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국가 후금에서는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는 것을 덕목이자 전공의 일환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이러한 경향은 후금이 건국되기 이전의 건주 여진세력에서부터 유효했다. 누르하치의 휘하 장수 어이두가 1587년 군대를 이끌고 바르다를 함락하러 갔을 때에 그는 수 명의 구추만을 대동하고 바르다에 야습을 가하여 교두보를 확보코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무려 50여군데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등의 분전을 치루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하고 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이두의 분전과 그의 많은 부상은 누르하치에게 큰 인상을 주는 동시에 상무의 정신이 강한 건주에서 대단한 전공근거로 취급되었고, 성을 함락한 것과 더불어 기록에 남았다. 이로 인해 어이두는 '바투루'칭호를 수여받았다.1
누르하치 본인이 적들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당한 것에 관한 기록도 기록에 여럿 남았는데 이 역시도 그가 수많은 부상을 입은 것을 통해 용맹히 싸웠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1586년 음력 7월 누르하치가 본인의 원수 니칸 와일란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던 올혼을 공격할 당시, 그는 성으로 미처 도피하지 못한 피난민들과 병사들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숙적 니칸 와일란이 도주하려는 줄 알고 그들을 단신으로 추격했다. 그 이후 누르하치는 단신으로 그들과 교전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30여군데의 상처를 입는 대신 아홉명의 적병을 죽였다.2 여기서 누르하치가 상처를 입은 것이 강조되는 것은 적들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것이 잘 못싸웠다는 근거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을 정도로 용맹히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러한 기조는 후금이 건국된 뒤에도 유지되었다. 후금에서는 병사들이 전투에 나서서 부상을 입은 것이 전공 판단의 주요 근거로 작용했고 그 부상 정도에 따라서 포상을 하여 병사들이 전장에서 용맹히 싸우도록 독려하는 동시에 부상을 입은 자들이 해당 포상을 통해 본인들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다시 전열에 서게끔 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대해 7대한을 고하고 1차 원정을 단행할 당시의 포상에서도 병사들과 장교들이 제각각 세운 공에 더불어서 부상 정도 역시 고려 대상이었다. 무순 전투가 끝난 뒤 기야반 지역에 숙영지를 설치한 누르하치는 그 곳에서 부상이 작은 이에게는 작은 상을, 큰 이에게는 큰 상을 주었고 전사자에게는 부상자들보다 큰 상을 주어 전사한 병사의 가정이 장정 피해를 추스르는 동시에 차후의 전쟁에 병사를 내보내는 것을 꺼려하지 않도록 독려했다.3
무순 전투에서 거의 곧장 이여진 요동총병 장승윤과의 시여리 전투에서도 부상자는 여럿 발생했다. 그 전투 이후에도 누르하치는 복귀전 포상을 단행하여 큰 부상을 입은 이에게는 큰 포상을, 작은 부상을 입은 이에게는 작은 포상을 내주면서 '부상'을 전공으로 다루었다.
1619년 음력 6월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상유 역시 이와 결부되어 있다. 누르하치는 거런 어전4에서 니루 어전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한 지휘관들에게 전쟁에서 병사가 힘써 싸우는 것을 감독하며 그들이 전쟁에서 힘써 싸우는 것을 유심히 살피라고 하였다. 이 때 누르하치는 전장에서 멀리 서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부상을 입은 자는 (힘써 싸우는 대상으로) 고려치 말라고 지시를 하는 동시에 거짓으로 포상 대상자를 추천치 말라고 하였다.5 이는 각 지휘관들이 병사들이 전장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는 것을 감독하고 그에 따라 포상대상으로 선정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금에서 장수들의 공적과 직위를 기록한 칙서에도 부상에 따른 전공의 기입이 명시된다. 누르하치 시기에 지급된 해당 칙서는 주로 만문노당 천명 9년 기사에 기입되어 있는데 최고위 암반들에서부터 하급의 지휘관들에까지 다양한 사례가 보인다. 여기서 부상을 입으면 그에 따른 공은(功銀)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실제로 수여받은 것은 아니고 문서로 기입되는 형태로 남아 있다가 죄가 발생하면 그 죄에 상응하는 만큼 문서상에서 깎이는 형태였다. 예컨대 아두(adu)라는 인물은 울라 원정6에서 1 발의 화살을 맞고 한 차례 창을 찔려 부상을 입었기에 공은 11냥을 문서상으로 수여받았으며 어허더(ehede)는 1611년 자쿠타 공략전 당시 부상을 입고 울라 공략전에서 쇠곤봉을, 두 손가락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은 관계로 마찬가지로 공은 11냥을 문서상으로 수여받아 죄를 지었을 때에 해당 액수에 달하는 공은이 차감되게 되었다.7
특히 부상을 많이 입은 인물들, 예컨대 자푸니(jafuni)와 같은 인물은 일반적인 부상자들이나 전쟁참전자보다 많은 공은을 수여받았다. 자푸니는 이한산성 공성전 당시 무려 23군데에 부상을 입고 화상까지 입었다. 이후 울라 침공전에서도 부상을 입었는데 이 공로로 공은 23냥을 기입받았다. 전공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부상을 당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전사한 사람 역시도 공은이 기록되었는데 예컨데 우치하(uciha)는 1607년의 호이파 공략전에서 전사한 관계로 11냥의 공은이 지급되었다.8 전사자임에도 부상을 당한 이들과 공은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게 평가된 것은 전사 당시 상황이나 행적등으로 공적이 조사평가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몇 번의 전투에 나섰는가, 전쟁에서 얼마만큼의 활약을 했는가도 공은의 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부상/전사자에 대한 공은 기입식 포상은 모든 부상자들에게 매번 은을 포상하기는 힘들 뿐더러 당시 후금의 군-형법이 상당히 엄격한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군율과 형법의 지엄함을 알리면서도 형벌의 집행을 공은으로 대신케 함으로서 엄격한 형벌에 대한 불만을 어느정도 무마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조선의 기록에도 부상에 대한 여진/후금인들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이민환의 건주문견록에는 후금에서 얼굴이나 목에 베인 상처가 있는 이들이 높은 전공자로 평가받는다고 기록했으며 동시에 그런 이들이 매우 많다고 기록했다.9 이는 전장에 용감히 나섰다가 부상을 입는 것에 대해 고평가받는 당시 후금의 기조와 일맥상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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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주실록 정해년 음력 9월
2.만주실록 병술년 음력 7월
3.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0일
4.구사 어전보다 상위직의 임시직
5.만문노당 기미년 음력 6월
6.1612~1613년 사이에 있었던 1, 2차 울라 원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7.만문노당 천명 9년
8.만문노당 이상과 같음.uciha hoifa de bucehe seme juwan emu yan i weile waliyambi
9.이민환, 건주문견록, 面帶槍傷者爲上功. 凡大小胡人之所聚, 面頸帶瘢者甚多, 其屢經戰陣可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