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영도"의 단편소설 '키메라'를 거의 그대로 패러디했음을 말해둡니다(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115773&novel_post_id=6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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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로이드’가 산산이 분해되며 엄청난 양의 체액을 흩뿌렸다. 그 바람에 우린 그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걸 뒤집어쓰면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 몸을 묶고 입에 처박혀 있던 촉수들도 놈의 몸에서 분리되었고 내 입도 자유로워졌지만 내 몸을 묶은 걸 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자유스럽게 결박당한 자세로 비명만 악악대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머리 위로 '바이오로이드'의 몸에서 부서져나간 파편들 – 대부분은 닥터가 연말맞이 청소 때 버리려고 했던 온갖 썩고 냄새나는 쓰레기들 - 이 정체 모를 액체들과 함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닥터와 나를 묶고 있던 촉수니 넝쿨이니 코브라 박제니 이그니스 브래지어니 등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묶인 채 온몸으로 그걸 다 맞아야 했다. 이 악취나는 진눈깨비가 그치고 나자 우린 구겨지고 후줄근해지고 푹 젖은 생쥐꼴이 되어 땅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그걸 본 리앤이 코를 감싸쥐었다.
“으엑, 냄새”
"리..리앤, 대체 어떻게....아, 일단 고마워.“
”뭘“
리앤은 생긋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재차 질문했다.
”도대체 저 망할 자식을....“
나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이오로이드’의 부서져 흩어진 파편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퍼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충 아무곳이나 바라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어떻게 처리한 거야?“
리앤은 그 싱긋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은 채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문제. 현존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제거하려는 팔다리 많고 꼬리에 뿔달린 불, 냉기, 독성, 전기 다 뿜는 바이오로이드가 NTR을 당할 바에야 자1살하게 만드는 페티쉬가 뭘까?”
조금 복잡한 문장이라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뒤의 말은 이해했다. 그러니까, 리앤의 말에 따르면...아니 이거 모순 아닌가? 내 표정을 이해한 그녀가 잔잔하게 웃으며 철학책을 톡톡 쳐 보였다.
“모순에는 파괴적인 힘이 있지”
말하자면 이것이다. 리앤은 저 사랑꾼, 혹은 얀데레 ‘바이오로이드’에게 최악의 도발을 가했다. 순애 페티쉬 혹은 얀데레인 사람에게 NTR이란 두 눈 뜨고 못 볼 죄악이요 어두운 밤 자위행위를 위한 취미로조차 소비해선 안 될 폭거일 터다. 특히 녀석처럼 사랑과 성1교를 구분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따라서 리앤의 정의대로 저 ‘바이오로이드’가 순애 사랑꾼 내지는 그게 폭주한 얀데레라면, 저 녀석은 리앤을 찢어발겨 죽이려고 달려들어야 정상....
“아아”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얼굴에 이해의 빛이 찾아들자 리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저 아이는 스스로가 사랑이 없는 바이오로이드라고 선언했지. 그게 맞다면 내 말은 쟤한테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았어야 했지. 상처받을 순애가 없으니까. 그리고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저 ‘바이오로이드’는 리앤을 해칠 수 없다. 그 스스로가 약속했으니까. 세상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멸절하고 난 뒤에야 그녀를 죽이기로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스스로가 ‘사랑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인정한다면 ‘현존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죽이겠다’는 그녀(?)의 선언이 위기에 처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 ‘현존하는 바이오로이드’니까.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죽인 다음에야 죽겠다” 거나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반박이 되지 못한다. 전자는 어찌 되었든 자신이 파괴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단 의미인데다, 닥터에게 해준 약속과도 배치된다. “가장 마지막에 죽을, 사랑을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닥터여야만 하니까. 후자는 “그러면 니 녀석도 언제든지 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거 아니냐?”란 반박이 돌아오고.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관철한다면 자신의 마음에 파멸적인 위해를 가한 리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된다. 이 끔찍한 모순 속에서 ‘바이오로이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길은...그 문제의 중심에 있는 존재, 모순의 핵심인 자기 자신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치명적인 논리적 고통의 대상인 그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
“그러니까 저 불쌍한 녀석은 그 자신이 만든 말에 그 스스로가 묶인 셈이군. ”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 말을 받아주었다.
“뭐,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3년째 바이오로이드들과 질펀하게 몸을 섞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리앤의 그 금태양 같은 한문장이 어지간히 천박하게 들렸어야지. 그래서 나는 그 다음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정말 쟤를 어린애 다루듯이 했는데...”
“태어난 지 몇 시간 안 되었으니까 애나 다름없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이제 갓 세 살인데.”
“헤에. 왓슨이든 쟤든 몽구스 말썽쟁이들 다루는 것보다는 쉽지. 홍련 씨가 정말 고생이 많아”
“하여튼. 그래서 쟤는 대체 정체가 뭐야? 혹시 리앤 너는 알고 있었어?”
그렇게나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리앤은 눈을 다시 찡긋했다.
"다시 문제. NTR을 당할 바에야 자1살하게 만드는 페티쉬를 가졌고 현존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제거하려는 팔다리 많고 꼬리에 뿔달린 불, 냉기, 독성, 전기 다 뿜는 바이오로이드는 뭘까?”
그저 앞의 질문과 앞뒤만 바뀐 문장이었지만, 그 말에 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거다. 그런 존재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의미다. 하기야 그렇다. 우발적으로 생겨났고, 다시 만들어질 수도 만들어질 리도 없는 존재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찌 알 것이며, 굳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길게 골머리 앓을 필요도 없다. 우리에겐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인류를 재건하고,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도덕적인 일을 하고,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리고.....사랑을 하는 것.
내가 어느 정도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리앤은 내 옆 조금 떨어진 곳에 널브러져 있는 닥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으으으 하고 신음하는 그녀의 입에, 아직도 꿈틀거리는 촉수 하나를 밀어넣었다.
“으으읍?!”
“자아, 자, 닥터 넌 오늘 너무 말썽 피웠어”
입에 딜도를 집어넣는 것 같은 야릇한 광경이긴 했지만 리앤의 말은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이긴 했던지라 – 오늘 이 사태의 근본적 원흉이 과연 누구였겠는가! - 나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사실 내가 뭘 도와주려 해도, 나 역시 지금 온몸이 아직 움찔거리지만 힘이 강하게 남아 있는 촉수에 휘감겨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가 거기서 몸을 돌려 걸어나가자 나는 그 ‘말썽’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리앤! 우릴 풀어주고 가야지!”
“왑왑왑왑왑!”
묶인 채 입 안의 촉수를 빼내려 애쓰다가 철퍽 엎어져 버린 닥터도 나와 같은 내용의 말로 짐작되는 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멈춰선 리앤은 우리를 살짝 돌아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말 속에서 살짝 삐진 듯한 어투를 읽었다. 뭔가 오늘 이 ‘바이오로이드’ 때문은 아닌 듯한.
"오르카 저항군을 전멸시킬 뻔한 둘에게 그 정도 벌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뭐? 아니, 하지만 정작 제일 위험했던 건...."
"그리고 내가 사령관실에 혼자 가서 책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준 왓슨은 특히 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무슨 말인가. 그녀가 책이 필요하다고 했고 내가 사령관실에 가서 가져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왜 그녀가 화날 거리나 되는가. 총총 사라져버린 리앤의 흔적을 쫒다가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닥터를 돌아보았다.
“아니, 닥터야.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도와준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뜻이야?”
그러자 널브러져 있던 닥터는 퍽 한심하다는 듯한, 자세히 보니 비웃음도 좀 담겨 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거, 지난 겨울 때 닥터가 나한테 레오나 세 시간 목욕 운운하던 때랑 비슷한 그 시선이다. 허나 아직도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한 나를 보고 닥터는 한심을 넘어 짜증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보였고, 이윽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늘의 난리통으로 쓰러져 버린 연구실의 책장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책장? 책? 그래. 책 빌려줬지. 철학 책.....”
똑똑한 리앤이 드라코 재우자고 굳이 꼭 ‘방법서설’이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리는 없다. 다른 책들도 많으니까. 드라코를 재울 만한 책을 찾으려면 구태여 귀찮게 날 찾아올 것 없이 오르카 도서실에 가서 하르페이아에게 물어도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녀가 나 오기 전에 물어봤다던 그 하르페이아 말이다. 아니, 드라코를 재우고 농땡이를 피우자고 굳이 책이라는 방법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똑똑한 그녀에게는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분명 아까 전에 ‘책 같이 읽을까’를 물어보려고 구태여 내게 다시 돌아왔었지. 그러니까 이건.....
“....나랑 같이 책 읽고 싶었던 거구나”
사령관실에서 단둘이 말이다. 오붓하게. 드라코는 그저 핑계였고. 그런데 그게 오늘 닥터가 벌인 일로 방해받아 무산되었고, 나란 놈은 아무런 눈치가 없었고...나는 “아아” 하는 소리를 냈고 닥터는 그런 나를 보며 입이 막혀 이상한 소리로 비웃었다. 나는 그 비웃음에 동감했다. 닥터든 리앤이든 줘도 못 먹는 이 한심한 남자에게. 생각해보면 닥터의 당초 계획도 나랑 오붓하게 시간 보내는 거였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녀의 비웃음에 동감하는 것과 별개로 그 괴이한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자못 진지하게 난장판이 되어버린 연구실을 둘러보고선 심각하게 말했다. 드디어, 아까 입이 막혔을 때 닥터에게 농락당한 걸 복수할 차례다.
"닥터야, 네가 저지른 일들 보니 깨달았어.“
”?“
”다음 해 연구실 예산은 삭감이다. 이거 다 니가 청소하고. 이의 없지? 아 없다고? 그럼, 당연하지!"
"꾸아아아악!!!"
< E N 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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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가 사령관에게 레오나가 세 시간 동안 샤워했다는 이야기를 해 줬던 게 어떤 이벤트였는지 기억 안 나네요. 초코여왕이었던가? 뭔가 연말의 겨울 이벤트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ㄴ수정: 운영자님의 덧글 보고 알았습니다. 메인스토리 7지역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실존하는 책이고,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도 그러합니다(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63139156)
(IP보기클릭)175.126.***.***
아 봄의 메인스토리였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IP보기클릭)58.227.***.***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순으로 인한 자기파괴라 하니 생물보다는 ai에 가까운 느낌이군요. 생물들은 보통은 자기 보호 본능 때문인지 일정 선에서 논리 구조를 무시해버리고 넘기지만, ai는 사전에 제약을 걸어두지 않으면 폭주해버리니까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4226 말씀하신 닥터의 레오나 예시는 메인 7-4 op에 언급됬고, 메인 7구역은 봄에 있던 일로 알고있습니다. 초코여왕과 요정마을 사이에 있던 일이 7구역이죠. 레오나의 목욕 에피소드 자체는 정확히 언제 있던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요.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81911 초코여왕부터 메인 및 낙원까지의 스토리 순서는 낙원 1-2 op에서 정리해줍니다.
(IP보기클릭)175.126.***.***
아 봄의 메인스토리였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2.12.21 14:04 | |
(IP보기클릭)58.227.***.***
완전 생물이 자기 보호를 위해 모순을 무시하고 본능대로 움직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으려나싶습니다. 완전생물이라 명령권도 안먹혔을거같은 느낌인데. 어쩌면 평행세계의 철의 교황이 아니었으려나 싶었습니다. 리앤과의 대화 이후 오르카를 멸망시키고 더 완벽해지기 위해 몸을 기계로 바꾸고 철충의 시초가 되었다든가. 이후 모든 사랑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과거에서부터의 침공을 감행해 타임 패러독스가 벌어진다든지. 길게 써보니 사령관이 사실은 철충이었다같은 느낌의 얘기가 되버렸군요ㅎㅎ | 22.12.21 14: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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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읍니다 ㅎㅎㅎㅎㅎ | 22.12.21 14:40 | |
(IP보기클릭)175.215.***.***
솔직히 이러다가 닥터가 실험 조수 부족하다고 사령관 복제하는 장치 만드는것도 나올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2.12.21 14: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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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행복의 근원'아닌가요 ㅎㅎㅎㅎ 원래 그것도 키르케의 가마솥을 배경으로 구상했다가, 원작보다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읍니다. | 22.12.21 14: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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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R은 용서못하는 진정한 순애...! | 22.12.21 21: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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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원작이 그렇게 논리싸움 하는 이야기라서 자기모순에 빠지면 죽어야죠 ㅎㅎㅎ | 22.12.25 17: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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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앤이는 사령관이랑 좋은 시간 보내려고 핑계까지 만들어서 온건데 사령관은 닥터랑 둘이서 사고나 치면서 바보쇼 하고 있으니 벌주고 싶을 수밖에요(?) ㅎㅎㅎㅎ | 22.12.25 17: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