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영도"의 단편소설 '키메라'를 거의 그대로 패러디했음을 말해둡니다(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115773&novel_post_id=6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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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한참 진행되고 나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말은 취소해야 될 것 같다.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들 이 하고 있는 고민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모든 인간된 – 22세기쯤 뒤부터는 바이오로이드도 – 자들의 고민인 것이다.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해 애쓰다가 절망해 버린 철학자는 몇 명이며 자1살해버린 예술가는 또 몇 명이더냐. 그리고 내가 알기론 인류 멸망 순간까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과학적이고도 명료하며 보편타당하며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정의해 낸 인간은 없다. 오죽했으면 기술적 특이점도 일으킬 수 있다는 바이오로이드, 닥터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 포기하듯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을까.
"요즘 오르카에서 누가 가장 연애대상으로 인기있지? 그 양반에게 물어봐야겠다"
“그거 나잖아”
“그러네. 오빠가 가장 잘 아는 거 아니야?”
“글쎄, 내가 너희 바이오로이드들한테 과분한 애정공세를 받고 있긴 하지. 하지만 사랑을 받는 사람이 꼭 사랑을 잘 안다곤 말할 수 없잖아. 예컨대 엄마의 사랑을 한껏 받는 아이가 모성애에 정통한 건 아니잖아?”
“흐음. 듣고 보니 그러네. 아! 그러면 반대로 오르카에서 가장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언니를 찾으면 되겠구나! 오르카에서 오빠랑 한번도 안 자본 언니가 누구지?”
"그런 논리에는 찬성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굳이 그러고 싶다면 시저스 리제와 아동조만 제외하고 유이한 두 명이 내 눈앞에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군."
닥터가 으르릉거렸다.
"당당히 비판할 줄 하는 사람이 참된 친구라지만, 오빠 왜 자꾸 그렇게 따박따박 내 가설을 박살내는데?"
“그래도 좋은 시도였어. 그렇게 시간을 들이다 보면 언젠간 타당한 합의점에 도달하겠지. 으음, 일단 사랑과 성교의 차이를 구분...”
여기까지 멈추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이 토론에 몰입하느하 한참 딴 데로 새버렸지만 비로소 생각난 사실이 있으므로.
난 죽었다 깨도 저 ‘바이오로이드’랑 성교할 수 없다.
어쨌든 간에 나는 저 ‘바이오로이드’와 그걸 해선 안 된다. 아니, 당연하잖은가. 어떻게 저 칼날 돌아가는 부위에 내 걸 집어넣으라고. 설혹 저 부분이 저 ‘바이오로이드’의 생식기에 해당하는 부위가 아니더라도, 나는 정체불명에 불가사의하며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존재의 – 레아 팬티에서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녀석이다 - 어떤 부위에든 내 가장 소중한 신체부위를 들이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이상성욕이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지고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내가 저 ‘바이오로이드’와 ‘그 짓’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새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렸지만, 애초에 이 토론의 원래 목적은 바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즉각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다음 저 ‘바이오로이드’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격심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과 상관없이 제조자와 ‘바이오로이드’는 신나게 토론을 계속했다.
”사랑에 대한 표현들을 사전에서 찾아봤어. 달콤하다, 감미롭다, 낭만적이다, 아름답다, 빠져든 자를 미치게 만든다. 열정, 비이성, 연심, 밀당...으아아 머리 아파! 뭐 이렇게 연관어가 많아? 그것도 죄다 애매하고 명백히 정의되지 못한 것들이고!“
”그렇다! 비합리적이다!“
”그래! 비합리는 진보와 발전의 적이거늘! 왜 다들 이 개념도 제대로 안 잡힌 것 때문에 그렇게 죽자고 고생하는 건데!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추구할 수 있지?“
“나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어떤 행동도 ‘사랑’이 붙으면 정당화된다니, 이것은 전가의 보도인가?”
“으아아! 멸망전 인류에게 맹세코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를 고문하려고 만들어 낸 정신적 자1살도구야!”
......저들의 저 가엾기까지 한 연애관은 나를 내 고민 속에 마냥 침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한테 어필해도 – 나는 어린애 건드리는 취미는 없다 – 보답받지 못하는 초천재 바이오로이드와 알려주기 전까지는 자기 페티쉬도 모르던 자칭 ‘바이오로이드’가 저렇게 죽이 맞는 모습은 내 눈에 신비하게까지 보였다. 어쨌든 그들의 황당한 대화는 뜻밖에도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랑 따위 필요 없어, 언니! 나처럼 독신으로 살라고!"
"그렇다! 제조자 닥터여, 그대가 존경스럽다. 그 위대한 결정과 실행력에 탄복한다!"
"독신은 구질구질하다느니 순결은 재미없다느니 하는 말 다 엉터리야. 나한테 손을 안 대는데 어쩌란 말야? 다른 언니들은 그럴 일 없으니까 배가 쳐불러서 하는 말이라고!"
"옳다! 놀랍다! 참으로 그러하다!"
어쩐지 닥터의 저 말은 반 정도는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지만....나는 그녀들의 비틀린 연애관을 좀 개선할까 하는 마음을 재빨리 억눌렀다. 결코 건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없지만 내 고민이 해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바이오로이드’가 성교를 포기하고 순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면, 닥터와 나의 고민은 – 내 소중이에 대한 위협도 - 일거에 해결되어 버린다.
그러나 개선했어야 했다. 옳지 못한 과정은 옳지 못한 결말만을 부른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가 당당하게 외칠 때까지도 나는 그저 문제가 해결되어 감에 안도하기만 하고 있었다.
"나의 목표를 바꾸리라!"
드디어 목표 달성이 눈앞에 보이자+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생기자(?) 닥터는 신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 순결하게 살아버리라고!"
"물론 나는 그럴 것이다.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다른 목표가 있다!"
"어떤 목표지?"
"제조자들이여, 나의 탄생목적을 뚜렷이 해준 그대의 일깨움에 감사한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사랑을 제거하겠다! 마지막 커플, 마지막 연애, 마지막 부부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매우 애처로운 침묵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백과사전에 필적할 만한 닥터의 실험 실패 기록에서도 이번의 실수는 꽤 여러 쪽을 차지할 수 있는 거대한 실수일 것이다. 저 ‘바이오로이드’의 선언이 사실로 이루어진다면 “그저 연말맞이 대청소를 했을 뿐” 이라는 변명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하기까지한 적막을 깨고 닥터는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건 안 돼!"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가?"
"그건 불가능해!"
"아니다. 불가능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인간 혹은 인간에 준하는 바이오로이드이지 않은가?“
”그, 그런데?“
”그리고 사랑은 타자에 대한 관계 혹은 감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에 인간이든 바이오로이드든 하나만 남으면 사랑은 사라진다. 나는 바이오로이드라 인간을 해할 순 없으니 현존하는 세상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제거하면 되겠군."
철충들이 들으면 기립박수를 치다 못해 환호와 열광에 차 춤이라도 추겠군. 이 무지막지한 대량살인 계획 – 멸망 전 인간들이면 몰라도 내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다 - 에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야! 그건 살인이야!!!”
“아니다! 이것은 정화다! 오염된, 추악한, 원시적이고 유치한 본능으로부터 모든 지성 가진 것들을 구원하기 위한 정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들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킬 정화! 지고한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위한 정화!!”
“다 죽는데 무슨 정화야!”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랑을 느끼지 않는 새로운 바이오로이드를 만들면 된다.”
이 무슨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야, 이 멍청한 자식아! 사랑이 없어지면, 어, 종족 보존은 어떻게 하냐! 사랑이 있었으니까 우리 종족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라고!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냔 말이야!”
그리고 나와 오르카의 목적은 인류를 번영시키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데 인류를 어떻게 번영시키며, 그런 인간들이 번영해 봤자 세상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는 눈 – 어딜 눈이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논쟁거리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군. 사랑을 정의하지 못하는 짐승도 성욕은 있고 번식은 한다. 사랑하지 않는 두 이성개체가 강1간을 해도 번식은 성립한다”
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 지식을. 토론 중에 닥터가 어지간히 많은 지식을 – 그러나 뒤틀린 방식으로 – 주입했나 보다. ‘바이오로이드’는 기겁한 나의 필사적인 반박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제조자들이며, 그대들은 멸망 전부터 이어져 온 관습과 구태의연한 학습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대들에게 동참을 부탁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일 것 같군.“
그 녀석은 몸을 돌렸다. 물론 다른 생명체들이 취하는 그런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몸이 뒤쪽을 향하도록 신체기관들이 ‘재배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저거 진짜 바이오로이드야?? 어쨌든 우리들에게서 몸을 돌린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초조해졌다. 저 걸어다니는 자연재해 자식이 진짜 일을 벌이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최소한 변명거리는 만들어 둬야 하지 않겠는가.
닥터와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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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충들 사이에서는 VIP가 아닐까요 ㅋㅋㅋㅋㅋ | 22.12.21 13: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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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부터 이렇게 철학 이야기 하다가 사고를 치죠 ㅎㅎㅎㅎ 결국은 개그 이야기지만요 | 22.12.25 17: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