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웹툰 칼부림
1607년 음력 3월에 발생한 오갈암 전투로 인하여 울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고 지휘관이었던 봌도를 포함한 울라측 지휘관들은 전투 현장서 전사하거나 적성세력이었던 건주측에게 포로로 붙잡혔으며,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 중 기록상 3할에 해당하는 3천여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현장에서 전사했다. 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사자들도 많았는데, 이들의 경우 건주군에게 추격당하다 살해당하거나 도주과정에서 발생한 한파로 인하여 동사했다.
인력뿐 아니라 많은 물자 역시도 상실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건주군은 이 전투에서 갑옷 3천여벌과 말 5천필을 노획하였다. 당장 건주군이 노획한 물자만도 이 정도였으니 울라군으로서는 그 이상의 물자를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울라의 오갈암 전투의 패배는 인적, 물적 손실만을 야기하지 않았다. 정치, 외교적인 손실 역시도 불러 일으켰다. 울라의 번호들에 대한 영향력은 대폭 감소했으며, 그로서 울라는 번호들을 흡수하여 자국의 인구와 병력을 늘리는 정책이 가로막히는 상황에 놓였다. 그와 더불어 동관 전투와 건퇴 전투의 승전 이후 확립한 조선과의 관계 역시도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형국에 처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울라의 경제를 압박했다.
건퇴 전투의 승전을 기반으로 하여 울라는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지급받고 그를 매개로 녹봉 명목의 면포 역시도 대량으로 수령했다.1 이는 번호규례에 기반한 조선-울라간 녹봉교역의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오갈암 전투로 인하여 조선과의 연결고리가 끊길 처지가 되자 이러한 경제적 문제 역시도 부각된 것이었다.
오갈암 전투로 인해 많은 물적 손실을 입은 울라와 그 군주 부잔타이로서는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본인들이 입은 손실을 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 변경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당히 많이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잔타이는 조선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려는 행동을 취했다. 이 때 부잔타이는 이전부터 조선과의 협의에 투입된 자신의 차관인 숄롱고(Šolonggo, 小弄耳)를 조선에 보내어 조선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보내려 했다.
숄롱고가 정확히 언제 조선에 파견된 것인 지는 확실치 않으나, 장만의 언급에 따르면 오갈암 전투의 패전 직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2 직후에 즉각적으로 조선에 차관이 파견된 것을 보면, 부잔타이가 오갈암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조선과의 협의, 교역관계가 끊어질 것을 그만큼 우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숄롱고는 당시 종성쪽으로 파견되었는데, 종성은 울라와 조선간의 협의가 이루어지던 주요 협의지점중 한 곳이었다. 당시 종성부사였던 유비에게 숄롱고가 조선에 전한 의사는 간단했다. 오갈암 전투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조선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부잔타이는 조선과의 교역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그로서 자신이 패전으로 입은 피해를 수복하고자 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종성부사였던 유비가 이에 대해 어떤 답변을 전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울라가 규례만 지킨다면 조선 역시도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원론적인 대답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숄롱고는 돌아가던 중 건주군에게 기습공격을 받았다. 숄롱고가 건주군의 변경 장악을 의식하여 상대적으로 은밀한 길을 이용하여 종성으로 접촉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건주군에게 습격을 받은 것은 당시 변경에서의 건주군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당시 건주의 조선 변경에 대한 장악력은 대단하였으며, 오갈암 전투 이후 지속적으로 번호를 철거하고 있었으므로3 숄롱고가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건주군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숄롱고는 건주군에 추격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도주하는데에는 성공했다. 이 사실은 1608년 음력 9월 영흥부사로 전임된4유비가 영흥에 부임한 이후 함경감사 장만에게 보고를 하여 장만에게 파악되었다.
이 이후 숄롱고는 얼마간 조선 변경에 접촉해 오지 못했으며 숄롱고가 아닌 다른 울라측 차관 역시도 조선 변경에 접근치 못했다. 울라측이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공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울라가 조선에 대해 다시 접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건주의 울라 침입으로 촉발된 이한산성 전투 이후 부잔타이가 건주에 화의와 정략혼을 요청하고, 누르하치 역시 이를 받아들여 건주와 울라간의 화친이 일시적으로 재차 성립된 이후라서였다.5 이 이후 조선과 울라간의 교역 및 통호관계는 어느정도나마 회복되었으나, 1613년 울라가 멸망함으로서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5월 9일, 12일
2.장만, 낙서집 권2 차자 請許忽溫和箚
3.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음력 9월 13일, 선조 40년 음력 12월 28일등.
4.조선왕조실록 광해 즉위년 음력 9월 20일
5.장정수,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4, 2020,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