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웹툰 칼부림
후금사 모음집
만문노당(滿文老檔, Tongki fuka sindaha hergen i dangse)는 초기의 만문사료인 만문원당을 건륭조 시기에 복원, 일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나 불확실한 부분을 수정하여 편찬한 사료이다. 해당 사료는 후금이 건국되기 전 부터인 1607년서부터 홍타이지 시기인 숭덕 초기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덕택에 후금~청초사를 연구하는데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기반자료라고 할 수 있다.1
해당 사료에는 후금/청의 전신인 건주와 해서여진 세력중 하나인 호이파간의 관계에 대한 요약기술 역시도 실려 있다. 해당 요약기술은 정미년 음력 9월2 누르하치의 호이파에 대한 공격기사 이전에 기술되면서 건주측의 호이파 공격에 대한 명분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요컨대 해당 사료에서의 건주-호이파간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호이파측이 먼저 누르하치에게 수 많은 잘못과 외교적 무례를 저질렀기 때문에 누르하치의 호이파 공격은 그 명분이 정당하다는 논지를 설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요약기술에서는 호이파의 건주에 대한 두 차례의 선제 공격 사례가 언급된다. 호이파가 여허의 나림불루에게 협조하여 건주를 공격한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해당 두 사례는 호이파가 건주에게 저지른 이전의 '죄'로서 강하게 작용했다. 누르하치 본인 역시도 바인다리가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고선 일부러 그 시기를 지연시키고 있을 때에 호이파와 여허의 건주에 대한 연대 공격을 언급하면서 바인다리를 성토하기도 했다.3
해당 두 사례중 하나는 1593년 음력 9월 당시의 9개 부족 연합군의 건주에 대한 침공과 해당 침공 내에서 촉발된 자카 전투, 허지거 전투, 그리고 구러산 전투를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해당 전투들은 나림불루와 부자이를 위시로 한 여허 버일러들을 중심으로 해서 여진의 4개 세력, 코르친, 코르친 산하의 시버와 구왈차, 백두산 인근의 너연과 주셔리가 건주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투들이다. 해당 침공의 경우 누르하치의 인생 전반기에 있어 가장 큰 역경이었고, 건주에게 있어서도 멸망의 기로가 갈리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당 침공작전 당시 움직인 9부 연합군에는 물론 호이파의 바인다리의 군대 역시도 합류하고 있었으며, 교전에도 역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4
또 하나의 사례는 1593년 음력 6월의 나림불루의 건주에 대한 탐색전 성격의 공격을 지칭할 가능성이 확정적이다. 1593년 음력 6월 나림불루는 건주의 방비태세를 파악할 요량으로 건주의 지역중 하나인 훕차를 공격했다. 고작 하나의 가샨을 공격하는 작전이었으나 나림불루는 여기서 자신에게 협조하는 해서여진 세력전체로부터 군대를 차출하여 종군시켰는데, 이는 해당 공격을 실행한 나림불루가 건주의 방비태세를 확인해 볼 요량뿐 아니라 연합군의 전략활동 역량을 확인해 보고 자신의 연합군 맹주로서의 입지를 확인해볼 요량 역시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때에도 역시 울라와 하다뿐 아니라 호이파의 군대도 나림불루의 원정에 종군했다.5
1593년 음력 6월의 훕차 전투와 그에 이은 건주의 반격전인 풀기야치 전투는 건주-9부 연합군간의 전쟁의 일환-전초전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으나, 그와는 별개로 호이파가 두 번에 걸쳐 건주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건주와 누르하치는 호이파가 두 번에 걸쳐 건주를 공격했다고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두 차례에 걸쳐 건주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발언하는 것이 건주의 호이파에 대한 공격명분이 좀 더 강해지는 길이기도 했다.
호이파가 당시에 여허에게 협조를 한 까닭은 바인다리가 호이파의 정권을 잡기 위해 자신의 숙부들을 살해하고, 그 숙부의 친족과 반 바인다리파 일족들이 그런 바인다리를 피하여 여허로 도주한 까닭이었다. 여허는 이들을 받아들여 호이파 정권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과 여지를 만들었고 그로서 바인다리가 자신의 뜻에 협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6 거기다가 당시 여허는 건주를 압도하는 여진 최강 세력이었으므로 바인다리로서는 여허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협조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사례는 누르하치가 호이파의 외교적 의도를 의심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여허와 손을 잡고 건주를 공격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1607년 혹은 그에 근접한 시기의 호이파의 건주와 여허 사이에서의 생존외교 도모의 저의를 의심한 것이다. 호이파는 건주와 재화의를 도모하면서 여허와 손을 다시 잡는 것을 부정했으나, 후일 여허와 손을 다시 잡지는 않되 건주와의 약속 역시 저버려 누르하치를 분개캐 했고 곧 그가 그것을 명분으로 호이파 병합을 도모하게 만들었다.7
2.실제로는 음력 8월로 추정된다.
3.만문노당 정미년 음력 9월, sure kundulen han hendume baindari si yehe i etenggi fonde narimbulu de dafi minde juwe jergi cooha jihe
4.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yehei bujai beile, narimbulu beilei cooha emu tumen, hadai menggebulu beile ulai bujantai beile hoifai baindari beilei cooha emu tumen
5.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6월,sure beile be cende dahara akv seme hadai menggebulu beile ulai mantai beile hoifai baindari beile duin gurun i cooha acafi
6.다만 이훈은 바인다리의 여허에 대한 협조를 여허의 압박으로 인한 협조보다는 바인다리의 능동적인 협조로 보았다.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p.94.
7.호이파 병합 자체가 이 사건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나 해당 사건이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