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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르키에 대해 araboja (4)

4.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고대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이자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동방의 대도시인 안티오키아는 기독교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도시다.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으며 이 도시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도 바오로를 비롯, 여러 선교사를 파견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유대지역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초대 교회시기에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유대계 기독교인에 반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비유대계 기독교인들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과 함께 성 베드로를 자신들의 시초로 여기고 있으며 이로 인해 로마, 알렉산드리아 -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시초인 복음사가 마르코스는 성 베드로의 동료이자 제자다. - 와 함께 베드로의 후예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협력을 취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이집트 지역만을 관할하던 것에 반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아나톨리아, 시리아, 유대 등 동지중해 지역 대다수를 자신이 관할해야 했기 때문에 비록 서열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또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였던 안티오키아의 역사적인 내력은 이 지역을 알렉산드리아 못지않은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들과 함께 양대 학파로 정평이 났다. 그러나 이러한 안티오키아의 위상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천도와 함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천도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영향력이 상승한 반대급부로 기존의 동방 총대주교였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영향력은 급감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주교를 견제했지만 결국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구 승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 다음가는 명예상의 영예를 지니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또한 기존의 로마 다음가는 명예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내어주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합성론이 이단으로 정죄받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그보다 더한 피해를 받았다.


먼저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받으며 안티오키아 학파의 권위성을 훼손당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다시금 이단으로 정죄하며 쐐기를 박은 것이 첫 번째였고, 다음으로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를 총대주교구로 승격하여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 다음가는 명예상의 영예를 누리게 하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를 서열 4위로 밀어낸 것이 두 번째였다. 여기까지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똑같은 피해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을 총대주교구로 승격시키면서 기존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관할하던 구역의 상당수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기존의 아시아, 폰토스, 트라키아 관구를 관할구역으로 넘겨주고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는 오리엔스 관구의 일부인 팔레스타인 속주를 떼어주면서 이집트를 제외한 동방 대관구 전체의 기독교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졸지에 오리엔스 관구의 일부만 관리하게 되며 급속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총대주교로 승격된 것을 감안하면 졸지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명예와 실권 모두 잃어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가 그러했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도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오히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혼돈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에 비하면 매우 평온한 상황이었다. 이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기 수십년 전인 360년부터 극심한 혼돈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360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취임한 멜레티우스(360~381 재위)였다.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받고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국내에 아리우스파의 세력이 건재하던 와중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취임한 멜레티우스는 반아리우스주의를 선언했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동일본질이 아닌 유사본질로 보는 유사본질파 경향에 가까웠지만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인물이었고 이는 아리우스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아리우스파를 믿던 안티오키아의 기독교인들은 361년에 멜레티우스를 안티오키아에서 추방시키고 아리우스파 주교였던 에우조이우스(361~376 재위)를 자신들만의 총대주교로 삼았다. 이듬해인 362년에는 사벨리우스의 주장, 곧 양태론적 성향을 띠면서 동시에 삼위일체론적 성향을 띠던 파울리누스(362~388 재위)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옹립되며 순식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3명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375년에는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를 따르는 자들이 비탈리스(375 재위)를 총대주교로 옹립하였다.


이러한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분열은 결국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열게 만드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해당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 사벨리우스파, 아폴리나리스파를 다시금 이단으로 정죄한 후에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칼케돈 공의회에서 합성론과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다시금 혼란으로 빠지게 되었고 그나마 30여년 만에 비칼케돈파가 총대주교좌를 차지한 알렉산드리아와 달리 안티오키아는 수십년간의 혼란과 안정을 반복하다가 512년부터 아예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가 총대주교를 따로이 옹립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때, 비칼케돈파로 남아있던 자들은 오늘날 시리아 정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이 결국 해소되지 못한 상태로 안티오키아는 637년에 이슬람에게 점령되었고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 또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슬람의 치하에 접어들며 안티오키아가 지녔던 레반트 지역의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은 다마스쿠스가 차지하고 말았으며 시리아 지역의 중심지 또한 안티오키아에서 알레포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키아의 역사적, 종교적 중요성은 여전히 건재했기에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969년, 니키포로스 2세가 동방 원정을 감행해 킬리키아를 수복하며 이와 동시에 안티오키아를 수복했다.


이 이슬람 점령기간 동안 칼케돈파를 지지하던 일부의 기독교인들은 레바논 산맥에서 이슬람에게 저항하며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냈고 686년, 자체적으로 요한네스 마론을 자신들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마론파만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등장, 3명의 각각 다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공존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마론파 자체는 5세기경, 안티오키아 인근의 오론테스 강에서 은둔하며 수도하던 수도자 성 마론의 가르침을 따르던 자들에게서 유래)


이 후, 안티오키아는 동로마 제국과 투르크의 지배를 차례대로 겪다 제 1차 십자군 때, 타란토의 보에몽에 의해 점령되어 안티오키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이 시기에 로마가 다시금 기존의 4곳의 총대주교구에 라틴 총대주교를 임명하여 안티오키아에는 4명의 총대주교가 공존하게 되었다. 1182년에는 마론파가 서방 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과 일치를 선언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1724년에는 기존 정교회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정치적인 성향에 의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서로 각각 다른 인물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임명하며(라틴 총대주교도 존재) 정교회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기존의 정교회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와 멜키트 가톨릭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 나뉘게 된다. 1782년에는 시리아 정교회 소속 교인 중 일부가 친 가톨릭 운동을 벌이며 시리아 가톨릭으로 떨어져나갔고 이들이 자체적으로 안티오키아에 총대주교좌를 세워 6번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6명이 공존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1965년, 로마 교황이 기존의 총대주교구에 자체적으로 임명하던 라틴 총대주교직을 폐지하면서 5명의 총대주교가 공존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펜타르키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총대주교들이 공존하는 총대주교구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5명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모두 안티오키아에 거주하고 있지 않는 상황인데 이는 안티오키아가 번영을 누리게 해주었던 주요 요소였던 오론테스강이 토사가 쌓이며 수심이 얕아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데다 1268년,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키며 안티오키아 자체를 황폐화시켜 도시가 몰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5명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중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멜키트 가톨릭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다마스쿠스에 마론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레바논의 브케르키에 마지막으로 시리아 가톨릭 소속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착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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