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혀진 한국의 청구권 : 일본과 한국이 국교를 수립을 하는 데 있어서, 한일 기본조약을 채결을 하여, 부수적인 청구권 협정에서는, 일본이 거
액의 경제 지원을 실시했고, 그 대신에, 한국의 국가와 민간의 법인, 개인이 가진 대일 청구권을 파기하는 것이 약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청구권의 논의를 뒤집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위안부에 보상을 하도록 일본 정부에 요구를 한 것 입니다. 한국의 정치단체가 서울에 있는 일본 대
사관에 위안부상을 세웠고, 세계의 많은 도시에도 차례대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센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위안부상에는 몇 십
만명의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노예가 되었으면 그 대부분은 목숨을 잃었다는 설명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의 여성을 강제 연행을 한 사실은 없고, 또 그녀들은 보수를 받아서 일을 했습니다. 또, 일본군이 그녀들을 종군기자와 종
군 간호부 처럼 종군을 시켜서, 전장을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들은 대부분이 사망을 한 사실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반하는
것이 세계에 선전이 되어, 한국으로 부터 사죄와 배상을 청구 받게 된 것은, 한 명의 일본인이 한 거짓말이 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일본
군의 명령에 의해 조선 여성을 강제 연행을 하여 위안부로 하거나 하는 걸, 1977년에 요시다 세이지가 경험담을 했다고 하는 자작의 기술을 했습
니다.
당초, 요시다의 증언은 한국에서는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3년에는, 일본군이 관련이 되어있다고 한 것은, 신문에서 보도를 한 것이,1983년에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 증언을 기사로 해서, 그 저작을 소개를 한 것을,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크게 다뤄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1년에 옛 위안부라고 밝힌 김학순씨가, 같은 해, 도쿄 지방법원에 보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제소하여 (뒤에 기각)그 후, 몇 번의 소송이 일어났
습니다. 1993년에는,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것을 일본정부가 공식으로 인정하여, 사죄를 한 고노 담화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시다 증언은 결정
적인 모순이 몇 가지나 지적이 되어, 1995년에 요시다씨 스스로가 증언이 창작이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요시다씨는 다음해의 주간지 인터뷰
에서 책에 진실을 쓰더라도 이익도 없다, 진실을 숨기고, 자신의 주장을 섞어서 쓰지 않으면, 신문에 조차 실리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수정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2011에는 최초의 위안부상이 세워졌습니다. 아사히 신문의 기자는, 요시다씨의 허위의 증언을 사실이라고
오인해서 게재를 한 것으로, 오보였습니다.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 증언의 기사를 삭제한다고 발표한 것은, 2014년의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