꾸미곤했던, 하지만 나이가 들어 이제 권력욕과 성욕이 줄어들고 온화한 할머니가 된 64세 조이는 미카엘 5세의 행동에 만족하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능력은 있었으나 욕심이 그보다 컸던 미카엘 5세
그러나 서둘러 권력의 일인자가 되고 싶었던 미카엘 5세는 조이가 늙어죽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태황후를 쫓아내고 자신이 유일한 권력수반이 되려고 했습니다. 여러번의 대중행사를 통해 민중들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확신한 미카엘 5세와 삼촌 콘스탄티노스는 는 1042년 4월 18일 기습적으로 조이를 수녀원으로 추방했습니다.
4월19일 아침 조이의 폐위를 통보하는 사항이 발표되자 귀족과 대중들의 반응은 황제가 예상하던 바와 달랐습니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후계자가 쫓겨났음을 알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당황한 미카엘 5세는 서둘러 조이를 데려와 다시 황실 예복을 입혀 시민들 앞에 내보였으나 수도사 머리처럼 삭발당한 조이의 모습을 본 시민들은 폭발하여 대중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궁전으로 시민군들이 몰려들자 겁먹은 미카엘 5세는 수도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삼촌 콘스탄티노스가 물러서지 말고 싸울 것을 주장하자 근위대를 동원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 도망칠 순 없습니다. 차라리 자주빛 수의를 입고 죽겠습니다!
미카엘 5세 : 삼촌 그거 600년 전 드립 아니에요?
시민군은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을 풀어줬고, 이틈에 하랄드 하르드라다도 탈옥했습니다. 하랄드는 미카엘 4세가 죽자 총애를 잃었고, 전리품 혹은 황제 미카엘 5세와의 문제로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바랑기아 동료들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와 시민군에 합류했습니다.
시민군과 정부군이 시가전을 벌였고, 바랑기아 근위대들도 대부분 황제 편에 섰으나 하랄드와 동료들은 시민들에게 합류했습니다. 3000명이 죽고나서야 정부군이 패배했고, 시민군은 궁궐에 돌입해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각종 세금, 행정문서를 불태웠습니다. 하랄드도 이 때 궁전을 약탈하면서 한톡 챙겼습니다.
4월 20일 새벽 정부군이 패배하자 미카엘 5세와 콘스탄티노스는 서둘러 배를 타고 도망쳐 스투디온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어 보복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시민들은 수녀원에서 여동생 테오도라까지 같이 데려왔습니다. 테오도라는 이미 수십년간의 수녀 생활에 익숙해져 이를 거부했지만 시민들이 억지로 모셔왔습니다. 조이는 테오도라를 싫어해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시민들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4월 20일 낮 조이와 테오도라는 시민들의 지지로 공동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시민군은 스투디온 수도원에서 미카엘 5세와 콘스탄티노스를 잡아왔는데, 조이는 미카엘 5세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려고 했으나 테오도라와 시민들은 전 황제에게 냉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미카엘 5세와 콘스탄티노스는 실명과 거세를 당한 뒤 다지 수도원으로 쫓겨났습니다. 미카엘 5세는 이런 꼴로 만든 콘스탄티노스 삼촌을 저주했지만 상황을 돌릴 순 없었습니다.
미카엘 5세는 4달 후 사망했습니다.
하랄드(27세) : 잘있거라 위대한 도시여.
사태 직후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재물을 가득 실은 배에 타 부하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해 키예프 루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가 왕이 되었고, 해롤드의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고 침공했으나 전사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무고함을 인정받아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미카엘 5세가 게오르기오스를 풀어줬다는 설과 여제로 등극한 조이가 게오르기오스를 풀어줬다는 설, 이렇게 두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 다 근거가 있어 어느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미카엘 5세가 고아원장을 내쫓은 뒤 추방당하거나 투옥당해있던 고아원장의 정적들을 풀어줬던 일이 있었고, 조이는 꾸준히 게오르기오스를 신뢰해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여러번 했었습니다. 확실한 건 4월이 끝나기 전에 게오르기오스는 이탈리아 카테판으로 임명되어 남이탈리아 방어에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1042년 노르만 군벌들의 주둔지와 동로마, 롬바르드의 군사작전
1042년 4월 말 게오르기오스는 알바니아인들로 구성된 연대들과 함께 타란토에 상륙하여 시노디아노스로부터 남이탈리아를 인계받았습니다. 상황은 막막했습니다. 아풀리아와 루카니아 대부분이 아르기루스의 반란군에게 넘어갔고, 멜피 영주 기욤 드 오트빌, 아베르사 백작 라이눌프, 베네벤토에 있던 라이눌프의 조카 라이눌프 트린카녹테 등의 노르만족까지 합치면 반란군은 7000명에 달했습니다.
그에 반해 게오르기오스에겐 "장관, 이탈리아 카테판, 이탈리아의 사령관이자 이탈리아 군대 지휘관'이란 호칭과 소수의 바랑기아 근위대, 알바니아인 연대, 현지 징집병들이 있었습니다. 아직은 타란토, 오트란토, 오리아, 브린디시가 카테판의 영역이었고, 용케도 아풀리아 한복판에 있던 트라니가 홀로 동로마에 대한 충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남이탈리아에 상륙하자마자 아르기루스는 노르만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이즈음 7000명의 병력을 모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소수의 노르만 기사들과 다수의 현지인 보조병들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모톨라로 다가오자 신중한 게오르기오스는 야간 중에 조용히 철수하여 타란토로 돌아왔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병력은 당시 많아봤자 반란군의 절반인 3500명 정도였고, 숫자와 질 둘 다 반란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롬바르드-노르만 연합군은 오리아를 약탈하고 무력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노르만 영주들의 지원군이 돌아가자 게오르기오스는 반격했습니다. 적은 군인들로도 여러 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해 반란군을 카푸아, 베네벤토, 나폴리 방향으로 밀어냈고 자신의 명성과 돈으로 많은 프랑크인들을 동로마군으로 끌어모았습니다. 보통 여기서 말하는 프랑크인들은 노르만인들을 말하나, 다른 서유럽인들도 흔히 프랑크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미카엘 도케이아노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을 달랬고, 공포심과 두려움을 유발시켜야 할 때는 철저하게 실행했습니다. 몇 달 동안 마테라, 바리, 타란토 근교 지역을 헤집으며 반란군들을 격퇴한 게오르기오스는 1042년 6월 반란도시 모노폴리를 함락시켰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무자비하게 모노폴리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처형하거나 목매달았고, 아이들을 산채로 매장했습니다. 그 다음엔 마테라를 공격해 그곳 들판에서 잡힌 농민 200명을 살해하고 아이, 노인, 수도사, 신부 가릴 것 없이 보이는데로 죽였습니다. 노르만인들이 남긴 기록이라 과장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게오르기오스는 필요하다면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고, 중세시대에 이런 학살은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의 아르기루스는 노르만 군대가 돌아가자마자 5달 동안 바리 근처에서 날뛰는 게오르기오스를 막지못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를 막은 건 또 동로마의 내부 정치였습니다.
아나톨리콘 테마의 군사귀족들인 마니아케스 가문과 스클레로스 가문은 땅문제로 서로 다툼을 벌여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와 로마노스 스클레로스 역시 사이가 안좋은 정적이었는데, 그런 로마노스 스클레로스의 여동생 마리아 스클레리나가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라는 잘생긴 귀족의 애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는 아버지 테오도시오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점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두번째 아내로 로마노스 아르기로스(로마누스 3세가 황제가 되기 전)의 조카딸과 두번째 결혼을 하는 등 나름대로 성공했습니다. 미카엘 4세와 고아원장 요안니스는 미남이었던 모노마코스가 조이를 유혹할까 두려워 그를 7년이나 유배시켰지만 미카엘 5세 시기에 사면받아 수도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1042년 6월 두 달 간 어찌어찌해서 공동통치를 하던 조이와 테오도라의 사이가 악화되었고, 동생 테오도라를 밀어내기 위해 조이가 3번째 결혼으로 황제를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3명의 신랑 후보 중 선택된 자가 바로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였습니다. 그는 쾌락을 즐기고 낭비벽이 있었으며 마리아 스클레리나라는 애인도 있었지만 상당히 유능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가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로 등극하자 로마노스 스클레로스는 자기 여동생 마리아 덕을 봤습니다.
그는 단숨에 새 황제의 측근으로 올라섰습니다. 트라케시온 테마 사령관(스트라테고스), 통령(프로에드로스), 안티옥 도독(둑스)같은 요직들을 역임하며 황제의 조언자가 된 스클레로스는 뒷배를 믿고 게오르기오스가 이탈리아로 떠나있는 동안 아나톨리콘에 있던 마니아케스 가문 저택을 뒤지고 약탈했으며, 게오르기오스의 아내 테오파파를 유혹 내지는 겁탈했습니다.
그런 다음 로마노스 스클레로스는 콘스탄티누스 9세에게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헐뜯는 말을 하며 이탈리아 카테판을 교체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교활한 조언자의 말을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9세는 마니아케스를 대신할 새 카테판으로 파르도스를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9세로서도 그외의 이유가 있는데, 롬바르드인들의 지도자 아르기루스와 화해하려는데 게오르기오스처럼 현지인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것은 이후 협상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게오르기오스가 치를 떨었을 건 안봐도 뻔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를 더욱 화나게 했던 점은, 황제의 지령을 알리기 위해 오는 사신이 바로 로마노스 스클레로스 본인이었다는 것입니다.
1042년 9월 스클레로스가 타란토에 도착하여 게오르기오스의 해임과 수도 복귀를 명령하였을 때, 게오르기오스는 자기가 돌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투옥과 처형뿐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황제는 자기 애인과 스클레로스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고, 자기 아내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느냐 아님 저항하느냐 뿐이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로마노스 스클레로스 : 야 게오르기오스쉑ㅋㅋ 이제 여기서 꺼져ㅋㅋㅋ..... 뭐, 뭐야 다들 눈빛이 이상해..?
로마노스 스클레로스는 그 자리에서 게오르기오스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눈, 귀, 코, 입에다 똥을 채운 뒤 봉인되는 방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정적을 끔찍한 방식으로 죽인 다음 게오르기오스는 조정에 대한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한편 아르기루스는 반란군 영역 안에서 쓸쓸히 제국을 지지하고 있는 트라니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트라니는 동로마 지지를 버리지 않았다뿐이지 반란군에게 해를 끼칠 능력이 없었지만 아르기루스는 아마 후방 안전을 위하여 육군과 배를 동원해 도시를 둘러쌓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나무공성탑을 동원한 36일간의 포위전에도 트라니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인 1042년 10월 아르기루스에게 한 동로마인이 찾아왔습니다. 황제가 보낸 전령은 다시 동로마에 충성을 바친다면 콘스탄티누스 9세가 아르기루스를 용서할 것은 물론 파트리키우스 칭호와 높은 대우, 많은 금은보화를 약속했습니다.
생각보다 단단한 트라니와 위협적인 마니아케스 때문에 생긴 군사적 성공에 대한 불안감이나 커가는 노르만인들에 대한 경계심, 어쩌면 동로마 궁정 생활에 익숙해져 그것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르기루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금은보화를 받은 뒤 포위망을 불태우고 바리로 퇴각했습니다.
일단 아르기루스를 설득한 새 카테판 파르도스와 부관 투바키는 게오르기오스가 반란을 그만둔다면 사면하겠다는 황제의 추가 지령을 받고 오트란토에 상륙했다가 게오르기오스 군대에게 체포당했습니다. 파르도스가 마니아케스의 불충함을 비난하자 마니아케스 역시 파르도스를 비난하며 때릴 것맛냥 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질 했습니다.
파르도스는 주변 군인들에게 마니아케스 장군을 지지한다면 그들 모두가 위험해 처한다고 알렸지만 이미 그들은 자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을 일제히 무기를 들어 파르도스와 일행을 살해했습니다.
파르도스는 금인칙서를 가지고 온 상태였는데 그게 게오르기오스에게 보낸 것인지 아님 아르기루스나 교황에게 보낸 것인지 목적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선을 넘기로 한 게오르기오스도 금인칙서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1042년 10월 파르도스와 투바키는 게오르기오스에게 처형당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는 이마에 왕관을 썼고, 알바니아인과 바랑기아 근위대를 포함한 부하들은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남은 1042년 동안 게오르기오스는 노르만인, 프랑크인, 이탈리아인을 가리지않고 병력을 모았습니다.
기욤 : 와... 또 배신해? 롬바르드 놈들 못믿겠네.
한편 아르기루스가 반란군을 버렸다는 걸 알게된 노르만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아르두인, 아테눌프, 아르기루스같은 지도력있는 롬바르드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새로운 지도자는 바로 기욤 드 오트빌이었습니다.
선출된 기욤과 다른 노르만 지도자들은 살레르노 대공 과이마르 4세를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 즉 명목상 상위군주로 모시겠다고 하였고, 과이마르 4세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님 정복할 영지를 멜피 포함해 그들에게 하사하여 '공식적인 지배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노르만인들이 롬바르드인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이제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지만, 이 둘의 협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기욤과 노르만인은 아르기루스를 지지하는 롬바르드인과 게오르기오스가 있던 아풀리아 동남부보단 아풀리아 서부를 장악하고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진출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이곳들은 아르기우스와 게오르기우스의 치열한 대치상태가 벌어지던 아풀리아 동남부보다 약하고 만만한 곳이었을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르도스, 투바키, 로마노스 스클레로스가 살해당하고 5달 뒤, 1042년 2월 새 카테판으로 바실레이오스 테오도로카노스가 상륙했습니다. 그는 게오르기오스의 동료 장군이었고, 시칠리아에서 게오르기오스가 반역 누명을 쓰고 잡혀갈 때 같이 체포되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1043년 2월 테오도로카노스의 함대는 바리에 상륙하여 아르기루스와 합류했습니다. 그리스인과 롬바르드인은 서로 껄끄럽고 아르기루스도 아직 동로마의 귀환을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황제가 그들에게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반란을 진압하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게오르기오스는 그들보다 한 발 빨랐습니다. 오트란토에서 게오르기오스의 군대는 배를 타고 발칸 반도 서해안의 디라키온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추격에 실패했음을 깨닫았고, 같은 달 디라키온에 게오르기오스가 상륙하자 디라키온 군관구의 병사들은 게오르기오스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명성을 두려워했거나, 아님 그 밑에 있는 동족 알바니아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아했던 디라키온 테마군이 멀찍이 떨어진채로 지켜보고만있자 게오르기오스는 그들을 무시하고 테살로니카로 진군했습니다. 디라키온에서 테살로니카로 지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가도를 행군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디라키온 상륙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 9세는 다시 한 번 항복할 시 관대한 대우를 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지만 무시당했습니다. 황제는 첫번째 서신이 무시당했을 때부터 새롭게 시민들을 징집하고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스테파노스 페르가메노스, 혹은 페르가몬의 스테파노스라고 불린 환관 의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지만 이는 의아한 선택으로 여겨졌는데, 환관 페르가메노스는 그전까지 군사 경험이 없었고 병사들에게서 존경을 끌어낼만한 요소나 능력도 없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로보의 위치(현재 베고리티다 호수 Vegoritida)
두 군대는 발칸반도 서부의 오스트로보 호수에서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몇년 전 미카엘 4세가 불가리아 반군에게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곳도 여기였습니다.
1043년 오스트로보 전투는 페르가메노스 정부군이 숫적으로 우위였고 전투 역시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기오스가 직접 기병대를 지휘하여 정부군을 분쇄하는 활약을 선보였고, 반란군에선 게오르기오스를 황제라 부르며 칭송했습니다. 게오르기오스의 돌격에 정부군 전열이 뚫리자 페르가메노스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승리는 게오르기오스측으로 넘어왔으나 도망치던 잔당들을 추격하던 중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누군가가 게오르기오스의 가슴 혹은 오른쪽 옆구리를 활이나 창으로 상처입혔습니다. 게오르기오스는 상처로 인해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정부군 병사들은 이것이 마니아케스의 속임수나 함정이라 여겨 그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게오르기오스의 말이 달아나고, 주변의 경호대도 보이지않자, 정부군 병사들은 달려들어 게오르기오스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게오르기오스가 죽자 그의 군대는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반란군들은 도망치거나 항복했고, 승리한 페르가메노스는 수도에서 개선식을 올렸습니다. 대경기장에서 보인 행렬의 맨 앞에는 마니아케스의 머리가 장창에 걸려 있었고, 항복한 그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머리가 밀린채로 당나귀에 거꾸로 앉아 시민들이 던진 쓰레기를 얻어맞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반란군이 패배한 것에 대해 신께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실 1043년엔 황제가 감사기도를 올릴 일이 한번 더 있었는데, 하랄드 하르드라다가 준 정보를 통해 키예프 공국이 침공해오기도 했습니다.
바리에 도착한 아르기루스는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습니다. 몇 주에서 몇 달 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 콘스탄티누스 9세는 그에게 약속했던 것을 주었고,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파플라고니아의 공작'으로 임명한 뒤 이탈리아 제국군 사령관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게오르기오스의 반란은 끝났습니다.
7. 시칠리아 원정대의 후일담
이후로도 아르기루스와 오트빌 가문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하지만 노르만인들에게 여러번 운이 따랐고, 동로마와 교황청이 손을 합쳤음에도 전장에 합류하지 못해 패배한 치비타테 전투에선 교황이 노르만인들에게 사로잡히기까지 했습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구출해줄 것이라 믿으며 9달을 버텼지만 당시 신성 로마 황제도 독일 내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빠 결국 교황도 노르만인들의 남이탈리아 지배를 명시적으로 인정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치비타테 전투의 승리로 오트빌 가문의 가주이자 기욤, 드로고의 동생인 옹프루아 드 오트빌은 남이탈리아의 실권자가 되었고, 이 전투에서 로베르 드 오트빌이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동로마 장군이 된 아르기루스는 이탈리아 카테판으로 임명되어 6년 동안 남이탈리아에 노르만인이라는 또다른 압제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위해 노력했으나 그 역시 동로마의 정치적 스캔들에 엮여 카테판 자리에서 해임되기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카테판들과 협력하려고 노력했으나 동로마 정부에선 반역을 두려워하거나 카테판에 대한 신뢰가 없어 길어도 1년, 짧으면 몇달밖에 안될 정도로 자주 카테판을 교체하면서 남이탈리아 제국군 사령탑 유지가 제대로 안되었습니다.
결국 아르기루스는 로베르 드 오트빌, 일명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패배한 뒤 동로마의 끈도 떨어져 은퇴했고, 1068년 죽고말았습니다. 아르기루스가 죽고 3년 뒤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의 마지막 영토 바리를 함락하면서 남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는 사라졌고, 롬바르드인과 그리스인은 낯선 노르만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르기루스는 당시 남이탈리아인들의 정체성 혼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서, 롬바르드 독립 영웅 멜루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1살에 동로마로 끌려가 27년 동안 비잔티움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가 남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동로마 장군-> 롬바르드 반란군 우두머리 -> 동로마 장군이라는 갈아타기를 보여줬던 것도 아르기루스가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던 정체성 문제를 보여주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남들 보기엔 아르기루스가 이렇게 보였을 수도..
콘스탄티누스 9세가 이 글에서 다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긴했지만 실제로 그는 13년간 제위를 유지하면서 국내외로 생기는 물리적, 외교적 분쟁을 해결하느라 노력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제국의 안정기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조이의 나이가 많아 후손 문제는 그 또한 어쩔 수 없었고,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분쟁을 조율하는데 있어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얘기로 돌아오자면, 그가 설사 황제가 되었어도 얼마나 성공했을지 추측해봤자 소용없을 것입니다. 게오르기오스는 부하나 용병들을 부리는데 있어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비잔틴, 노르만,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자료들이 그를 가혹하고 무절제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이후 제국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살얼음판을 걸었는지를 생각하면, 평생을 상명하복의 군인으로 살아왔던 게오르기오스로선 황제가 되기보단 그를 아꼈던 로마누스 3세, 미카엘 5세가 안정적으로 왕조를 유지했었기를 바라는 게 더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 능력은 분명 대단했고, 텔루크, 에데사, 로메타, 트로이나, 시라쿠사, 타란토, 마테라, 오스트로보에서 벌어진 전투는 마니아케스가 전쟁에 있어서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 분명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는 용기, 냉정함, 무자비한 열정으로 선봉에서 싸웠고, 그 시대에서 가장 유능한 동로마 장군 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황제들의 박대에도 여러번 인내심을 보이고 충성했음을 생각하면, 안정적인 왕조에서 한 황제의 신뢰를 받으며 꾸준히 활동했다면 보이오안니스나 나르세스처럼 상당한 성취를 이뤘을 수도 있었겠지만, 11세기는 비잔티움의 결함이 드러나면서 군부와 수도 관료, 시민계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던터에 왕조들의 지속성도 떨어졌기에 그가 저지른 실책도 실책이지만 운도 별로 안좋았습니다.
그래도 게오르기오스가 남긴 흔적은 의외로 상당했습니다. 시칠리아 토후국에 입힌 막대한 피해로 이후 오트빌 가문의 노르만 군대가 시칠리아를 정복하는데 수월하게 만들어주었고, 그가 남긴 성당과 마을, 요새는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마니아체 마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건설한 산타 마리아 수도원. 마니아체에 가까운 브론테 마을에 있습니다.
근방엔 카스텔로 디 마니아체라는 복합주택단지도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귀족과 군주들의 비호로 성장했고, 1799년 나폴리 혁명 당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폴리 왕국을 도운 공으로 브론테 공작에 임명되면서 산타 마리아 수도원도 넬슨의 영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등장하신 호레이쇼 넬슨
이 곳의 복합단지가 이후부터 카스텔로 디 마니아체보단 두케아 넬슨 혹은 카스텔로 넬슨(넬슨 성)이라고 불렸는데, 사실 호레이쇼 넬슨 제독 본인은 브론테를 직접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모든 서명에 꼬박꼬박 브론테 공작 넬슨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현재도 시라쿠사에 위치한 카스텔로 마니아체, 번역하면 그냥 마니아체 성
시라쿠사에 건설했던 카스텔로 마니아체는 이후 지배자인 오트빌, 호엔슈타우펜, 아라곤, 합스부르크 시절에 점차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바로 앞의 네모난 건물은 원래 카스텔로 마니아체의 군인들이 머물던 막사였으나 지금은 카타니아 대학의 건축학부가 쓰고 있습니다.
Università degli Studi di Catania – Scuola di Architettura 구글 리뷰보면 학생들이 여름엔 시원하고 경치도 좋지만 더럽게 낡고, 비새고, 계단 위험하고, 겨울엔 춥다고 욕하더군요ㅋㅋㅋㅋ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남아있습니다.
반란이 실패한 뒤에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아내 테오파파와 아들 크리사포 마니아케스는 남이탈리아로 망명했고, 노르만족이 지배한 시칠리아 메시나로 이주해 여기서 가문을 되살렸다고 합니다. 이후 가문은 크리사포(Crisafo)에서 딴 크리사피(Crisafi)로 명명했고, 이후 시대가 지나 그리사피(Grisafi)로 불렸습니다.
1179년 메시나의 치안판사(스트라티코. 스트라테고스)가 된 조르조 그리사피부터 시작해서 많은 총독, 대주교, 랑구아글로사의 남작, 테라노바의 백작을 배출했으며 지금은 이민으로 멀리 퍼져 그리사피 성씨를 쓰는 사람이 이탈리아보다 미국에 훨씬 많아졌습니다.
이렇듯 의외로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흔적은 현대까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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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stor 저널 2개
마니아케스의 위대한 불운 : 1038년 시칠리아 침공
(THE INVASION OF SICILY IN 1038: MANIAKES' GREAT MISADVENTURE)
https://www.jstor.org/stable/48577902?read-now=1&seq=1#page_scan_tab_contents
비잔티움의 불운한 장군 :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Byzantium’s star-crossed general: George Maniakes
https://www.jstor.org/stable/48578337?seq=1
정복에서 실패한 반역으로: 전형적인 비잔티움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경력
From Conquest to the Failed Usurpation: Career of a Typical Byzantine Commander George Maniakes, Proslogion, 2016, vol. 14, pp. 171-185.
https://www.academia.edu/19830540
그리스인, 롬바르드인 그리고 노르만인: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아르기루스, 로베르 기스카르와 이탈리아 비잔팅움의 군대 정보
GREEKS, LOMBARDS AND NORMANS: GEORGE MANIAKES, ARGYRUS, ROBERT GUISCARD AND THE MILITARY CONTEST FOR BYZANTINE ITALY, 1030-1071
https://kupdf.net/download/maniakes-argyros-and-guiscard-the-contest-for-byzantine-italy-1038-71_58b45bd16454a7e028b1e8fb_pdf
위 4개를 주로 참고함. 특히 '그리스인, 롬바르드인 그리고 노르만인'이 내용이 매우 상세하여 잘 참고했습니다.
History of the Byzantine and Greek Empires
(공)저: George Finlay
https://books.google.co.kr/books?id=bHMpd8v97fUC&pg=PA474&lpg=PA474&dq=apomerman&source=bl&ots=c5l_eypboc&sig=ACfU3U1YyeiMcBly_o5_Cy5-z5VvuE1F9A&hl=ko&sa=X&ved=2ahUKEwjIguyGvLj2AhU1s1YBHQVWCsoQ6AF6BAgCEAM#v=onepage&q=apomerman&f=false
에데사 공성전 관련 참조
덤바르톤 오크스의 유물 검색.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의 기념주화.
Maniakes로 검색 시 다른 마니아케스 가문원들의 기념주화도 간략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음.
https://www.doaks.org/resources/seals/byzantine-seals/BZS.1958.106.3689
스킬리체스 연대기의 삽화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hapters_of_the_Madrid_Skylitzes
오트빌 가문들의 동상
https://statues.vanderkrogt.net/object.php?webpage=ST&record=frbn076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위키백과의 11세기 노르만, 롬바르드, 비잔티움 관련 항목
Norman conquest of southern Italy
George Maniakes
Arduin the Lombard
Argyrus (catepan of Italy)
Storia della Basilicata
그외 다양함.
그리사피 가문 관련 정보
https://www.heraldrysinstitute.com/lang/en/cognomi/Grisafi/idc/833920/
http://www.grifasi-sicilia.com/origininomegrifasigbr.html#cris
기타 자료
https://www.deviantart.com/hillfighter/art/Italy-and-the-Holy-Roman-Reich-194420393
https://www.deviantart.com/hillfighter/art/Reconquest-192972864
https://www.timemaps.com/history/italy-1215ad/
https://www.medievalists.net/2019/02/how-the-borders-of-italy-changed-in-the-middle-ages/
https://youtu.be/rthtdoPpRnk
https://www.deviantart.com/amelianvs/art/General-Georgios-Maniakes-511473167
출처사료로는 쓰기 뭣하지만 가볍게 읽기 좋았던 게오르기오스 소개글
https://allinnet.info/antiquities/george-maniakes/
https://eileenstephenson.com/lesser-known-11th-century-byzantines-part-3-george-maniakes/
https://byzantium.gr/battle.php?byzbat=c11_10
http://www.bestofsicily.com/mag/art42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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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면서 알았던 의외의 사실은, 감옥에 갇힌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를 풀어준 게 미카엘 5세가 아니라 조이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특히 비잔티움 제국 파플라고니아 왕조 관련 인물들과 노르만의 남이탈리아 정복 관련 항목들의 경우 영어보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위키백과 내용이 훨씬 풍부하고 참조 사료도 자세해서 깜짝 놀랐습니다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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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웹에도 동로마 게시판이 있었군요.
제가 인터넷 커뮤들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 다른 곳에서 제 글을 보신 분들도 있을텐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