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한산 -용의 출현
엄황(嚴愰)은 조선 중기의 무인이다. 영월 엄씨 가문에서 1580년 선조 치세 시기에 태어나 1653년에 죽었으며, 자는 명보였다. 광해군 시기서부터 효종 시기까지 활동한 것인데 그 사이에 이괄의 난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등 굵직한 사건을 겪었고, 그 격동기에서 나름 자리를 잘 보전하였다. 1653년 노령과 병환으로 죽을 당시에도 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왕성한 인물이라고 평할 만한 인물이었다.
엄황은 1624년 무렵 수군절도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수군절도사 직책은 광해군 시기서부터 그가 맡아온 직책이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한 뒤에도 해당 직책은 유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벌어진 뒤 이괄이 패배하고 반란군 출신 병사들, 특히 황왜들이 남쪽으로 도주하자 그들을 잡는데에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관곡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으나 오인으로서 무마되었다. 이후 이듬해인 1625년에 평산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1624년 당시 엄황이 수행한 수군절도사 직책이 경상우수사인지, 경상좌수사인지에 대해서는 기록과 견해가 갈린다. 엄황의 묘갈명을 살펴보자면 엄황은 1624년 당시 경상좌수사(영남좌수사)의 직책을 수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1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당시 엄황의 직책을 살펴보자면 당시 엄황은 경상우수사였다.2 여기서 묘갈명과 조선왕조실록간의 기본적인 신뢰성 차이를 생각한다면 엄황이 경상우수사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록을 기반으로 실제로 엄황이 경상우수사였을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힘든 문제이다.
만약 조선왕조실록에 기술된 대로 엄황이 경상우수사였다면, 동일 기사의 동래부사였던 김치가 '엄황이 관곡을 빼돌렸다'는 의혹으로 고발한 기록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당시 경상좌수영은 동래 해운포에 존재했으며3 경상우수영은 고성의 두룡포에 존재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동래부사 김치가 우수영의 '경상우수사' 엄황을 고발했다는 것은, 가능은 한 일이긴 하지만 '경상좌수사 엄황'을 고발했을 가능성보다 다소 확률이 떨어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상의 기록대치 문제도 문제지만, 또 다른 염두점이 있다. 관찬 추국기록문서이자 실록보다 선행되어 검토될 수 있는 기초사료인 추안급국안에서도 엄황이 경상좌수사로 기술되며, 또한 해당 문서에 기술되는 엄황의 행적 역시도 경상우수사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추안급국안 인조 2년 음력 3월 3일의 기술을 보면 엄황은 엄연히 동래부와 연계하여 작전을 벌이면서 도주한 항왜들을 색출하고 왜관에 대한 통제를 진행하고 있었다.5 경상우수사라고 하여서 도주한 이괄 잔당 색출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여러모로 행적 자체가 경상좌수사로서의 행적에 가까우며 실제로 직책 기술 역시도 경상좌수사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건대 추안급국안 상에서의 엄황은 엄연히 경상좌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과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 판단해 보건대 조선왕조실록에 1624년 당시 엄황이 경상우수사라고 기술된 것은 오기(誤記)이며 실상 당시 엄황은 그의 묘갈명에 기술된 것처럼 경상좌수사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즉 1624년 당시 엄황은 경상좌수사로서 근무하며 이괄의 난 당시 도주한 이괄군 출신 항왜들을 체포하는데에 조력하였고, 이후 관곡 문제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무고인 것이 밝혀져 지위를 유지하다가 이듬해 평산부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6
1.『동주집』 문집 제10권 묘갈명
2.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인조 2년 음력 7월 22일
3.『조선시대 수군진조사』Ⅳ 경상좌수영 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8, pp.22~23.
4.『만기요람』군정편 4 해방, 남해
5.『추안급국안』인조 2년 음력 3월 3일
6.『승정원일기』인조 3년 음력 9월 18일. 단 여기서는 엄성(嚴惺)으로 이름이 오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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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있다가 갑자기 동래부사 이름이 김치 인거 보고 당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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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워리어 | 24.01.16 16:5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