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면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의 말이죠."
감옥에서 죄수들이 부르는 탱고 넘버 "Cell block Tango"
오프닝에서 록시가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Roxie" 등
다양한 인기 넘버를 가지고 있는 뮤지컬 '시카고'에서 가장 특징적인 넘버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We Both Reached for the gun.'이 있겠네요.
한국어로는 '서로 그 총을 뺏으려 했네' 정도로 번역이 되는 모양입니다.
작중 백전백승의 실력있는 변호사 빌리 플린이 자신의 정부를 살해한 주인공 록시 하트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록시와 빌리는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을 향해 결백을 알려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빌리는 록시 본인의 입을 틀어막고, 철저히 자신이 준비한 스토리와 시나리오대로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마치 록시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앉혀놓고 말이죠.
이런 구도에서 착안, 이 넘버는 찌라시 기자 메리 선샤인의
"빌리 플린이 기자회견 재즈를 노래합니다. 잘 보면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의 말이죠."
라는 소개와 함께 시작하는것 처럼, 빌리가 록시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면서, 복화술을 이용해 록시를 대신해 기자 회견을 진행합니다. 이게 바로 'We both reached for the gun.' 넘버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한 넘버의 절반 이상을 복화술로 노래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이크를 차고 있다고 한들, 무대 저 끝까지 들릴 정도의 크기와 적어도 이게 뭔 개소린가를 알아먹을 정도의 또렷한 발음으로 소화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단지 노래만 소화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빌리 플린 역의 배우는 계속해서 록시 역의 배우의 입모양을 봐가면서 맞춰야할 뿐만 아니라, 록시로서, 그리고 빌리로서의 1인 2역을 연기해야하는데다가, 중간 중간 안무나 호흡도 고려해야하죠.
사실 대부분의 경우 복화술부터 막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화판의 리처드 기어가 연기한 것 처럼 그냥 복화술을 반쯤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내판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오랫동안 빌리 역할을 맡아온 남경주, 성기윤 배우 역시 복화술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빌리가 록시를 조종한다'는 부분에 포인트를 맞춰 연기와 노래를 소화했을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복화술부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팬들도 어느정도는 이해를 해주는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해외 캐스트들도 엥간하면 복화술까지 소화하는 배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국내 내한한 브렌트 바렛을 비롯한 몇몇 배우들이 복화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는데, 이 배우만 하더라도 20년 넘게 빌리 역할을 맡아온 배우예요.
다만 이해해주는 것과 별개로, 아쉬움은 표하는 팬들도 많았는데, 특히 오랫동안 해당 역을 소화했음에도 복화술적인 면에서 나아지지 않은 배우들에 대한 비판도 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다가, 2021년 재연에서 처음으로 이 역할을 맡은 한 젊은 배우가 어느 정도 이를 성공해냈는데,
연기나 캐릭터 완성도 면에서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넘버를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복화술로만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 하죠.
배우 본인의 성악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걸로 아는데, 정확한 발음과 입을 움직이지 않음에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까지 상당히 성공적으로 소화해냈습니다.
어쨌든 서사도 재미있는 넘버입니다.
빌리의 목적은 록시의 무죄방면입니다. 이에 따라, 그녀의 우발적인 살인에 서사를 부과해야하죠.
가수로서 성공하고 싶어 정부를 들이고 결국 그에게 속아 살인을 저지른 록시의 이야기를 전형적인 사회구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순진한 여성의 그것으로 변모시킵니다.
빌리의 이야기에서 록시는 어렸을 적 수녀원에 들어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아가씨일뿐입니다. 결혼도 야반도주로 했고, 남자에게 총이 겨눠질 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쐈을 뿐입니다. 록시도 이게 개소리라는 건 알고 중간 중간 넘버에서 끼어들지만 빌리가 막아세웁니다.
아이러니하죠? 자기 주도적으로 스타가 되려했으며, 총을 쏴 남자를 죽인 여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이야기 안에서 목소리를 죽여야했으니까요.
이런 전형적인 이야기 속에서 메리 선샤인을 비롯한 기자들이 기사를 퍼나르고, 세상은 그녀를 진지하게 무죄라고 믿게 됩니다. 사람을 죽였는데 동정을 얻고 무죄방면까지 된다는 점에서 이 뭔 개소리야 싶겠지만, 이 작품은 1920년대에 쓰여진 부조리극이 원작인 블랙코미디 뮤지컬입니다. 그냥 그런 작품이예요.
어쨌든 결말도 잘 안 났고, 횡설수설했는데, 시카고 재미난 작품입니다. 한 번 씩 보세요, 시간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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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본적으로 이 넘버의 한국판은 연기보다는 노래를 한다는 느낌이라 크게 선호하지는 않긴 하지만, 최근 최재림 버전은 확실히 차별화가 된 느낌이라 재밌더라. | 22.04.29 02:5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