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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태연은 깨어났다.
태연은 태신 옆에서 버둥거리는 미르를 안고, 기저귀를 확인한 후에, 분유를 중탕시켰다.
분유를 먹이면서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태린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놀라서 미르를 눕히고 밖으로 뛰쳐나가 보니 테라스 위에 이불 더미가 있었다.
이불을 슬쩍 걷어 보니 웅크리고 있는 태린이 보였다.
머리는 헝크러져서 얼굴을 조금 가리고 있었다.
태연은 안도했다.
"머리카락 간지럽겠다"
태연은 혼잣말을 하며 태린의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촉촉한 촉감을 느꼈다.
어두운 새벽에 태린을 자세히 응시하니 얼굴에 눈물자국이 보였다.
태연은 다시금 칭얼거리는 미르를 안고 나와서 한쪽 손으로는 태린의 머리칼을 계속해서 귀 뒤로 쓸어넘겼다.
태린의 표정은 한층 편안해보였다.
"… 차라리 이런 세상 된게 다행인가?"
태연은 밝게 뜬 달을 보며 태린, 태신, 미르,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인기척을 느낀 태린은 새벽에 깨어났다.
옆을 보니 태연이 테라스 벽에 기댄채로 미르를 안으며 자고 있었다.
태린은 미르를 안고 방안의 태신 옆에다가 누인 다음 태연에게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랜만에 잠을 잘 잔듯한 느낌을 받은 태린은 아침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애좀들을 살피러 집 뒤로 가보니 어느새 혜진의 머리가 한 껏 풀어헤쳐져 있었다.
“이건 좀 무섭다 혜진아”
태린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고무줄을 꺼네 혜진의 머리를 묶어주려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힘조절을 잘못하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식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빠진 머리를 볼 때마다 태린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슬펐다.
빨리 속초에 가야했다. 혜진이 원하던 모습으로 가기 위해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데려다 줄게”
태린은 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로 말했다.
삐삐삐삐삐삐삐
어느새 태린이 맞추어두었던 시계 알람이 울리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서둘러 껐다.
태린은 품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엄마의 유골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농막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연못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1시간이 흐르고, 2시간이 흐르고, 해가 뜨자 태신과 태연 또한 잠에서 깨어났다.
미르와 태린이 안보여 놀란 태연은 두리번 거리며 방으로 들어가서 미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린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멍하니 일출을 바라보다 그 밑에 있는 태린을 발견하였다.
태린은 아무 표정 없이, 아무 미동 없이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으로 유리병을 꼬옥 쥔채로…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이렇게 되기를 원한 적도 있었지만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살아있기에 죽는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이미 죽어버렸다면 그것은 상상도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단 하나뿐인 현실이었다.
엄마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태린의 머리속에서 지나갔다. 끔찍한 기억, 행복한 기억, 잊고 싶은 기억, 벗어나고 싶은 기억, 영영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 힘이 되어 주었던 기억.
태린은 자신이 얼마나 가족들을 혐오했고 동시에 사랑했는지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모두를 놓아줄 시간이 온 이 순간에서야.
이태린은 천천히 일어나 손에 유골을 뿌리고, 앞으로 내밀었다.
불어온 바람은 유골을 농막 사방으로 흩트렸고, 일출에 반짝였다.
태연과 태신은 테라스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손위에 남은 유골을 내려다보자 태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닦으려 얼굴을 비비자 손에 남은 유골 또한 사라졌다.
그렇게 또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방안에서 미르가 울기 시작하자 이태린을 바라보던 태신과 태연은 깜짝 놀라 방안으로 들어가서 미르를 달랬다.
태린도 미르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닦고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끝낸 태린은 우선 농작물 파악부터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주변에 남은 편의점이나 마트는 있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멀리 움직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량 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들아 잠깐 모여봐"
방안에 누워 미르와 놀아주던 태신과 태연에게 태린이 말했다.
"왜?"
태신과 태연은 이태린을 보며 동시에 물었다.
"오늘은 잠깐 밭 좀 보자. 나도 밭하고 비닐하우스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몰라서 파악을 좀 해야돼. 그러니까 이제부터 잠깐만 나하고 뭐 있는지 좀 보자. 시간 얼마 안 걸려. 둘 중 한명만 와도 돼"
이태린이 말하자마자 둘 다 신발을 신으며 준비했다. 태신은 담요로 미르를 업고 나왔다.
"한명만 있으면 된다니까?"
"됐어. 미르도 돌아다니는 거 좋아해"
태신의 답에 태린은 할 말이 없었다.
차태신과 이태린은 밭을 둘러보았고, 차태연은 비닐하우스를 둘러보았다.
토마토, 딸기,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마늘 등등 작은 밭 안에 온갖 것들이 있었다.
이태린의 엄마의 취미가 밭을 가꾸는 거였기 때문에 작물은 상당히 다양했다.
파악이 끝난 그들은 작물을 하나씩 가져와서 맛 보았다.
"...어머니가 농사 잘 지으셨네"
태연이 이태린의 눈치를 슬쩍보며 말했다.
"어, 뭔가 기르는 걸 좋아했거든 엄마가."
잠시 생각에 잠긴듯한 이태린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저어기에 닭도 있었어! 근데 어떻게 된건지 다 도망간 것 같네. 다행이지 괜히 들개나 좀비한테 걸리지 않아서. 그리고 저기에 밤나무도 있어. 그래서 가을철되면 엄마가 밤 수확해서 구워주고 그랬어. 계속 먹다보니까 질리더라 하하."
이태린은 신이 난듯이 엄마의 자취가 남아있는 풍경을 설명했다.
이후 며칠동안 그들은 목가적인 삶을 이어나갔다. 먹을만큼 작물을 수확하여 요리해 먹고, 주변에 있는 계곡으로 물놀이도 가고, 짧은 등산도 하였다.
산 중턱이어서 그런지 좀비의 흔적은 애좀들 빼고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며칠을 지내면서 이태린은 이제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 이제 조금 있다가 속초 갈거야. 혜진이랑"
이태린은 무국을 끓이다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보조를 하고 있던 태연은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미르를 돌보던 태신 또한 놀라서 이태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박혜진이야 밖에 있는 여자 좀비. 머리 묶은 애. 걔가 죽기전에 약속했어. 속초 데려가 주기로. 니들은 여기 있으면 안전할거야. 여기 있는 동안 봤듯이 좀비는 거의 없고, 사람들도 거의 없어. 그나마 며칠전에 봤던 마을 사람들은 우리들한테 우호적이고..."
"잠깐 잠깐 잠깐 잠깐. 갑자기 뭔데?"
차태신은 이태린의 말을 끊으며 말했지만, 그는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혹시라도 걱정할 일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 가지고 있는 총 다 줄게. 그거 쓰면 어지간하면 안전할거야."
여전히 태린은 태연과 태신에게 등을 돌린채로 무국을 끓이고 있었다.
"야 그게 뭔 소리야! 우리가 그것 대문에 그러는지 알아? 우리는… 우리는..."
차태연은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너만 믿고 따라왔는데 무슨 소리야? 나는 그렇다쳐도 태연이하고 미르는 니가 책임져야지! 그 속에서 멋대로 구해냈으면 계속 보호해줘야 하는거 아냐? 배신만 하지 말라며? 왜 니가 배신하려하는데! 우리가 뭐 잘못했어? 그러면 알려줘… 고칠테니까"
빽빽 소리를 지르던 태신의 목소리는 마지막에는 점점 작아지더니 거의 울려고 그랬다.
"죽기전 약속이야… 지켜야지… 나좋아해줬던 앤데..."
이태린의 말에 태신은 흠칫했다.
"그리고 니들이 잘못한건 없어. 그냥 난 약속 지키려는 거야… 그냥 "
태린은 죄인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알겠어 그럼. 같이 가"
차태연이 말했다.
"모두 같이 가. 속초? 뭐 얼마 걸리지도 안찮아? 길어봤자 2주? 아냐? 어차피 어느정도는 차타고 갈거잖아? 그래. 가서 해수욕좀 하고, 회도 먹고 오자! 그러면 되잖아?"
태연은 과하게 밝은 말투로 말했다. 자칫 비꼬는 말투로 들리기도 했다.
"뭐?"
태린은 자기가 잘 못들었다는 듯이 답했다.
"같이 가자고!"
태연은 다시한번 크게 말했다.
"위험할텐데.."
"아니. 니 옆이 제일 안전해. 너만큼 미치고, 너만큼 잘 살아남는 사람 없어"
"그래 같이 가자."
옆에 있던 태신도 동감했다.
밖으로 굳이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태린은 내심 좋아했다.
차태신, 차태연는 모두 자신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같이 있으면 포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알았다."
이태린은 마지막으로 무국의 간을 맞추고,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었다.
차태연은 그런 이태린을 따라 나섰다.
"후우. 사실 니들 따라올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근데 그래도 니들이 해야하는 결정이니까 물어본거야."
우물쭈물하는 차태연을 보며 이태린은 말했다.
"그랬어? 되게 음흉하네"
태연은 태린의 말에 마음이 편해졌는지 농담을 던졌고, 태린은 씨익하고 웃었다.
"그럼 내일까지 쉬고 모레 출발할 거니까 필요하다 싶은거 있으면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