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영화 남한산성
1618년 음력 1월 누르하치는 후금의 버일러들과 암반들에게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며 전쟁의지를 고취시켰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월에는 이전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동해 여진계 암반들의 후금 정착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누르하치 본인의 의지에 의한 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후금에 정착한 암반들을 따라온 이중에는 이전에 누르하치를 상대로 일어난 동해 여진계 세력들의 반란의 중심인물인 ㅂㅈ리 역시 존재했는데, 누르하치는 그를 용서하며 그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털옷과 말을 내주어 환영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계산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ㅂㅈ리는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킬 생각따윈 하지 않고 후금의 관료가 되었다.
1618년 음력 2월에 후금에 도착한 동해 여진계 암반들과 그들의 식솔들, 백성들 1백여호를 후금에 정착시킨 뒤, 누르하치는 음력 1월에 이어 다시 한 번 명나라에 대한 전쟁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명나라에 대해 내가 품은 원한으로 일곱 가지의 큰 원한(nadan amba koro)이 존재한다. (큰 원한만 일곱 개인데) 작은 원한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명나라를 정벌하자.'고 하였다.1 음력 1월에 있었던 '전쟁의지 천명'이 '올해에 명나라와 전쟁을 할 것이다.'는 거시적 기약이었다면, 음력 2월의 '전쟁의지 천명'은 전쟁을 일으킬 시기를 근시일로 잡고 이제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후금의 기록상에서는 여기서 처음으로 '칠대한'이 언급된다. 7대한이란 당시까지 건주/후금, 그리고 누르하치가 명나라에게 피해를 입은 불미스러운 일 7개를 정리하여 전쟁의 대의명분으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이 명군에 의해 피살된 것을 필두로, 누르하치가 1583년 거병을 한 뒤서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원한들이 망라되어 있다.2
그러나 후금의 기록상에서 이 때에 처음으로 칠대한이 언급된다고 하여 누르하치가 이 때에야 칠대한을 최초로 정립하여 언급한 것은 아니리라고 판단된다. 1617년 후반기 그가 몽골계 세력들과 조선에 보낸 서신에는 칠대한/혹은 그 원형이 언급되었으리라 사료된다. 특히 몽골계 세력에 보낸 서신은 확인되지 않으나 그가 조선에 보낸 서신은 조선측 사료에서 단편적으로나마 확인이 되는데 여기에 칠대한에 언급되는 명분들이 기록된 것이 확인된다.3그러므로, 칠대한의 정립 자체는 1618년 음력 2월 이전에 시도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1618년을 전쟁선포시기로 잡은 이상 좀 더 상황을 지켜볼 법 함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가 상당히 빠르게 전쟁 준비에 들어간 것은, 그 시점까지 자신이 일으킬 전쟁에 동참할 것을 독려한 몽골계 세력들(칼카 5부, 차하르)로부터 긍정적인 답장을 받았기에 그 이상 다른 몽골계 세력들의 참여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데다가 혹여라도 조선이 자신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명에 알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누르하치는 지난 1617년 음력 12월에 조선에 자신이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사실과 이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는 요구를 담은 서한을 발송했다.4 누르하치로서는 서신을 발송할 때까지만 해도 조선이 지금까지의 조선-후금간 관계가 명나라에 노출될 것을 염려하여 명나라에 자신이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근시일내에 알릴 가능성은 적다고 보았던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하여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도 당시(1618년 음력 2월)에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후금이 먼저 조선과 명나라간 공조체제를 이간시키기 위해 서한 발송 사실과 지금까지의 조선-후금 관계를 노출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후금과의 교역/배후교섭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후금의 서신을 수신한 문희현을 빠르게 조사하고 후금의 전쟁준비 사실과 그에 관련한 서신을 보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5
비록 여러 문제로 인해 전쟁이 실질적으로 발발하기 전까지 조선이 후금이 보내온 서신을 명나라에 알리는 일은 없었으나, 누르하치로서는 이상의 사례와 같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되도록이면 빠르게 전쟁을 준비, 시작하여 명나라가 자신의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를 조선의 정보제공으로 말미암아 파악, 미리 대응태세를 갖추거나 역으로 공격해 오는 상황을 방지코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음력 2월부터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자신의 휘하 버일러들과 암반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이 시점의 누르하치는 대놓고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이 때 누르하치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내외부로 드러날 것을 경계하여, 실제로는 사다리를 만들기 위한 목재를 벌채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외포고로는 마굿간을 건설할 나무를 베게 하라고 하였다.6이 작업에는 7백여명이 투입되었다.
누르하치의 이러한 조치는 내부에 존재하는 간자나 배신자들이 후금의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를 명나라에 전달하거나, 혹은 외부의 명나라 상인 혹은 관리들이 이 정보를 파악하여 명나라가 후금의 이상조짐을 파악할 것을 경계한 행동이었다. 동해 여진 원정을 준비한다는 식으로 위장할 수도 있었겠으나, 애초에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을 하는 편이 의심을 살 일이 더 적었다.
즉 전쟁준비에 막 들어간 시점인 2월까지는, 후금내부에서는 최소한 버일러들과 고위급 군사지휘관들만이 전쟁 준비와 향후의 전쟁 대상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누르하치가 초기 작업에 7백여명의 인력만을 투입한 것 역시 정보의 차단과 관계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7백여명이라는 숫자는 전쟁에 쓰일 물자를 확보하는 작업에 투입하는 인력 치고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인력을 작업에 투입하면 내외부에서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공표한 이유인 '마굿간 건설에 필요한 원자재 확보'에 합당한 수준의 병력만을 통해 초기 작업을 진행하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지나치게 적은 숫자도 아니었기에,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2월
2.7대한에 관하여서는 후의 글에 보다 자세히 서술
3.비변사등록 광해군 9년 음력 12월 무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3월 5일.
4.비변사등록 광해군 9년 음력 12월 무일
5.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음력 2월 22일
6.만문노당 앞과 동일, wan arara moo sacire be geren be ulhirahv seme, beisei morin horire heren arara moo saci seme hvlafi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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