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찬성한 5명의 책임자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는다.
1)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에 이름을 올린 트리플 삼관왕.
가장 유명한 친일파. 나라 팔아먹은 공로를 일본으로부터도 인정받아 무려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나라가 망했으니 당연히 원래 있던 관직에선 물러나게 되었는데, 이 때 한일병합 공로금(!) 및 퇴직금으로 받은 금액이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은사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당시 일본돈 2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의 후손으로 부터 환수한 토지는 공시지가로 7,000만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 해방 후,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이완용이란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금지된 이름이 되었다.
- 장손주 이병길은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으며 둘째 장손주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일본에서는 환대했다고 한다).
-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1960년대에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낼 정도로 잘 나갔다. 그는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 그 내막을 말하자면, 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1992년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m2(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이번에는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2) 이지용: 왕족이다. 사실 구한말에는 왕족 중 친일파가 엄청 많았다
(해방 직후 왕정복고에 대해 대다수 한국인들이 ㅈㄹ하네...라는 반응을 보인 이유 중 하나).
1910년 일진회의 한일합병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찬성한 양반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가 백작 작위를 주었으며, 같은 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같은 달 조선귀족관광단 일원으로 일본 각지를 시찰했으며, 11월에는 일본 천황의 생일에 천황을 알현하여 하사품을 받기도 하고, 1911년에는 은사공채 10만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도박중독자여서 1912년 1월 도박죄로 검거되어 2월 태형 100대를 선고받아 3월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고 4월 귀족 예우마저 정지되었다.
- 광복 이후에도 살아 있어서, 1949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호출장을 발부받았으나....풀려났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2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 2명의 처를 두어 2남 1녀를 두었고, 이 중 차남은 아직 생존중이다. 10명의 손자녀가 있고(이 중 1명은 양손자인데, 이지용의 조선귀족 작위를 승계했었다), 21세기 현재 약 10명의 증손자녀들이 있다고 전해진다(7, 80년대생).
3) 이근택: 을사조약 당시 무려 국방부 장관.
근데 1897년에 이미 한 번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민 일이 있다. 이런 놈을 국방부 대신을 시키다니 대한제국도 참 대단하다(...)
- 아들 이창훈은 아부지 따라 종5위에 열심히 친일 행위를 해서 일제 내에서 계속 작위가 올라간다. 광복 후인 1947년에 별 탈 없이 죽었다. 이창훈의 손자 형제는 각각 공주대학교 교수와 공주대학교 총장(이상우, 1998년 사망)을 역임했다.
- 동생 이근상은 형이 후광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조선식산은행(그렇다, 조선 농업 수탈의 선봉장인 그 은행이다) 감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 아들 이장훈도 아버지의 남작 작위를 승계받았다. 이 놈은 1942년12월 17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평안북도의주군 고관면 소재 금 광산 283,920평(938,578.512m2)에 대한 광업권을 취하고 1944년8월 16일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소재 흑연 광산 9,185,000평(30,363,636.4m2)에 대한 운영권을 취득하여 광산업 독점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고, 광복 후에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1993년에 사망했다.
- 형 이근호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의 아들 이동훈도 남작 작위를 세습받고, 1948년 사망했다.
- 이근호의 집안은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이다. 이근호가 친일 행위로 일제로부터 습득한 경기도 화성시와 오산시, 충북 음성군 등의 토지를 되찾고자 하는 소송이 진행중이다.
4) 박제순: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의 더블 크라운. 이 때 각각 외교부 장관, 내무부 장관이었다.
글을 굉장히 잘 썼는데 이 능력을 친일에 잘 써먹었다.
본인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다가 1916년 6월 편안하게 사망했다. 향년 59세. 일제가 임명한 조선귀족 정4위에 서위되었다.
사망 후, 박제순의 상속자 박부양은 그 작위를 세습받고 중추원 서기관을 지냈고, 이들 부자는 일제 강점기 동안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이 박부양은 1937년에는 조선귀족 모임인 친일단체 동요회에서 이사를 맡았고,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무산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 후, 부귀를 누리다가 1974년에 역시 편안하게 죽는다.
다만, 특기할 점은 이 박제순의 손자(즉, 박부양의 아들) 박승유는 을사오적의 후손 중 유일한 독립운동가라는 것이다. 원래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친일활동에 심한 죄책감을 갖다가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해방 후 강원대학교 음대 교수를 하다가 1990년 별세한다.
5) 권중현: 친가는 권율의 집안이고, 외가는 이순신까지 닿는다. 본격 조상 얼굴에 먹칠
이 사람의 아들 권태환은 아버지와 함께 경술국치 전후부터 이미 함께 친일활동을 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한일합방 공로자로 인정 받았고 열심히 친일활동을 한다. 이 양반은 해방 후인 1947년까지 살다 죽는다. 반민특위? 그거 먹는 건가요?
권태환에게는 여섯의 아들(즉, 권중현의 손자)가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1900~1910년대생이었으므로 현재까지 살아있는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권중현의 증손자 이상이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