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5년서부터 1617년까지, 여진 세력인 건주/후금1 세력과 몽골계 세력인 코르친, 특히 코르친 좌익은 일정한 주기마다 내조 및 교역관계를 가졌다. 해당 내조 및 교역관계는 주로 코르친 좌익의 왕공과 그가 이끄는 사신단이 후금의 허투 알라를 방문하여 누르하치를 알현하고, 이후 코르친측이 물자를 제공하면 건주측에서 그에 상응하는 다른 물자를 제공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코르친의 경우에는 주로 말을, 건주측에서는 갑옷과 옷감을 제공하였는데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하는 물자와 필요물자의 수요를 감안한 바에 따른 교환이었다.
이러한 내조교역에서 주로 후금이 갑의 위치에, 코르친의 을의 위치에 있었다. 세력의 규모 차이도 있거니와 코르친으로부터 파견된 이들 역시도 왕공이긴 하지만 누르하치에 비해 현격히 아래의 위치에 존재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코르친 좌익의 수장급이었던 밍간이 방문한 정사년(1617) 음력 1월의 코르친측의 방문의 경우에는 누르하치와 밍간이 동격의 예를 표하며 만났다.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로부터 100여리 떨어진 곳에서 몸소 밍간을 맞이하였으며 서로간의 인사 역시도 말 위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는 코르친 좌익의 수장인 밍간을 자신과 동격으로 예우하며 코르친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당시 위태로웠던 후금의 국제관계 형국을 보다 긍정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누르하치의 방편이었다.2
이를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코르친 사절 내방연월일 |
방문자 |
방문자의 위계 |
코르친측 제공품 |
후금측 제공품 |
비고 |
만력 43년(1615) 음력 9월 |
상가르자이 |
코르친 좌익 왕공 밍간의 사남 |
말 30 마리 |
갑옷 10벌, 비단 및 면포 다량 |
결혼등의 외교안건 해결 목적이 아닌 최초 우호내방 |
만력 43년(1615) 음력 10월 |
일두치(통고르) |
밍간의 장남 |
말 40 마리 |
갑옷 15벌, 비단 및 면포 다량 |
상가르자이의 방문과 연계 |
천명 원년(1616) 음력 12월 |
하탄 바투루 |
밍간의 차남 |
말 40 마리 |
일두치의 예와 같음 |
밍간의 방문과 연계 |
천명 2년(1617년) 음력 1월 |
밍간 |
코르친 좌익 왕공, 수령 |
낙타 10 마리, 말 100 마리, 소 100 마리, 낙타 세 마리 분량의 융단직물, 수레 13대 분량의 고기, 수레 두 대 분량의 건락과 기름 |
40호의 사람(아하 추정) 이주, 갑옷 40벌, 비단 및 면포 다량 |
최대규모 무역, 최대규모 사절 방문, 최대규모 예우 |
천명 2년(1617년) 음력 12월 |
바트마 |
밍간의 오남 |
말 50 마리 |
? (갑옷과 비단, 면포로 추정 또한 코르친을 포섭키 위해 기존보다 더 많은 물자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 |
대명전쟁 시작전 기록상 마지막 내방교역 |
*1615년의 경우 누르하치의 겅기연 한 즉위 전이나 편의상 건주가 아닌 후금으로 칭함
**해당 도표는 [훅금 건국사]의 코르친 관련 글을 복기하는 동시에 실록, 만문노당을 참조하여 도표로 재가공
***1616년 겅기연 한 즉위 이후 누르하치가 천명 연호를 곧바로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으나 해당 도표에서는 청의 연호원칙을 따라 천명 연호로 표기함
해당 도표를 보자면, 한 번 파견되었던 왕공은 다음에 다시 파견되지 않았다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코르친 좌익으로서 여러 왕공들을 폭넓게 후금과 접촉시킴으로서 외교적 의도를 쉽게 읽히지 않고, 또한 다수의 왕공들을 후금에 파견하여 해당 왕공들과 후금 왕공들간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1.이하부터는 후금으로 통일하여 호칭. 1615년은 누르하치가 겅기연 한으로 즉위하기 전이나 국가호칭을 통일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