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으로 사태를 직접 겪으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또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1980년 5월17일에 계엄령이 확대되고 18일에 소식이 들어오는데 (광주시내) 사방에서 군인들이 막 (시민을) 폭행하고 벌써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학동에 있는 까리따스 수녀원 주교관에 살았는데 거기서 출퇴근을 했어요. 그날(19일) 아침에 도청 앞을 지나서 가는데 도청 앞에 사람들이 좀 남아 있었어요. 그때 교구청 사무실이 금남로의 가톨릭센터 6층이었는데, 센터에 올라가서 보니까 차차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센터 모퉁이에서 내려다보니까 금남로에 공수부대가 있는데 어떤 젊은이가, 학생은 아니고 신사복을 입었더라구요, 목에 피를 막 흘리더라구요. 이 젊은이가 맞은편 건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는 거에요. 저 사람 응급치료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내려가면 (군인들이) 봐주지 않을텐데, 나이 들었다고 봐주지 않을텐데, 그래서 겁이 나서 내려갈 수가 없는 거에요. 성경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와요. 유대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해 쓰러졌는데 사제가 그걸 보고선 옆으로 피해가더란 거에요. 그런데 유대인과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그 유대인을 데려가 치료해줬다는 우화인데, 아 내가 바로 그 사제로구나, 그런 가책을 받았어요. 그게 두고두고 내 마음 속에 맺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