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 타닥, 타닥.
금속성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는 발전소 제어실 문을 벌컥열었다.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화면들과 함께, 그 한 가운데 서서 무언가 열심히 작업하고 있던 푸른 외투의 등을.
“왔어요?”
치기 어린 목소리가, 등 너머로 흘러 나왔다.
“너무…늦었잖아요.”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왠지 어딘가 다르다.
마치 삶에 지쳐 목표를 잃어버린 한 아이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목적대로 움직이지 않는 로봇이라니…완전 불량품이야, 불량품.”
뒤를 돌아보지 않은채로, 스크린에 띄워진 화면을 열심히 조작하는 그녀의 뒷 모습.
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고 싶었건만, 어쩐지 음성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고장난 것처럼.
“언제부터였더라…….”
이런 내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이 내 바램대로 됐던 적이 한 번도 없더라구요.”
빠르게 이어나가는 스크린 조작.
우울해져만 가는 그녀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숫자와 코드언어들이 빠른속도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이번에도 그렇게 됐네요. 결국.”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계로된 심장이 삐걱거린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10년.
마리는 이제 내가 알던 어리고, 새침떼기 였던 소녀가 아니었다.
내가 지켜주지 못한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고,
어떻게든 담담하게,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며,
그렇게 기를 쓰며 살아왔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많이…외로웠겠구나.’
쓸쓸해 보이는 딸의 등.
“뭐…이제 와서 딱히 새삼스러운건 아닌데…….”
많은 것을 꾹꾹 눌러담아 둔 그녀의 등을 보며,
“그냥… 아, 모르겠다. 이젠 하나도 모르겠어.”
나는 먹먹해져오는 감정을 억지로 짓누르며, 내 마지막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산나비는…이 발전소였나?”
바쁘게 스크린을 오가던 그녀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아저씨… 인지 제약 풀었구나?”
잠깐의 침묵.
딸은 가만히 스크린을 지켜보다가, 이내 한숨 쉬듯, 내 궁금증을 답해주었다.
“정확히는 이 도시의 자폭을 정지시키는 것까지가 제가 설정한 산나비죠.”
자폭.
마고그룹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머릿속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노도처럼 흘러나간다.
일제히 삭제되어버리는 도시의 모든 정보.
고위층 간부들의 집단 자살.
노동용 안드로이드들을 모조리 학살하던 치안 로봇들.
-마치 도시째로 자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마리의 그 한 마디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미친 기업 인간 말종들 때문에 죄 없는 도시 사람들 죽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제서야 나는 마리의 행동을 이해했다.
이 도시에는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구가하던 일반인들.
그녀를 찾으러 오면서 인지 제약 때문에 보지 못했던, 그들의 면면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이해했으면 더 이상 방해하지 마요.”
마리는 다시금 손을 바삐 놀렸다.
“원자로 온도가 임계점을 한참 넘겨서, 이제 정말로 남은 시간이 없어요.”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 만큼, 여러 가지 스크린들이 바삐 돌아간다.
“제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노심을 해체해야 해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인지 제약을 풀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마리는 여기까지 와서, 이런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위험한 일에 스스로 몸을 던지지 않았을 텐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딸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우리 도시 머리 위에 떠 있는 조정도… 원자로가 멈추면 도시를 가만 놔둘 거예요.”
그러다가,
가만히 스크린을 보다 못한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얌전히 산나비를 찾으러 갔으면 좋았잖아요. 저 방사능 구덩이 속에서 제 몸뚱이가 오래 못 버티면 몇 명이 죽는 지 알아요?”
길다란 흑발을 찰랑 거리며, 나를 보는 10대 여자아이.
떨리는 커다란 눈망울이 내 시야에 한 가득 담겼다.
“그 모자…뭐야?”
너무 잘 자라서, 진짜로 못 알아 볼 정도로 변한 것 같았지만,
“대령 삼촌 만나고 왔어요?”
어릴 때, 모습 그대로 간직한 그 모습에,
“설마…해친건 아니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마리…….”
그 순간,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탁!
그녀의 손에 내던져진 단말기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공허한 제어실을 가득 울렸다.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당혹스런 눈동자를.
슬픔과 비통으로 가득차 떨리던 그 입술을.
마리는 그 행동을 숨기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내 눈은 그 순간을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
‘마리야.’
너무나 안타까웠다.
떨리는 그 가녀린 등을 지금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마리의 말에 나는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착각하지 마요. 당신은 내 아빠가 아니야.”
-나는 네 아빠가 아니다.
“인간 흉내내는 깡통……..”
-그것은 로봇이야. 사람 흉내내는 깡통.
“병기로 개조된… 아빠의 모조품이지.”
-사람을 흉내낸다고, 기계가 사람이 될 순 없어.
내가 한 말과, 마리의 말이 오버랩되어 머릿속에서 반복되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나 진짜 바보같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내 마음이 우후죽순으로 찢겨져 간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걸… 뭘 해보겠다고 나 혼자 그렇게 열심히였는지…….”
마리의 어깨가 나에게 멀어져 간다.
천천히 발걸음을 옳겨, 반대편 출구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고 어렸다.
“이런 말 할 자격, 나한테 없는 거 잘 알지만, 난……”
한차례 떨리는 그녀의 등과 함께,
“아저씨가 미운 것 같아요.”
내 마음에 대못이 깊숙이 박힌다.
“아저씨를 좋아할 방법이, 더 이상 남지 않은 것 같아.”
애써 참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
“그러니까…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져요.”
그리움과 후회로 범벅이된 목소리.
“내 진짜 슬픔도… 후회도… 가짜한테 빼앗길 수 없어.”
내 딸은 그렇게 울고 있었다.
등을 보인 채로,
얼굴을 애써 돌린 채로,
들키지 않으려 숨죽이며, 우는 그 목소리에,
나는 못에 박힌 예수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마리…….’
안타깝게도 나는 슬픔에 잠겨 우는 딸을 달래줄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저 일에 치우쳐,
복수심에 미쳐,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친, 바보 같은 남자만이 이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달칵.
거짓말처럼 허리춤에 존재하던, 보관용 더미 상자가 열렸다.
안에 있던 물건은 두 개.
송소령에게 받았던, 의금부 17호대의 상징, 철호패와, 마리에게 선물이라고 받았던 하모니카.
나는 가만히 하모니카를 들었다.
손때 묻어 여기저기 빛이 바랜 흔적이 엿보인 오래된 하모니카.
-불러봐요!
딸 아이가 발작적으로 남겼던 그 말.
-아저씨 하모니카 불러 줄 수 있어요?
내 머릿속에서 스쳐간, 하나의 기억.
‘이번엔 실수 하지 말아야지.’
나는 빛 바랜 기억 하나를 입에 물고, 곧 오래된 추억을 하나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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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8살의 마리가 소리친다.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 지, 샐쭉해진 표정의 마리.
“끝까지 가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아니…라고?
“왜? 이번엔 아빠 괜찮지 않았니?”
그 말에 마리의 눈썹 끝이 화난 듯 위로 치솟아 오른다.
나는 그 모습에 떨떠름한 입을 겨우 열었다.
“…아니었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아빠. 이건 그런 게 아니라구.”
대체 뭐가 문제일까?
‘군인의 철칙. 모르는 것은 한번 더 물어봐야 한다.’
나는 인상을 구기는 마리를 보며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러면이라니~~ 아빠가 그걸 모르면 어떡해!!”
마리는 이런 내 말에 결국 두 발을 방방 굴려, 자신의 화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런 결국 화나게 만들었군.’
나는 멋쩍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끝까지 연주하면 뭐해! 중간에 완전 많이 틀리는걸!”
“그렇게… 이상했니?”
“응! 음정도 완전 이상했고, 그리고…박자도.”
“…그럼 맞게 연주한 게 하나도 없는 뜻인데?”
“바로 그거야!”
무언가 대단한걸 가르쳐 줬다는 뿌듯 한 표정에,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
나는 하모니카를 쳐다보다, 결국 근처에 상자에 털썩하고 앉았다.
“아무래도 아빠는…… 하모니카에 재능이 없는 모양이구나.”
마리와 처음으로 하는 선생님 놀이.
물론 마리가 선생님이고, 내가 제자인 놀이였다.
그때, 마리가 내밀었던 건 하모니카 였다.
‘아빠, 내가 하모니카 가르쳐줄게.’
하지만 몇 번을 해도 제대로 된 연주가 되지 않아, 마리의 인상이 점점 험악하게 변하고, 결국 여기까지 몰린 것이었다.
“히히 괜찮아, 아빠. 처음엔 그럴 수 있어!!”
이런 되도 안하는 위로까지 받게 되다니, 제자로서도, 아빠로서도 완전 실격이다.
마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뒤에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이 노래, 엄마한테 배우는데 완전 오래 걸렸거든.”
엄마.
심장이 덜컥 하고 멈추는 감각.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하모니카를 강하게 쥐었다.
‘아아…….’
마리가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은 하모니카 연주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짙은,
엄마에 대한 추억.
“…마리야.”
“응?”
그 순진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마리의 모습에,
“미안하구나.”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만 담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아빠가 뭐가 미안해?”
“그냥…….”
순진무구한 눈동자.
어린 아이의 눈이 내 죄책감을 직시하게 만든다.
“다 미안하네. 모든 게.”
내가 만약 군인이 아니었으면, 아내는 죽지 않았을까?
“마리도 하고 싶은 게 많은 텐데…….”
항시 근무 때문에 바빴던 나를 대신해, 마리를 돌보아야만 했던 사랑하는 아내.
“아빠가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구나.”
마치 그 자리를 내가 뺏은 것만 같아서,
“가끔…엄마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질 때가 있구나.”
이렇게 마리가 엄마 얘기만 하면, 가슴이 뻐근하게 되면서 답답한 마음만이 일렁였다.
마리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곤 한 마디 했다.
“엄마 보고 싶지?”
어……?
마치 내 마음 한구석을 들여다 본 듯한 말투에 나는 결국 말을 잊고야 말았다.
‘그렇구나.’
내 진짜 마음.
나는 아내가 무척이나 그리웠던 것이었구나.
마리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두 엄마 보고 싶다.”
내 시선이 절로 마리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하얀 구름이 지나가는 새파란 하늘이 내 마음에 번졌다.
“지금 엄마도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있겠지?”
문득 하얀 구름 하나가 우리를 지나치며 천천히 지나간다.
“엄마가…지금 우리를 보면 뭐라고 할까?”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무어라 말하면 어쩐지 눈물이 가득 차오를 것 같아서,
마리는 이런 나를 잠시 보고는 발가락을 꼼질꼼질 거리면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있잖아, 아빠. 엄마는 내가 슬퍼할 때마다 그 노래를 들려 줬어. 머핀 기억나지 아빠?”
머핀? 머핀이라면…….
“우리 야옹이 대원 말이야.”
내가 대답을 찾기도 전에, 마리의 입에서 머핀에 대한 내용이 자연스레 나왔다.
“머핀이 야옹이 별로 떠났을 때, 나 엄청엄청 슬펐거든.”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있었다.
“머핀이 날 혼자 남겨두고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오랜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온 날.
마리가 대성통곡을 하며, 온 집안을 들 쑤시고 다녔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아내에게 물어보니,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들었었다.
‘그땐 참 눈물이 많았었지.’
하루 종일 눈물 흘리며, 머핀을 살려내라고 하던 철없던 딸의 모습.
그런 딸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아내는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눈웃음을 지었었다.
그때였을 것이다.
‘마리가 저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던 일이.’
대체 아내가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마리는 울음을 뚝 그쳤다.
슬픔이 가득한 기색은 남아 있긴 했지만, 더는 구슬프게 우는 일은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내에게 물어봤지만, 아내는 싱긋 웃으며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누를 뿐이었다.
마리의 말이 이어져 나간다.
“그때 엄마가 그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런 말을 해줬어.”
내가 몰랐던 그 날의 기억이, 마리의 입을 통해서 다시금 세상에 나왔다.
“세상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에…….”
마리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그 시간이 걸려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비로소 소중해질 수 있는 거라고.”
소중했던 엄마의 추억과, 그때 배웠던 교훈을,
“이상하게,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슬픈 마음이 마법처럼 사라지더라구.”
나에게 열심히,
아주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있잖아, 아빠.”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 아빠랑 놀 때 정말로 좋아.”
조심스레 나랑 눈을 마주치며, 부끄러운 듯 조막 조막 말을 하기 시작한다.
“부끄러워 하면서도 나랑 열심히 맞춰주는 아빠가 너무너무 좋아.”
잘 안되는 어휘력으로, 열심히 자기 어필을 하며, 내가 좋다고 말하는 마리의 말.
“내가 힘든 부탁을 해도 다 들어주는 아빠가 좋아.”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른다.
“나랑 놀고 나면 피곤해서 꾸벅꾸벅 잠드는 아빠도 좋아.”
아아, 내가 복수심에 미쳐 있을 때, 이 아이는 얼마나 나를 살펴보고 있었을까?
“아빠 자고 있을 때, 사슬팔 들어보니까, 완전 무겁더라~~.”
마리가 조막만한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려 애쓴다.
“무거운 팔 때문에 힘들었지? 미안해.”
아니야, 아빠 하나도 안 무거워, 이런 것 따윈 절대로 무겁지도 않아.
“아빠도 일하고 오면 피곤하고 쉬고 싶었을 텐데…….”
아…….
“그래도 늘 나랑 함께 놀아줘서 고마워.”
발개진 얼굴로 나를 보며 입가를 씨익 하고 올린다.
“나 정말로…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 하나하나가 너무 행복했거든.”
결국 부끄럼을 참지 못했는지, 내 팔에 안겨들어온다.
“지금도 그렇고!”
겨우 얼굴을 올려서 싱긋 웃는다.
“그러니까 아빠… 미안하다는 말 안 해도 돼.”
그 모습은 마치 귀여웠던 아내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빠는 언제나 나한테 최고의 아빠인걸.”
눈시울이 붉어진다.
언제부터 마리는 이렇게 어른이 되었던 걸까?
의젓하고,
똑똑하고,
위로심도 많은,
그런 어른이.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안타까워서,
“마리야…….”
마리의 이름을 나직이 입에 담았다.
마리는 이런 나를 보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히히, 그러니까 아빠도 슬퍼지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주기야?”
그녀의 손이 내 손에 쥐어져 있는 하모니카를 뺏어들었다.
“아빠가 슬퍼할 때마다, 내가 하모니카 불어줄게…….”
그때처럼.
자신이 무척이나 슬펐을 때, 슬픔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 주었던,
“엄마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같은 추억을 공유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멍하니 마리의 손에 든 하모니카를 보았다.
이제 저것은 나의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있잖아, 저번에 아빠 훈련하는 거 보고 나 꿈이 생겼어.”
꿈?
“나… 군인이 될거야!”
‘군인이라니…….’
어이없었다.
많고 많은 꿈들 속에서 하필 군인이 꿈이라니.
‘예쁜 꿈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이런 내 마음을 들었던 걸까?
마리는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아빠처럼 천무하적 군인이 돼서, 아빠랑 같이 모험을 떠날거야.”
“모험…말이니?”
떨떠름하게 물어보자, 마리가 힘차게 대답한다.
“응!”
이건 아무래도 얼마 전에 했던 놀이인, [산딸기 대원 구출 작전]의 연장선인 모양이었다.
“한번 눈을 감고 상상해봐, 아빠!”
그 말에 나는 결국 헛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빠랑 나랑 동료가 되어서, 무시무시한 악당이 사는 성에 올라가는 거야!”
동료.
악당.
성.
‘아무리 생각해도, 군인이 해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군인보다는 용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내 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상상력은 막힘이 없었다.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지렁맨도 물리치고…….”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긴 몸뚱아리를 가진 거대한 지렁이, 지렁맨.
상상속 마리의 이얍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마리 앞을 가로 막은 거대한 담요가 ‘으윽… 분하다.’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저스티스도 만나서 사진도 찍고…….”
그렇게 여행을 하다, 만난 정의의 사도 저스티스.
마리가 얼굴을 붉히며, 카메라를 내밀자, 상냥하게 포즈를 취하며, 같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마리의 상상력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앗, 저 거대한 괴물은 싸워서 이길 수 없어!”
그리고 나타나는 거대한 그림자 괴물.
너무나도 커서, 마리의 작은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때라면 아빠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마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가끔은 도망갈 줄도 알아야 돼.”
그제야, 상상속의 나와, 마리가 분을 참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 맞네. 이길 수 없으면 도망가야지.’
생각지도 못한 답에 은근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군인은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뚫고 나가야 하는 직업일진데…….
나는 감은 눈을 다시금 떴다.
보이는 건, 하늘을 보며 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랑스런 마리의 얼굴이었다.
“아!! 그리고 TV에서 봤는데, 세상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차도 있대!”
하늘을 보니, 어디선가 종이들이 나타나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가고 있었다.
희귀하게 일렬로 날라가는 종이들.
그 모습이 마치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 처럼보였다.
“완전 신기하지 않아?!!”
그래 무척 신기해 보이는 구나.
“나 그거 꼭꼭꼭 타보고 싶어!!”
마치 꿈을 꾸며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동자.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리와 행복한 여행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 누구도 방해받지 않는,
“히히, 상상만 해도 완전 재밌을 것 같아!! 그렇지?!!”
내 딸이 무척이나 행복해 하는,
“그런 날이… 정말로 왔으면 좋겠구나.”
그런 꿈을.
“헤헤…분명 올거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응, 왠지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확신을 가지고 하는 그런 딸의 모습에 나는 풋 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귀여운 그녀의 상상력의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언젠가 꼭 이 아빠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꾸나.
아빠가 반드시 지켜줄게.
이런 내 쓰다듬에 행복해 하던 마리가 우물쭈물 하다가, 나를 올려다보 보며, 말했다.
“아빠. 나랑 한 가지 약속해 줄 수 있어?”
약속?
“무슨 약속?”
그러자 마리는 한참을 검지손가락을 콕콕 마주치며, 우물우물 거린다.
무슨 약속이길래, 우리 딸이 이런 모습을 보일까?
어려운 약속인가?
“만약에 있잖아. 우리 함께 모험을 하다가 내가 슬퍼지는 날이 온다면…….”
마리는 눈을 꼭 감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가… 나한테 하모니카를 연주해줄래?”
하모니카라면…….
“이 노래를…….”
우음 하고, 고민하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마리는 노래 제목을 말했다.
“산나비를… 말이야.”
방금 전까지 내가 틀리게 연주했던 노래.
아내와의 추억.
“아빠가 이걸 불어주면 난 분명 다시 행복해질거야!!”
고작 이정도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할정도로 어려운 부탁일까?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물론이지, 딸. 누구 부탁인데.”
“헤헤헤… 역시 누가 뭐래도 아빠가 최고야!!”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 실력으론 절대 안돼!! 그런 연주로는 더 슬퍼질 뿐이라구. 알겠지?”
아,
아무래도 내 형편없는 연주 때문에 그리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내가 산나비 다시 들려줄테니까, 잘 듣고 많이 연습해야 해?”
마리가 하모니카를 들고, 연주를 시작한다.
아름답고도, 조금은 슬픈 가락이 산 머루를 타고 허공에 드리운다.
나는 눈을 감고, 마리의 연주에 집중했다.
‘절대로 잊어먹지 말아야지.’
나와 마리의 소중한 추억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아주 오랫동안 연습을 했다.
임무에 나섰을 때도,
훈련에 임할때도,
마지막으로 퇴역을 신청할때도,
나는 끊임없이 하모니카 연주, 산나비를 연습했다.
-헤에, 그게 뭡니까. 준장님. 되게 못부르심다.
-…존중하겠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한들, 나는 계속해서 하모니카 연습을 계속했다.
나는,
우리 딸에게 있어서 최고의 아빠가 되어야만 했으니까.
그런 오래된,
아주 오래된,
무척 소중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하모니카를 입에서 조심스레 뗐다.
잘 불렀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나는 대로, 연습한 대로 열심히 연주했다.
‘똑같았던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레 마리에게 물어보았다.
“이번엔…, 아빠 연주 괜찮았지?”
마리가 조금씩 나에게 걸음을 옳기다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리가 나에게 뛰어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방울 방울 흐르는 눈물.
“아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북받친 듯, 그녀가 내 옷깃을 붙잡으며, 울먹이며 말했다.
“…진짜 아빠 맞죠?”
나는 그런 딸을 보며 힘껏 껴안았다.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내 얼굴을 보며 입술을 파들 파들 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아니, 나 하나도 안 힘들었어.”
하지만,
결국 내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응, 사실 나 많이많이 힘들었어.”
끅끅, 거리며 울음 참는 마리의 목소리.
“정말로…많이…….”
그러다 결국, 감정이 터져나오는지, 끅끅 거리며,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도, 아빠가 죽었다는 게 도저히 실감이 안 나서…….”
나를 잃은 후, 참아왔던 그녀의 마음 속 이야기가 속절 없이 터져나왔다.
“목 놓아 부르면… 어디선가 아빠가 대답할 것 같아서… 그래서 매일 밤마다 잠에 드는 게 무서웠어.”
끅끅 거리며 말하는 마리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아빠 꿈을 꿀까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꾸, 꿈을 꿀수록…시간이 지날수록… 꿈속에서 아빠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데…….”
내 딸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아빠가 없다는 현실은…갈수록 선명해져.”
내가 없어진 후, 얼마나 울었을지,
“난 그게 정말 무서웠어……. 언젠가 아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나에게 남은 건… 이런 현실일 뿐일까봐.”
죄책감에 사무쳐서 울먹이는 마리를, 나는 조금 더 강하게 껴안았다.
“이제 다 괜찮아, 우리 딸. 마음껏 울어도 돼.”
내 안에서 참아왔던 감정을 다 털어버리렴.
아빠는 여기 있으니까.
내 품 안에서 조막만한 손이 나를 강하게 안았다.
“미안해요. 아빠. 나 때문에 아빠가…이렇게……. 전부 나 때문이야. 이 모든 게……. 그냥, 전부 다… 내 탓이야. 미안해.”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너무 가슴 아프게, 구슬프게 우는 우리 딸.
나는 마리의 고개를 들었다.
울음 가득한, 딸의 얼굴이 눈에 한 가득 들어왔다.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리니, 흐르는 눈물이 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우리 딸이 뭐가 그렇게 미안할까? 아빠는 그저 고맙기만 한걸.”
그래,
계속해서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고, 믿어줬던 것은 마리가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었다.
마리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살인 프로그램으로서 끊임없이 복수심에 갇혀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런 아빠를… 끝까지 믿어줘서 고마워.”
마리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린다.
“아니야. 나 아빠를 못 믿었어요. 계속 아빠를 포기하려고 했어.”
나는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줬잖니.”
“아빠…….”
마리의 눈가가 다시금 촉촉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 옷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크게 소리 내서 울고야 말았다.
마리야.
이 아빠는 너무 고맙단다.
이 아빠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열심히 노력해줬던 것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구나.
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착한 아이로 자라왔는지 이 아빠는 잘 알 수 있었단다.
많이 힘들었지?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많이 힘들었지?
이제야 널 기억해낸 아빠가 정말 미안하구나.
그러니,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아다오.”
나는 강하게,
또는 아주 소중한 것을 품듯,
마리를 안아주었다.
“…소중한 추억만 안고 가고 싶구나.”
더는 슬퍼하며 이 아빠를 그리워 하지 말아다오.
혼자서,
씩씩하고,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아빠…….”
마리의 손아귀의 힘이 더 강해졌다.
더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를 강하게 붙잡으며,
그렇게 하염없이 울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냥… 나랑 같이 떠나면 안돼?”
이제는 조금은 괜찮아진 발음으로,
“내가… 아빠를 고쳐볼께요.”
웅얼거리듯 말한다.
하지만 그래선 안된다.
이미 나의 시간은 그곳에서 끝났다.
이렇게 만난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해야만 했다.
더 가는 것은 이미 욕심이다.
나는 억지로 마리를 떨어트려 놓으며 말했다.
“마리야… 엄마가 했던 말 기억 나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이 너무나 가슴 아팠지만, 가르쳐줘야 할 것은 가르쳐줘야 한다..
그것이 아빠의 역할이니까.
“모든 만남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란다. 좋든 싫든,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오지.”
“몰라…. 싫어요. 그런 거 하나도 기억 안나.”
마리의 두 눈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 이제 더 이상 아빠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덜덜 떨리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끊임없이 요동친다.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마리가 행복한 인생을 맞이할때까지라도 살면 안될까?
아니,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아니 조금 더, 몇 시간이라도 더,
하지만,
“마리야.”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마리와 두 눈을 맞추었다.
“아빠가…….”
흔들리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다 잡았다.
“…우리 딸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응…….”
조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
나는 마리와 여행을 하며, 느꼈던 모든 일들과, 지금 내가 마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골라,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모두에게나 끝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법이라면…….”
-아빠 끝까지 가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기억을 잃었음에도 끝까지 가지고 있던 어린 마리의 말.
“끝까지 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그것이 허무했던 복수를 멈추게 해주었고,
나를, 나로써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끝까지 가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어떻게 끝으로 가는가지.”
지금이야 말로, 마리를 구원할 유일한 해답.
나는 마리 너머로 보이는 시커먼 통로를 보았다.
그래.
이것은 마리가 만들었다던, 산나비를 찾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설정이 아니었다.
그 보다 더,
위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선택할 길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선택.
나는 그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옳겼다.
“어, 어디가는 거야, 아빠?”
당황한 마리의 목소리에 발이 절로 멈춘다.
“내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으니, 내 손으로 끝맺게 해다오.”
“싫어! 죽으려면 나랑 같이 가!”
어린아이의 치기가 다시금 나를 붙잡는다.
“마리야…”
나도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식의 짧은 만남으로 긴 이별의 시작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한다.
나는 마리를 안아주는 대신, 작업용 상자에서 남은 마지막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이게 뭔지 기억나니?”
마리가 눈물 뚝뚝 흘리는 얼굴로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받아들었다.
“…철 호랑이.”
그래,
네가 가지고 싶다던 철 호랑이란다.
대장님이 되고 싶다던, 그때 그 기억.
하지만 많은 말을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파직, 파지직.
땅이 흔들리며, 제어실에 있던 화면들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이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나를… 기억해주렴.”
이제는 나를 붙잡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야한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네, 알았어요…….”
쉽게 수긍하는, 마리의 말.
나는 오히려 마리의 그 말에 놀랐다.
‘더 붙잡을 줄 알았는데…….’
마리의 얼굴을 보니, 나는 나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았다.
아직도 눈물이 방울방울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마리의 두 눈은 이미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아빠를 보내는 것에, 인정할 줄 아는 멋진 어른의 표정을.
이미 마리는 내가 아는 치기어린 8살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해야만 하는 선택을 할 줄 아는 열 여덞살의 금마리였다.
언제 이리 컸을까.
“이렇게 멋지게 자라줘서 고맙다.”
결단을 내린 강인한 눈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진짜 내가 없어도 괜찮겠구나.
흔들리려던 마음이, 콘크리트처럼 굳건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렇게 등을 돌리며, 원자로 노심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해서 즐거웠다.”
아쉽다는 말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철호패를 마리에게 맡겼다.
그 자리는 이미 잘 넘겨주고 왔다.
“나의…대장님.”
진짜 나의 대장님에게…….
“아빠!!”
아빠를 부르는 딸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마리가 부동 자세를 취하더니, 경례 자세를 취했다.
조금은 어슬프지만, 그럼에도 나를 보내겠다는 그런 자세.
마치, 그 모습이 오래전 나를 보낼 때, 취하던 마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벚꽃이 흩날리던 날,
얼굴 크기에 잘 맞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고,
-제군 산딸기 대원을 구출해주게.
라고 힘차게 말하던 마리의 모습.
나도 마찬가지로 경례자세를 취했다.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산딸기 대원을 구출했던 그때처럼.
똑같이.
그렇게 나는 어두운 통로로 향했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는 원자로의 구멍.
저 깊은 곳 융해되기 시작하는 노심이 보였다.
나는 그곳을 향해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로봇으로는 지을 수 없는 미소를 가슴 한 가득 안으며,
‘꼭 행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