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남한산성
1618년 음력 2월서부터 누르하치와 그의 통치하 후금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누르하치는 이미 1달여전인 1618년 음력 1월에 명나라와의 전쟁을 올해 안에 실행할 것을 버일러들과 신하들에게 통지했으나 그것은 단순 정확한 시기가 약정되지 않은 거시적 기약이었다면, 음력 2월서부터는 실제적으로 근시일내에 명나라와 충돌하기 위한 물자, 전투부대 마련에 들어간 것이다.
누르하치의 뜻에 따라 전쟁준비에 들어간 후금이었으나 이 시기의 후금은 전쟁준비를 대놓고 진행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기습 공격을 상정했는데, 대놓고 전쟁을 준비하다가 자칫 명나라에 정보가 노출된다면 선제/기습공격의 효과가 크게 반감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외부인, 심지어 후금의 백성들 마저도 당장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모르도록 버일러들의 마굿간을 새로 건설하기 위해 목재를 벌채한다는 명목으로 목재를 대량으로 벌채하게 했다. 물론, 그 실목적은 공성병기를 제작하기 위함이었다.
음력 2월까지는 이렇게 후금 국내에 대한 내부단속 역시도 진행되었으나, 음력 3월서부터는 후금금 내부에 대해서는 정보통제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음력 3월은 전쟁을 시작하기 약 1달여 전에 불과했으므로, 이제 후금의 백성들과 병사들 역시도 전쟁을 본격적으로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코 앞에 둔, 예컨대 출병 며칠 전에야 전쟁을 일으킬 것을 포고한다면 후금군과 백성들로서도 그러한 사실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내부적인 갈등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 선포 약정일에 지나치게 가까워 사기를 하락시킬 시점도 아니고 전쟁 선포로부터 지나치게 일러 정보가 샐 수 있는 시기도 아닌 음력 3월을 본격적인 정보단속 해제 시기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후금군은 이 시기서부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상태가 좋지 않은 병장기들을 수리하고 말들을 살찌우라는 포고를 내려 직접적으로 전쟁이 코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렸고, 병사들은 그 지시에 따라 자신들이 다룰 병기들을 수리하고 말들을 배불리 먹이기 시작했다.1
내부적으로 병사들이 준비가 되는 동안, 후금을 향한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 진행되었다. 음력 3월 10일, 누르하치는 이전에 공성사다리를 만들기 위해 벌채한-명목상으로는 마굿간을 건설하기 위해 벌채한 목재들을 혹여 명으로부터 파견된 선유관이나 통사가 발견하고 미심쩍음을 느낄 것을 염려하여 해당 목재자원들을 대외적 명목인 마굿간 건설에 실제적으로 가용토록 했다.2
그러한 작업은 후금으로서는 꽤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사용하지도 않을 마굿간들을 위장을 목적으로 건설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후금이 벌채목에 관한 정보를 숨기는 방안중에는 더 편한 방안도 존재했다. 예컨대 해당 벌채목들의 존재를 후금을 방문한 명의 선유관이나 통사들에게 들킨다면, 후금 정부 차원에서 마굿간 혹은 집을 건설하기 위해 벌채한 나무라고 공언하며 그들을 속이는 방안도 있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신중함의 발로였다. 당시 요동아문의 경우 후금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속임수를 쓰더라도 자칫 한 번 시작된 의심이 불처럼 번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애초에 선전한 명분대로 벌채한 목재들을 마굿간 건설에 사용하여, 비축된 목재들을 소모하고 마굿간을 건설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서 의심 자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물론 애초에 해당 목재들은 공성병기들을 제조하는데에 쓸 재원이었으므로, 누르하치가 건설을 명령한 '마굿간'들이란 가설의 조립식 마굿간으로서 유사시 곧바로 해체가 가능한 임시용 마굿간들이었을 것이다. 전쟁 직전까지는 마굿간을 유지하다가, 전쟁이 코 앞에 다가온 시점에 해당 마굿간들을 해체하고 그 목재들을 이용하여 공성사다리 혹은 방패차를 제조하는 것이 바로 당시 누르하치가 생각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보 유출 차단은 비단 위와 같은 방식의 통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누르하치는 후금인들이 자신의 허가 없이 외부세력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중지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누르하치는 자신이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넘긴 대상, 조선에 대한 후금인들의 접근을 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까지도 조선은 후금의 서신에 대해 회답을 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누르하치는 조선을 전쟁을 벌이기 전 조기(早期)에 포섭하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 것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후금의 동정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조선에 계속해서 넘겨줄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은 그 때 까지 후금의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를 명에 보고치 못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누르하치가 우려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계속해서 정보를 넘겨준다면 조선에 의한 위험부담은 계속해서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정보 유출을 일으킬 공산이 있는 사적인 외부 세력 접근을 차단했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도 후금 조정이 직접적으로 다시 서신을 보내기 전 까지 후금의 내부 사정이나 후금의 당사자 입장과 같은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다.3다만 후금인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들은 그러한 통제를 벗어나 조선에 접근해 온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누르하치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그렇게 후금 내부에서 전쟁 준비가 한참 진행되는 와중에, 내부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한 상황이 얼마간 이어졌다. 그 때문에 역설적인 평화가 얼마간 유지되었다. 그 평화는 17세기 동아시아를 격변으로 치닿게 할 전쟁이 일어나기에 앞서 존재한 불편한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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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3월
2.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3월 10일
3.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음력 5월 22일, 음력 5월 26일, 5월 28일
4.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윤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