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좀 센치해져서 일기장 안 적을 것 같아서 미리 적음
[로제타가 보고있을 메모장]
지금은 괜찮습니다.
과거사 주의
빨간약(?) 주의
긁어서 보시오
어릴때 반지하 단칸방이였는데 상태가 좋은 곳은 아니라 폐렴에 걸려서 병원신세를 진적이 있다
어릴때는 전반적으로 기억이 좀 날라가 있어서 자세히 말은 못하지만 학원은 대부분 친구들에게 부끄럽지말라고 1-2개월만 다니다가 그만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안갔었다고하면 눈치보니까) 집에 케이블 티비가 없어서 친구들이 말하는 애니메이션이나 그런거 눈치껏 귀동냥하면서 아는척하면서 살아갈려고 했지만 주위 또래 친구들 이야기 못따라가서 왕따당했었음 + 장난감은 책뿐이였음
아빠가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는데 반지하집이였는데 발령난 곳이 회식이 좀 심한 곳에 일에 치이는 곳이라 아빠의 알코올중독이 시작됨 이때부터 아빠는 일을 점점 안나가게 되고 내 간식은 아빠가 남겨둔 커피땅콩이나 오징어땅콩 아니면 짱구같은 과자들이였음
이때 그래도 발령난 곳이 서울이라 지역아동센터를 다닐 수 있게됨! 문제는 그곳이 목동이였다 영어도 하나도 모르는 내가 애들이 다 문장을 구사하는 곳에와서 영어와 수학이 완전히 뒤쳐진 상태로 지내게 됨 울면서 엄마한테 영어학원가고 싶다고 했지만 돈이 부족해서 조금 배우다가 말았음 그래도 원래 책은 많이 읽었고 다른 애들보다 문제풀거나 책읽은 시간이 많아서 다른 과목들은 잘 따라갔었지만 암기는 역시 힘들어했는데 지금도 힘들어 함 ㅋㅋㅋㅋㅋㅋ
집이 이때도 반지하였는데 창문을 볼 수 있는 형태였다 집이니까 편하게 런닝에 판쓰만 입고 다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자주보고 노상방뇨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린 날보고 딸치는 거였더라 음
밥은 지역아동센터에서 먹었고 아동센터가 안 여는 날 특히 주말은 교회에서 먹었다 어린이라 천원만 내도 괜찮았고 엄마가 간간히 데리러 오면서 만원 내고 간걸로 기억함 친구들도 있었고 다들 간식도 잘줘서 그래서 당시에는 신앙심이 최고로 높았다(지금은 무교임) 신이 아니면 기댈곳이 없었다가 더 큰 것 같다 그냥 간절했다 이 모든에 잘 끝나길 아빠가 안아프고 다른 애들 같이 지내고 싶은게 컸다 나도 학원다니고 공부 더 열심히 하고 싶었다
교회도 지역아동센터도 안열리면 엄마가 일하던 토마토 김밥이라는 프렌차이즈점에 가면 항상 먹을 걸 그냥 해주셔서 좋았다. 애들은 먹고 크는거라고 그냥 여기선 먹을거 막시켜도 된다고해서 어린땐 왜 돈이 안되는 일은 하지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지금보니 그냥 좋은 사람이네
다시 가세가 더 기울어져서 다른 서울 지역으로 이사갔는데 여기는 목동보다 프리해서 그냥 사는대로 살아도 상위 10%는 유지해서 되게 신기했던 기억이 있음 나라에서 지원해줘서 방과후학교나 돌봄교실에서 편하게 지냈음 학교 선생님들이 성실함과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특수 교실이나 교육에 넣어주기 시작함
중3때 중학교 시절부터 국내대회 등에서(전공쪽) 상을 받아 외가쪽(한인교포1세대)의 집으로 갈려했지만 집안 계좌가 3천만원도 없어서 미국 비자습득에 실패해 미국도 가기전에 검사 또 따로받아야되는 걸로 알고 있음 이때부터 영어공부 의지가 박살나서 공부 지금 다시하는 것도 있음 고등학교때 영어 수업에 잠 < 영어 못한 가장 큰 이유
아빠가 병을 앓다가 죽고 죽기직전의 황달과 복수찬 모습에 성인이되어서도 충격에 술을 못마시고 23살인가 그때 친구가 처음으로 자기 칵테일 배운다고 논알코올 마시게 했다가 단거 좋아하는 내가 술맛을 알게된 계기가 됨 아무튼 술은 그래서 소주를 애초에 잘 안마시고 맛으로만 마심
아빠의 장례식을 진행할 때 다 싼 곳으로해서 주차장이 없는 수준의 장례안치소 (나중에 알기로 이것도 국가에서 빌려주는? 그런곳이였다고함) 에서 다 싼 옵션으로 빌렸었다 유일한 아빠의 친구인 삼촌이 날 보고 널 어떡하냐고 널 어떡하면 좋냐고 울면서 안아주셨음 진짜 아이가 없는 집이라 나를 오히려 딸로 생각해주시고 만날 때 마다 잘해주신 분인데 나중에 너 결혼하면 아빠대신 내가 너 바라다 주고 싶다고 아빠랑 약속했다고 함 그때는 그냥 멍해서 아무생각 안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친구대신 친구 딸 결혼식에 나선다는게 그냥 좀 마음 찢어지네
그 삼촌한테 대학원 들어갔다고 연락드렸을 때 용돈 100만원 보내주셨다 전화하면서 그냥 둘이 오열하면서 다행이다...다행이야...아빠꿈을 니가 이뤄져서 고맙다 함...
발인도 다싼거였는데 이거 다 싼거구나 느낀게 유골함이 흙으로 된 토기였다 그냥 도자기도 할정도도 돈이없던 것 같다 당시엔 할머니보다 아빠가 먼저 떠나서 할머니의 자리에 아빠가 먼저 안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죽어서 아빠는 아빠에게 돌아갔다. 나중에는 할머니는 할머니 자리에 아빠는 다른 자리에 안치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대회 습득한 경력이 있고 해서 고등학교 전액 장학금으로 다녔고 생활비는 따른 장학재단에서 지원해줘서 달마다 용돈없이 생활이 가능했음 이때 용돈덕분에 일반인처럼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고등학생이라 힘들었다.
학교에서 대학진학과 취업중 둘 다 가능성이 있어서 고민을 많이하셨는데 대학교를 지원해주는 회사가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서 대학교와 회사일을 둘 다 병행했다. 대학교측에서도 애초에 이정도면 그냥 장학생 생활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함
회사일 다니면서 학교 보내주니 뭐 솔직히 최저긴했는데 진짜 돈이 없어서 다이어트한다고 속이고 구운계란 많이사고 두유도 많이사서 점심에 그것만 먹고 버티고 그랬다
회사가 진짜 복지가 좋은 편이여서 아침밥이 나오는데 아침밥 먹고 점심에는 계란으로 버틴 것 같다 예전에는 계란 2판에 만원이라 좋았음
대학교는 그렇게 수석으로 졸업함
아빠는 내가 잘되가는 모습을 보지못하고 죽은게 안타까움 죽어서 보시겠죠
저는 국사무쌍해서 기뻐요 진짜 괜찮아요
나 심지어 호시노도 있음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