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티크 프로 24를 2년 전에 사서 상당히 잘 썼지만, 이래저래 불편함 자체는 꽤 있었다. 꽤나 거대한 크기라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고 익스프레스키가 생각보다 쓸 데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적색 색감이 강해서 색상을 보려면 다른 모니터나 아이패드가 꼭 필요했다. 319만원짜리가 사놓고는 다른 도구를 필요로 하다니 참 얼탱이 없는 노릇이긴 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와콤 타블렛이 팬톤 컬러인증을 한 것을 보았다. 원래의 와콤이라면 배째라 니들이 색감 구리면 어쩔건데 할 놈들이었겠지만 요새 중국산 타블렛들 성능이 만만찮고, 심지어 색감이 신티크 프로보다 더 좋다는 놈도 간간이 나오는 만큼 고쳤을 것이라 보았다. 효율적인 단일 작업을 매우 염원하던 나는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넘어가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쇼핑몰에서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게 바로 이번에 사용기를 쓸 와콤의 최신 병기, 신티크 프로 27이다.
박스에서부터 신경쓴 티가 좀 나는 신티크 프로 27
< 점점 거세지는 경쟁에 대한 와콤의 응답 >
전작인 신티크 프로 16, 24, 32 시리즈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필기성능을 보여주긴 했지만 다들 나사가 하나씩은 빠져 있었다. 신티크 프로 16은 어도비RGB 94%라 했다가 개뻥 뽀록나서 망신당했는데도 배째다가 경쟁사에서 2021년 동급 제품 출시하니까 그제서야 리뉴얼했고, 신티크 프로 24,32는 어도비RGB는 만족하나 적색 색감이 이상해서 정확한 색상으로 안 보이는 나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분노의 와콤 신티크 프로 16” 사용기 및 클레임 진행기(1) : 클리앙 (clien.net)
만들기만 하면 나사빠지는 게 기본이었던 와콤
거기다 디지털 드로잉도구의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점 좋은 제품들이 많아지는데 와콤은 확실히 유니크만 할 뿐 돈값을 못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이패드 프로와 서피스 프로 8, 9는 화면이 작을 뿐 120Hz 주사율에 색상도 정확하고, 휴이온과 XP-PEN을 위시한 경쟁 액정타블렛도 성능을 상당히 따라잡아 신티크만의 영역으로 보였던 4K 터치 제품을 출시하는 판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신티크 프로 24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신티크의 부족한 기능을 보충한다는 면에서 언제든지 추월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준 게 아니었나 싶다.
ㅈ무위키의 그래픽타블렛회사 목록, 이 외에도 브랜드 엄청 많다.
개인적으로 신티크 프로 27은 치열해지는 디지털 드로잉도구 시장의 경쟁에 와콤이 응답한 결과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다른 회사로 끌고 가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던 것들을 모조리 흡수하고 내놓은, 와콤의 고민(?)이 담겨 있다 봐도 되겠다는 느낌이 드는 제품이었다(사실 고민이 아니라 응답 안하면 뒤질 거 같으니까 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 전혀 와콤답지 않은 변화, 와콤을 와콤답게 하다 >
신티크 프로 27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와콤 제품 중에서 변화가 가장 많은 물건이다. 내 기억에 원래 와콤은 이런 회사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도 발로 만들고 하드웨어도 어딘가는 나사빠져있고, 업데이트를 해도 하나만 고치고 나머지는 안 고치는 게으른 놈들이었고, 그저 펜과 타사대비 한두개 차별되는 기능 때문에 원탑인 계륵같은, 경쟁사에 상대적 우위만 점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이번에 보여준 변화는 전혀 와콤답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것도 거의 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 것들 하나하나가 워낙 디테일하였기에 쓰면 쓸수록 '이게 내가 알던 와콤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는 바꾼 디테일을 디자인/필기/영상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1. 디자인: 직관성과 편의성을 모두 잡아냄
제품 개봉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디자인일 것이다. 신티크 프로 27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을 준다. 베젤이 이전작에 비해 워낙 많이 좁아져서 내가 27인치 벽걸이모니터 주문했나? 하는 착각까지 들게 할 정도니까. 그만큼 잘 빠졌다.
뒷면도 와콤이 나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액정타블렛으로 그림그리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 손에는 키보드를 한 손에는 펜을 쥐고 열심히 작업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배치를 잘못하면 키보드로 작업하면서 손가락이 아픈 일이 종종 있다. 와콤은 그 부담을 덜기 위한 도구로 익스프레스 키 등도 고안해봤지만 복잡하기가 키보드랑 대동소이하다보니 오히려 그냥 키보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을 거다. 나도 그랬고.
그게 반영된 건지 이번에는 아예 신티크 프로 뒷면에 달고, 키 개수도 단순화되었다. 총 8개의 키가 있는데, 처음에는 꽤나 헷갈리지만 손에 금방 익게 되어 있더라. 익으니 그래도 펜 작업할 때는 나름 쓸만하게 이용하고 있다. 역시 이런 건 다양한 기능보다는 직관적으로 접근하기 편해야 쓰게 되나 보다. 다만 한 손에는 펜을 들어야 하다보니 한 쪽 익스프레스키는 역시 쓰기 어려우니 4개가 있다 생각하는 게 낫다.
좌우로 4개씩 있는 단축버튼. 의외로 쓰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새로 바뀐 프로펜 3도 신경을 쓴 부분이 보인다. 일단 버튼이 세 개로 늘었다. 워낙 2버튼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버튼 하나를 덜 쓰기는 하지만, 키보드로 자주 써야 했던 걸 펜으로 놓으니 품이 덜 들어 좋다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3버튼 체계로 개편된(개판 아님) 프로펜 3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인상깊었던 건 3버튼보다는 펜의 두께를 바꿀 수 있게 한 조립시스템이었다. 손 크기나 손가락 길이에 따라 완전히는 몰라도 적당히 맞출 수 있도록 거치대 안에 세트를 제공했고 버튼도 필요에 따라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워낙 펜 기본 무게가 가볍다보니 이에 대비해서 뒤에 넣는 무게추까지 제공한 디테일은 정말 와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게추 넣으니 얼추 프로펜2 무게 정도 되는 듯하더라.
일부러 요구하는 기능 한 두개씩만 넣던 디테일 생각하면 와콤다운 게 맞으려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서두...
거치대가 커진 대신 펜과 관련된 걸 모두 수납할 수 있다
굵기조절을 통해 손에 맞출 수 있다
펜뿐만 아니라 펜 거치에도 이번에는 신경을 좀 썼다. 예전에는 위에만 걸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는데 신티크 프로 27은 본인 취향에 따라 걸 장소를 좌, 우, 상단(좌우) 4곳을 택할 수 있다. 특별히 큰 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나 손이 가는 방향을 반영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겠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상단 좌측, 상단 우측, 우측, 좌측
신티크 프로 27용 스탠드 역시 예전 에르고 스탠에 비해 몇 단계는 발전했지만, 70만원짜리 별매품을 여기에 묶어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보이므로 적지 않는다.
2. 필기성능: 와콤의 대들보가 더 튼튼해지다
와콤을 아직까지도 1등으로 만들고 있던 요인인 필기는 여전하다. 아니, 이제서야 드디어 아이패드와 서피스를 제대로 앞질렀다.이전까지의 60Hz 응답속도에서도 정확하게 잘 필기되긴 했지만 아이패드나 서피스에 비해 쭉쭉쭉 그어지는 느낌이 부족했는데, 120Hz주사율 지원이 되면서 정확하면서도 쭉쭉 그어지는 느낌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사실 배터리를 쓰는 AES방식은 뭔 방법을 써도 와콤 프로펜 같은 EMR방식을 앞설 수가 없을 텐데 와콤의 게으름(?) 때문에 따라잡히던 격차가 다시 원점으로 벌어진 느낌이다.
정확도는 여전히 다른 타블렛과의 비교를 거부함
그리고 발열처리를 전작에 비해 강화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작대비 굉음은 덜 들리면서 그림그릴 때 열도 잘 안 느껴진다. 예전에 XP-PEN 썼을 때 온돌에 등 비비듯 열감 느껴지던 것 생각하면 꽤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는 원래부터 와콤이 강한 데였던 데다 더 강해진 것도 다른 태블릿PC에 있던 걸 흡수한 것에 가깝다보니 할 얘기가 별로 없다.
3. 영상 성능: 드디어 빠진 나사를 조이다
가장 의미가 많은 부분이다. 위에서 썼듯, 와콤 액정타블렛의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색감 관련된 부분이었기 때문이고, 이번에 신티크 프로 27을 산 이유도 바로 이 색감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부분을 와콤이 염두에 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신티크 프로 27에선 아예 하드웨어 단계에서 색상을 통제하게 하고 DCI-P3, AdobeRGB, PQ DCI, sRGB, EBU 등 12개의 컬러테이블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색상왜곡이 적은 세팅이 있었고, 와콤 액정타블렛의 고질병이었던 적색색상 왜곡을 드디어 안 볼 수 있게 되었다.
신티크 프로 27 내에 12개의 컬러 세팅테이블이 준비되어 있다.
예전에는 진짜 못 봐줄 정도로 적색색상 왜곡이 심했는데 이제는 다른 모니터 필요없이 신티크만으로도 작업하고 끝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아이패드 및 서피스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없는 수준까지 발전한 걸 보면서 이게 내가 알던 와콤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둘의 색상차가 좀 보이긴 하지만, 예전 신티크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상: 인쇄물과의 비교 / 하: 아이패드 프로 12.9 5세대와의 비교
그리고 적색색상 왜곡이 해결됐다는 것은 단지 색작업을 신티크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업을 위해 추가로 모니터를 구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면에서도 의미가 크고, 그 외에도 신티크가 영상 전반에서 의미있는 기기가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 신티크 프로 시리즈부터 원래 트루10비트 재현이라 적색왜곡만 빼면 꽤나 우월한 모니터로 쓸 수 있었는데 진짜로 이게 해결되니 넷플릭스 등을 통해 영상시청 시 의미있는 화질을 보여준다. 물론 영상감상에 470만원이나 들일 사람은 없겠지만, 타블렛 외에는 도무지 쓰기 어려웠던 신티크가 이 부분까지 제대로 감당해낼 수 있게 되었다니 격세지감이었다.
적색왜곡이 해결되니 영상감상에도 적합
4. 변화의 의미: 상대적 강자에서 절대적 권위자로
이처럼 신티크 프로 27에 찾아온 수많은 변화는 와콤의 빠진 나사를 조이는 것을 넘어 와콤을 상대적 강자에서 예전과 같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절대적 권위자로 되돌려놓는 수준의 의미를 지닌다
디자인 일신, 120Hz 주사율, 펜 업그레이드, 색상 정확도 향상 등 신티크 프로 27에서 한꺼번에 찾아온 변화는 와콤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어설픈 1등이 아닌 명실상부한 절대적 강자이자 액정타블렛 업계의 황제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황제는 완벽하지도 않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
그러나 황제라 하여 항상 완벽한 일처리와 훌륭한 인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듯, 신티크 프로 27 역시 최강의 제품이라 해서 완벽한 건 아니다. 이전에 있던 좋았던 점이 사라진 것도 있고, 없던 문제점이 생긴 것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컴퓨터로서의 편의성이 사라진 것이다. 과거 신티크 프로 시리즈는 익스프레스 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좌우에 USB3 포트가 달려 있어서 파일을 옮기거나 핸드폰 충전을 할 때 꽤나 유용하게 썼는데, 신티크 프로 27은 USB관련해서는 컴퓨터와 신티크 사이 데이터를 보내는 기본포트 외에는 어떤 확장성도 없다. 긍정적으로 찾아온 변화에 비하면 매우 소소하지만 분명 아쉽긴 하다.
이전 신티크에는 없었다가 추가로 생긴 문제도 있다. 펜이 너무 민감해서 생기는 것 같은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리다 지우개로 전환해서 지우면 프로그램에서 작업 하나로 인식해버린다. 작업별로 구분해서 실행취소하는 게 중요한데 처음에는 이렇게 안 끊어지고 작업되다보니 당황하기도 했다.
사실 기능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괜히 절대적 강자, 황제같은 강한 표현을 썼겠는가? 대단한 물건인 건 분명하기에 그런 것이다.
문제는 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치르는 값인데, 정말 말이 안 나온다. 신티크 프로 24터치도 당시 319만원으로 꽤나 부담가는 가격이었는데, 이 놈은 467만 9천원으로 거의 500만원에 가까운 수준이다. 스탠드까지 추가하면 530만원 가까이 지불해야 하는데, 아무리 추가 모니터가 필요없어졌다지만 해도 너무한 가격이다.
신티크 프로 27 x 3대 = 캐스퍼 1대
내가 신티크 프로 24 중고로 처분하고 회사 복지마일리지 쓰고, 어도비 유료회원이라 교육할인 받아서 부담을 최소화했는데도 허리가 휠 지경인데, 이걸 쌩돈으로 구매하기에는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때문에 이놈은 진짜 이걸로 업 하는 사람 아니면 절대 추천할 수가 없다.
이전 프로 24까지야 어찌어찌 돈 좀 모았으면 무모한 도전으로 샀겠지만 이건 무모한 도전이고 뭐고 접근성 자체가 넘사벽이다. 가히 자금성 입구에서 청나라 황제한테까지 가는 길만큼 멀고 험하다...
그래서 신티크 프로 27은 이런 의미로든 저런 의미로든 황제라는 수식어가 참 걸맞는 제품이다.
< 불만은 없긴 해... 없긴 하지... >
내가 컴퓨터 관련기기에 관심이 많다보니 수많은 디지털가전들을 살펴보고 리뷰했는데 이처럼 한 위치에 절대적이라 생각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 것들은 분명 강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를 위해 희생한 결점이 분명히 보이던 반면, 신티크 프로 27은 자잘한 결점이나 나사빠진 것조차 잘 안 보였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만큼 돈을 들였기에 절대적인 거 아닌가도 싶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까지 사용하면서 불만이 안 생기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얼마 전에 와콤 공식 쇼핑몰에서 전화가 왔었다. 그 때 제품 잘 사용하고 있냐고 직원이 물어보았는데, 그 때의 내 시니컬한 대답이 아마 신티크 프로 27에 대한 모든 느낌을 함축하지 않을까 싶다. 뭐라 하고 싶은데 뭐라 할 수가 없는 그런 느낌 말이다.
"비싼 값은 하네요"
읽는데 지루하지 않았길. 어차피 이 제품은 살 사람은 살 테고, 이런 리뷰 쓴다고 구매에 영향을 줄 가격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