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선조 28년 말에서 선조 29년 초, 즉슨 을미년에서 ㅂㅅ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조선의 관원 신충일이 통사 나세홍과 하세국, 만포진의 노비 강수, 본인의 노비 춘기등과 함께 건주 퍼 알라로 향했다. 그것은 조선 조정 차원에서의 외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 신충일은 당시 건주의 버일러였던 누르하치와 슈르가치등을 만났고 그의 휘하 관료인 마신, 동양재, 공정륙등과 만나 외교적 사안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1
이 때 신충일이 마신, 공정륙등의 건주 관인들과 의논한 사안 중 하나는 건주와 조선간 국경 인근에 대한 진지 구축 사안이었다. 이는 건주측에서 조선측에게 제안 혹은 통보한 사안이었는데, 건주-조선 국경 인근에 진지를 구축하여 그 곳을 통해 건주-조선 국경을 넘나드는 도강자들을 감독하여 그로서 서로의 민간인들이 국경을 침범하는 사안을 해결하고 오해를 종식시키자는 취지였다.
물론 건주로서는 '도강자 감독'의 논지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도강자들에 대한 감시 역할뿐 아니라 실질적인 군사적 용도 역시도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요컨대 조선과의 국경 분쟁이 발생할 시 해당 진의 병력으로 1차적인 대응을 할 것을 상정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신충일에게 진을 설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마신과 공정륙,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신충일에게 이야기를 꺼내게 한 그들의 군주 누르하치는 어디에 진을 설치하고자 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술된 신충일의 대 건주 외교 임무 보고 사안을 살펴보면 이 때 신충일은 마신과 공정륙이 운산 건너편에 진을 설치하여 도강자들을 감독하고자 한다고 했다.2
그러나 지리적으로 살펴보자면 운산은 조선과 건주의 국경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지역으로서 이 곳의 건너편에 진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즉 건주가 운산 건너편에 진을 설치하고자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술은 신뢰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건주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운산이 아닌 다른 지역과 마주보는 지역에 진을 설치하고자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실마리는 건주기정도기와 연경재전집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건주기정도기와 연경재전집에는 혜산의 건너편에 진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마신의 언급이 서술되어 있다.3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운산 기술과는 다른 기술인 동시에,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기술이다. 혜산은 실제로 얄루강 골로 지역을 점령한 건주와 맞닿은 조선의 진이었고, 국경 파수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루 미루어 볼 때 건주는 아마도 혜산진의 건너편인 압록강의 건주측 영토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 곳을 통해 국경을 넘는 월경인들을 감시하는 동시에 조선의 파수부대와 대치하여 유사시를 대비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선조실록의 선조 29년의 기사를 살펴 보면 운산쪽에 건주의 군대나 월경인들이 들어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혜산쪽에서는 건주측의 움직임이 왕성히 감지되었다. 건주측의 군대가 혜산 인근에서 정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올라오기도 했고4나아가 실제로 건주측이 혜산 건너편에 요새를 쌓는다는 정보 역시도 올라왔다.5
이러한 정보들의 추합으로 보건대 누르하치가 성을 쌓을 것으로 고려, 계산한 지역이자 마신과 공정륙이 실제로 신충일에게 성을 쌓을 것으로 제안/통보한 지역은 운산 건너편이 아니라 혜산 건너편으로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혜산이 아닌 운산으로 해당 지명이 오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지명에 익숙치 않은 마신과 공정륙이 지역의 명칭을 잘못 말했고 그것이 실록에 기록되었으며, 건주기정도기나 연경재전집은 그것이 바로잡아져 혜산 건너편으로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한자의 유사성 때문에 잘못된 문자가 실록에 기입되었다는 것이다.
운산에 쓰인 한자인 운(雲)과 혜산에 쓰인 한자인 혜(惠)는 그 형태가 일견 비슷한 부분이 있다. 덕택에 두 한자가 혼동되었고, 혼동된 상태로 본래 혜(惠)라고 기입되어야 할 한자가 운(雲)으로 오기되었으며 그 상태로 실록에 혜산이 운산으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논지인데, 전자보다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사료되며 필자 역시도 이 쪽의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누르하치가 마신과 공정륙을 시켜 신충일에게 알렸던 '건주의 진보 설치 위치', 그리고 조선측에 통보한 진보 설치 위치는 실제로는 운산 건너편이 아니라 혜산 건너편으로 판단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정황과 사료들을 통해서 검증이 되는 바이므로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1.이 과정은 지난 글인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45376,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74953 참조
2.『선조실록』 선조 29년 1월 30일 정유
3.『연경재전집』권 50 건주기정, 我國設一鎭於惠山堡相瞭望處. 『건주기정도기』欲設一鎭於惠山越邊, 以遏境賊胡, 如何. 단 장정수의 논고에서는 두 사료에 모두 운산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각주가 존재한다. (장정수, 「2016, 16세기 말_17세기 초 朝鮮과 建州女眞의 배후 교섭과 申忠一의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25, 한국인물사연구회, p.157. 판본상 문제로 생각되나 여기서는 혜산으로 기재된 문서를 기반으로 삼는다.
4.『선조실록』선조 29년 음력 2월 27일 갑자
5.『선조실록』선조 29년 음력 3월 25일 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