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리는 동고부의 수장이었던 커처 바얀의 손자이자 얼기 와르카의 아들이었다. 그는 1586년 형인 둔주로 바얀의 뒤를 이어 동고부의 수장이 되었으며 1588년 이미 건주를 통일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강력한 세력 지도자, 누르하치에게 귀부하여 그와 함께 하였다. 이후 호호리는 누르하치의 딸 눈저와 혼인하여 어푸(부마)가 되었는데, 다른 어푸들과 구분하여 암바 어푸(amba efu, 대어푸)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위상도 위상이었거니와 누르하치의 장녀와 혼인했다는 것이 뭇 어푸들과 차별화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호호리는 누르하치의 최고위 다섯 대신(sunja amban)의 일획을 차지하였고 후금이 건국된 뒤로도 계속해서 종군하고 국사에 임하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실제적인 역할 자체는 그의 노쇠와 누르하치의 대신집정체제에서 버일러집정체제로의 전환 기조에 따라 줄어들었지만 그의 위상 자체는 유지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누르하치는 호호리가 죽을 당시에 "나와 어깨를 나란히하며 나의 구추로서 일하던 암반중 한 명이라도 남아서 나의 임종을 지켜달라."고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가 다섯 대신 최후의 생존자였기 때문이다.1
(호호리의 죽음에 대해 탄식하며 슬퍼하는 누르하치, 웹툰 칼부림 中. 고일권 작품)
호호리의 귀순 당시 상황은 정확히 어떠했을까. 실록에는 호호리의 귀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저 무자년에 귀순을 해왔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청나라 시대의 명사들, 흠정 팔기통지 164권, 그리고 청사고 권225 호호리 열전을 살펴보자면 자세한 바가 기술되어 있다. 이 때 호호리는 갑사 30여명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시집을 오던 하다의 여인(아민 저저)를 호위하여 나란히 '돌아왔고' 이후 자신의 동고 세력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귀부하였다.2
흠정 팔기통지에는 어째서 호호리가 아민 저저를 호위하였는지에 대한 맥락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사고에는 사건 이전의 상황 역시도 드러난다. 이 일이 있기 전에 누르하치는 호호리 측에게 먼저 예를 더하여 초치, 즉슨 호호리에게 자신의 산하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 이후 호호리는 아민 저저를 호위하기 위해 움직여서는 아민 저저와 함께 누르하치에게 돌아왔다.
여기서 아민 저저는 돌아온 것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호호리에 대해 '돌아왔다'는 표현이 쓰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자면 호호리가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세력을 바치며 완전히 귀부하기 전에도 사실상 누르하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으며, 그로서 아민 저저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한 뒤 그에게 돌아와서 공식적으로 귀부를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건대 아민 저저의 호위가 끝난 뒤 호호리가 귀부한 것은 '공식적인 귀부 의례'이며 실상 호호리는 그 이전, 즉슨 아민 저저와 누르하치간의 혼인 이전에 이미 누르하치의 뜻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라 파악된다. 이를 통해 보자면 호호리는 누르하치로부터 귀순 종용을 받은 이후 그의 뜻을 따를 것을 거의 곧장 결심한 뒤, 첫 임무이자 충성심을 증명하는 행동으로 아민 저저를 호위하는 '임무'를 누르하치로부터 받아서 수행하고 이후 누르하치에게 공식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의 산하 세력과 함께 완전히 누르하치 휘하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민 저저의 호위가 끝난 뒤 호호리가 누르하치에게 공식적인 충성을 맹세해야 했던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누르하치는 아민 저저와의 혼인과 함께 호호리에게 공식적인 귀부 의례를 행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막강해진 영향력을 자신의 산하 세력과 자신의 주변 세력들에게 크게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호호리의 세력이던 동고 세력의 경우에는 누르하치 세력과 과거 원한과 전쟁으로 엮인 세력이기도 하였기 때문에3, 호호리의 항복이 가지는 의미는 무척이나 컸다. 그러한 항복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면 그 효과는 대내외적으로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자신과 아민 저저의 혼인에 연이어, 혹은 혼인과 함께 호호리의 귀부를 받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선전하려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누르하치는 자신과 아민 저저간의 혼인과 관련하여 건주를 방문한 하다측 인사들에게 호호리의 공식적인 귀부 의례를 보임으로서 하다측에게 자신의 강력해진 영향력을 보일 것을 강하게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다는 이전에 있었던 '얼기 와르카 살해 사건' 이후 벌어진 동고와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누르하치 일족 세력)의 전쟁에 개입하여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을 돕고 대신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을 계승한 자신이 이전의 숙적이었던 동고를 완전히 무릎 꿇렸다는 것을 보일 기회를, 전략에 있어서 상당한 일가견이 있는 누르하치가 고려치 않았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결론적으로 호호리는 아민 저저와의 혼인식과 동시에, 혹은 그 직후에 누르하치에게 공식적으로 귀부하였다. 하지만 실상 그 이전부터, 즉슨 누르하치에게 협력의 설득을 받은 이후부터 누르하치의 뜻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협조에 누르하치는 확실하게 보답하여, 호호리에게 일등 대신의 직위와 동시에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주선했다. 호호리와 누르하치의 딸간 혼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지만4, 어쨌건 그것으로 호호리와 그의 가문은 건주의 지배층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1.만주실록 천명 9년 음력 8월
2.흠정 팔기통지 164권, 청사고 225권 호호리 열전, Arthur W. Hummel Sr, Eminent Chinese of the Qing Period: 1644-1911 vol.1, 2010(ver), p.291
3.자세한 바는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220943 참조
4.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80/read/5266098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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