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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과거에 쓴 글들 재업

※ 신라의 보물 : 삼기(三奇)와 삼보(三寶)

 

1. 금척(金尺)

 

금척리 고분군1.jpg

- 경주시 건천읍에 소재한 금척리 고분군 전경 -


신라의 삼기팔괴(三奇八怪 : 3가지 기이한 물건과 8가지 신기한 풍경)중 삼기에 해당하는 첫 번째 보물.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가지고 있었다는 금으로 만든 자.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는, 꿈속에서 신인이 내려와 '그대의 자질이 훌륭하다'며 이 금자를 주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병든 이를 재면 병이 즉시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능히 그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중국에서 사신을 보내 금척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무덤을 수십개 만들고 거기에 숨겨두어 찾지 못했다 한다. 

그 설화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지금의 경주시 건천읍의 금척리 고분군이다.

 

몽금척.jpg

 - 조선초, 이성계의 금척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악장인 '몽금척'에 등장하는 금척 -

 

금척설화는 군주의 정치권력에 대한 정당성과 신성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으며,

 따라서 조선건국 시기, 일명 '몽금척' 설화로 다시 활용되기도 한다. 

내용은 이성계에게 신인이 금자를 내린다는 똑같은 내용이다.

 

 

 


2. 수정화주(水晶火珠)

 

 

선덕1.jpg

 - 문명6 에 등장하는 한국문명의 지도자 선덕여왕. 대충 서원농사로 너를 뭉개버리겠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신라의 삼기팔괴(三奇八怪 : 3가지 기이한 물건과 8가지 신기한 풍경)중 삼기에 해당하는 두 번째 보물.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불을 일으키는 수정구슬. 백률사에 보관했으나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분황사 수정구슬.png

 -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리갖춤에서 출토된 수정 -

 

수정화주는 아마도 실존했을 확률이 높은데, 

출토된 유리 구슬 등을 보면실제로 볼록렌즈 역할을 하여 불을 붙일수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신라는 장안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엄연한 교류지역 중 하나였으며, 

출토되는 다양한 유리제품을 볼 때, 서역에서 들여온 유리제품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3. 만파식적(萬波息笛)

 

 

만파식적2.jpg

 

 

신라의 삼기팔괴(三奇八怪 : 3가지 기이한 물건과 8가지 신기한 풍경)중 삼기에 해당하는 세 번째 보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편'에서 만파식적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신문왕이 즉위한지 이듬해(682년), 동해에서 작은 산이 감은사 방향으로 떠내려왔는데

이에 신문왕이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 김춘일(金春質)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대왕(문무왕)께서 참으로 거룩하시옵게도, 용이되어 삼한의 바다를 지키고 계십니다. 

거기에 김유신 공 께서도 삼십삼천(불교에서 제석천이 다스리는 곳)의 신이 되어 신라에 내려왔습니다.

두 분이 장차 신라를 지킬 보물을 내리려 하시니 행차하시면 둘도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이 이견대(利見臺 : 현재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행차하여 섬을 보았는데,

거북이 처럼 생긴 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 밤이되면 합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폭풍이 몰아쳐 천지가 진동하니, 왕이 감은사에 며칠 머물다 잠잠해진 틈에 섬으로 갔다.

 

섬에 들어간 신문왕 앞에 용이 내려와 옥대를 바치자, 왕이 섬의 내력에 대해 물었다. 용이 말했다.

 

"섬이 갈라졌다 합쳐지는 것은 손뼉을 치는 원리와 같습니다. 떨어지면 소리가 안 나지만

합쳐지면 박수 소리가 나는것과 같습니다. 여기 솟은 대나무도 합쳐진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이는 거룩한 왕이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입니다. 이는 용이 되신 선대왕과 김유신 공이 내리는 것입니다."

 

이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고 월성의 천존고(天尊庫 : 신라의 보물창고)에 보관하였는데

적이 올 때 불면 적이 스스로 물러가고 병이 돌면 병이 나았으며 폭풍과 재해를 물리칠 수 있었다.

 

효성왕 때인 693년, 화랑 부례랑(夫禮郞)이 낭도들과 강원도에 놀이를 갔다가 오랑캐에 붙잡혀

죽을뻔 하였는데, 이 때 만파식적을 불려 했으나 잃어버려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 관음상에 빌었더니

잃어버렸던 만파식적이 돌아오고 부례랑도 살아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고쳤다고 한다.


만파식적.jpg

-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옥적(옥피리)'. 위의 것이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신라옥적, 아래가 광해군때 다시 만든것 -

 

 금척 설화에서 처럼, 신라는 통일 이후 왕권을 다시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만파식적 설화이다.

왕의 통치에 대한 신성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신물과 그에 따른 기이한 일을 설명하면서 통치에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호국룡이 된 문무왕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통일 후 각지의 불안 요소나 왜구와 같은 대외적 위협에 맞서

호국정신을 고취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음악사에 있어 이러한 만파식적을 대금(大笒)의 원류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만파식적은 천존고에 보관중이었다가 조선 초 소실되었으며, 이에 광해군이

다시 만들도록 한 것이 노란색 옥피리이다. 

 

초기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옥피리는 김승학이라는 향리가 경주 동경관 담장에서 발견하여 보관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에서 보관하다가, 1973년 다시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4. 천사옥대(天賜玉帶)

금관총 금제 허리띠 (국보88).jpg

-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국보 88호 - 

 

 

신라삼보(新羅三寶 : 신라의 세 가지 보물)중 하나로, 하늘이 진평왕에게 내려준 허리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편'에서 천사옥대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진평왕이 즉위한 해에, 하늘에서 사자를 보냈다. 

하늘의 사자는 월성의 궁내 뜰 앞에 내려와 진평왕에게 말하길,

 

"옥황상제께서 제게 명하시길, 이 옥대를 전하께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무릎을 꿇고 이 옥대를 받았고, 이후 모든 나라의 제사를 지낼 때면

반드시 이 옥대를 착용하고 제사를 지냈다

 

후에 고구려가 신라를 치려고 마음먹었을 때, 

신라를 지켜준다는 신라삼보에 대해 전해 듣고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신라 왕권의 상징처럼 여겨졌는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이 천사옥대를 내어 왕건에게 바쳤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5. 황룡사 구층목탑(皇龍寺 九層木塔)

 

황룡사3.jpg

 

- 황룡사 구층목탑 상상도 - 

 

신라삼보(新羅三寶 : 신라의 세 가지 보물)중 하나로, 지금의 황룡사지에 있었던 거대한 목탑.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탑상(塔像)편'에서 황룡사 구층목탑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선덕여왕 즉위 5년째, 당나라로 유학갔던 승려 자장(慈藏)은

오대산에서 수행 도중, 문수보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귀국의 임금은 전생에 인도의 왕족으로, 이미 불교의 가르침과 인연이 있으나,

신라의 산천이 험하여 사람이 거칠고 사나우며, 미신을 믿는 탓에 하늘의 재앙을 입기도 한다네.

허나 나라에 공부하고 듣는 승려가 많아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평화로운 것이라네."

 

이에 감격한 자장은 다시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다가 그곳의 신령을 만나게 된다.

신령은 자장에게 근심이 있는가를 물어보고, 자장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 신라는 고려나 백제 뿐 아니라 말갈이나 왜가 자주 침범하니 근심이 많습니다."

 

이에 신령이 답하길,

 

"귀국의 임금은 여성으로, 왕위에 있으나 덕이 없소이다. 

귀국의 황룡사에 있는 용은 나의 아들인데 그곳으로 돌아가 9층의 목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주변의 국가들이 항복할 것이며, 탑을 세운 후 팔관회 등을 베풀면 외적이 침범치 못할 것이오.

또 나를 위해 수도 남동쪽에 절을 지어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이에 자장은 급히 귀국하여 여왕에게 탑을 세우는 일을 아뢰었다. 

신하들이 논하여 여왕에게 말하길,

 

"탑을 세우는 일은 백제의 장인을 불러야 될 것입니다."

 

이에 초청된 백제의 장인이 바로 아비지(阿非知)였다.

그러나 아비지는 처음 탑의 심주(중심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이 탑이 자신의 나라를 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꺼림칙함에 공사를 멈추었으나,

그러자 갑자기 천지가 깜깜해지고 진동하는 이변이 생겼고

어둠 속에서 노승과 장사(壯士) 한 쌍이 나타나 탑의 기둥을 세우니

아비지가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겨 공사를 계속 하였다고 한다.

 

이웃 나라를 항복하게 만든다는 호국적 성격의 이 거대한 목탑에서 각 층별로 상징하는 국가는 다음과 같다.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황룡사1.jpg

- 3d로 복원한 황룡사 전경 - 

 

황룡사 구층목탑은 신라의 가장 큰 규모의 보물이자 건축물로써

설화에서 보여지듯 호국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큰 불사로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선덕여왕의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다.

 

탑의 높이는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에 의하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刹柱記云 鐵盤已上 高四十二尺 已下 一百八十三尺)

= 총 225척인데, 

 

찰주본기는 탑의 건립 이후 200여년 후에 탑을 다시 중수하면서 쓴 것인데,

찰주본기(탑 수리)시점에 유행했던 길이 단위(당척)으로 계산하면 약 66m쯤 되고, 

탑을 조영하던 당시(선덕여왕 당시)에 유행하던 길이 단위(고려척)으로 계산하면 약 81m가 된다.

이에 대한 견해는 논란이 있으나 아무래도 좋은게 좋다고, 복원은 높은쪽으로 하는듯 하다.

 

 알다시피, 이 커다란 목탑은 대몽항쟁기에 황룡사의 소실과 함께 사라졌다.

 


 

6. 황룡사 장륙존상(皇龍寺 丈六尊像)

 

장륙존상3.jpg

 - 황룡사 중금당에 모셔져 있었을 장륙존상과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16나한들 -

 

 

신라삼보(新羅三寶 : 신라의 세 가지 보물)중 하나로, 지금의 황룡사지의 금당에 모셔져 있던 삼존불상.

 

장륙상이라는 말은, 높이가 1장 6척 정도 되는 불상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탑상(塔像)편'에서 황룡사 장륙존상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진흥왕 즉위 14년째 (553년), 왕이 궁궐로 지으려던 땅에 용이 나타났기에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산 동구 즈음]

에 커다란 배 한척이 떠내려 왔는데, 그 배 안에는 엄청난 양의 쇠와 구리, 금 따위가 실려 있었고

편지도 실려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소카.jpg

 - 인도 전역을 통일하여 제국을 이루었으며 불교를 장려하고 주변국으로 널리 전파시켰던 아소카 왕 -

 

'서천축국(인도)의 아육왕(阿育王 = 아소카 왕)이 황철 57,000근, 황금 30,000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이를 배에 실어 바다로 보내니, 

부디 인연있는 나라에 닿아 장륙불상으로 만들어지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작은 부처상과 보살상 둘의 모형도 함께 들어 있었다.

 

진흥왕은 처음에 동축사(東竺寺)라는 절을 세워 장륙삼존상을 만들어 안치했으나

곧 다시 이 불상을 황룡사로 모셔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황룡사 장륙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땅을 적시는 이변이 생겼는데

이는 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장륙존상2.jpg

 -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불두파편(불상 머리의 파편)을 통해 짐작해본 장륙상의 머리 크기-

 

장륙불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미술 중에서도 손꼽히게 큰 불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상 '장륙'이라는 크기도 5m로서 결코 작은것이 아닌데다가, 

황룡사지에서 장륙상의 것으로 여겨지는 불두 파편이 출토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짐작해본 장륙상의 크기는, 머리만 2m에 달하기 때문이다.

 

장륙존상.jpg

 - 조선 인조 대에 만들어진 금산사의 장륙 삼존불상 -

 

신라때 창건되어 정유재란때 소실된 금산사의 장륙상을 인조 때에 다시 만들었다가

1934년에 화재로 또 소실된 것을 다시 만든 것으로,

원본인 신라 때의 장륙상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다면

황룡사의 장륙상도 대략 이와 비슷한 크기와 외형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황룡사의 장륙불상의 높이는 약 11~12m 즈음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다이지1.png

 


참고로 나라 도다이지의 대불은 높이 약 16m 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결고 작은 크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황룡사 중금당.jpg

 - 황룡사 중금당 -

 

황룡사2.jpg

- 황룡사 금당의 치미 -

 

 

황룡사 구층목탑에 밀려 빛을 못보고 있지만 중금당 역시 매우 큰 단일 건축물로서

금당의 치미(용마루 양 끄트머리에 얹는 머리장식)는 약 높이 약 186cm, 너비 105cm에 달한다.  


 

이 멋진 장륙존상은 대몽항쟁기에 황룡사의 소실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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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에 보이는 신이한 현상들

 

삼국사기1.jpg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집필한 관찬사서이며 기전체

(제왕, 제후의 일대기와 인물의 열전, 각종 잡 지[志]와 연표로 구성하는 방식)

형식을 충실히 따른,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古)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의 서술상 특징은 춘추필법이다. 공자가 중시했다고 하는 서술방식으로, 객관적으로 쓰되 

 

유교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여 그 원칙에 따라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함에 따라, 유교적 시각에 입각하여 충신이다, 옳지못하다 따위의 평을 하기도 한다.

 

한편,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 보면 다소 기괴한 내용도 다수 실려 있는데, 

 

이는 '왕이 정치를 못해서 나라가 개판 됐다'는 뉘앙스를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돌려까고 있던가,

 

어떠한 사건을 암시하거나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 고구려 -

 

28대 보장왕(寶臧王, 고보장

 

7년 서울(평양)의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7년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도 떼를 지어 서쪽으로 향해 갔는데 사흘 동안이나 끊이지 않았다.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령(馬嶺)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가 끝이 없으므로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 曰 汝君臣 奢侈無度 敗亡無日矣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이들을 포획하려다 놓치고 말았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으로 변했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 신라 -

 

 

 

 48대 경문왕(景⽂王, 김응렴) 


7년(서기 867) 여름 5월,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홍수가 나고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 사자(使者)들을 나누어 여러 곳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2월, 객성(客星, 혜성 또는 신성)이 태백성을 침범하였다.

七年 夏五月 京都疫 秋八月 大水 穀不登 冬十月 發使分道撫問 十二月 客星犯太白


8년(서기 868) 봄 정월, 이찬 김예(金銳)와 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기에 사형에 처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가을 8월, 조원전(朝元殿)을 중수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飡金銳金鉉等謀叛 伏誅 夏六月 震皇龍寺塔 秋八月 重修朝元殿

 

10년(서기 870) 봄 2월, 사찬 김인(金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 홍수가 났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十年 春二月 遣沙飡金因 入唐宿衛 夏四月 京都地震 五月 王妃卒 秋七月 大水 冬 無雪 國人多疫

 

12년(서기 872) 봄 2월, 임금이 몸소 신궁에 제사 지냈다.

여름 4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나라 안의 주와 군에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夏四月 京師地震 秋八月 國內州郡 蝗害穀


13년(서기 873)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9월, 황룡사 탑이 완성되었다. 9층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스물두 장이었다. (= 무너진것을 중수한것)

十三年 春 民饑且疫 王發使賑救 秋九月 皇龍寺塔成九層高二十二丈

 

4년(서기 874) 5월, 이찬 근종(近宗)이 모반하여 궁궐을 침범하므로, 궁을 지키는 군사를 내어 격파하였다. 근종이 그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을 나가 도망하였는데, 그를 추격하여 붙잡아 수레에 매어 찢어 죽였다.

十四年 夏四月 唐僖宗降使宣諭 五月 伊飡近宗謀逆犯闕 出禁軍擊破之 近宗與其黨夜出城 追獲之車裂


15년(서기 875) 봄 2월, 서울과 동쪽 지방에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여름 5월, 용이 왕궁의 우물에 나타났는데, 잠시 후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날아갔다.

가을 7월 8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及國東地震 星孛于東 二十日乃滅 夏五月 龍見王宮井 須臾雲霧四合飛去 秋七月八日 王薨 諡曰景文

 

 

 

 49대 헌강왕(憲王, 김정) 


5년 3월, 임금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임금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이 해괴하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여겼다.[고기(古記)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원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五年 三月 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歌舞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古記謂王卽位元年事] 夏六月 一吉飡信弘叛 伏誅

 

11년(서기 885) 봄 2월,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十一年 春二月 虎入宮庭 

 

 

 

51대 진성왕(眞聖王, 김만 혹은 김원) = 진성여왕

 

2년(서기 888) 봄 2월, 소양리(少梁里)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름 없는 누군가가 정치를 비방하는 말을 지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수색하게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大耶州)에 숨어 사는 거인(巨仁)이란 자가 아닌가 합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를 벌주려 하였다.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삼 년이나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퍼하니 오 월에도 서리 내리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돌이켜 옛일과 같지만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네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떨어졌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構辭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4년(서기 890)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 삼국유사의 기록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왕위에 오른 지 몇 해가 되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 위홍(魏弘) 잡간(匝干) 등 서너 명의 총애 받는 신하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陀羅尼)의 은어를 만들어서 글로 써 길 위에 던져놓았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것은 왕거인(王居仁)의 짓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글을 지을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곧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서 하늘에 호소하자, 하늘이 옥에 벼락을 내리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라니는 이러하다.

“남무망국(南無亡國) 찰니나제(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파가(鳧伊娑婆訶)”


해설하는 사람은 이렇게 풀이하였다.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한다.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세 명의 총애 받는 신하를 말한다.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52대 효공왕(孝恭王, 김요)

 

9년(서기 905) 봄 2월, 별이 비 오듯이 떨어졌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8월, 궁예가 병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고을을 침탈하고, 죽령 동북 지역에 이르렀다. 임금이 국토가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방어할 능력이 없으므로, 모든 성주들에게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九年 春二月 星隕如雨 夏四月 降霜 秋七月 弓裔移都於鐵圓 八月 弓裔行兵 侵奪我邊邑 以至竹嶺東北 王聞疆埸日削 甚患 然力不能禦 命諸城主 愼勿出戰 堅壁固守


11년(서기 907),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일선군(一善郡) 이남 10여 개의 성을 모두 견훤에게 빼앗겼다.

十一年 春夏無雨 一善郡以南十餘城 盡爲甄萱所取


12년(서기 908) 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월, 서리가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떨어졌다.

十二年 春二月 星孛于東 三月 隕霜 夏四月 雨雹




53대 신덕왕(神德王, 박경휘)

 

2년(서기 913) 여름 4월,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났다.

二年 夏四月 隕霜 地震


4년(서기 915) 여름 6월, 참포(槧浦)의 물과 동해의 물이 맞부딪쳐서 물결 높이가 20장 가량 되었다가 사흘 만에 그쳤다.

四年 夏六月 槧浦水與東海水相擊 浪高二十丈許 三日而止


5년(서기 916)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五年 秋八月 甄萱攻大耶城 不克 冬十月 地震 聲如雷


6년(서기 917) 봄 정월,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가을 7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

六年 春正月 太白犯月 秋七月 王薨 諡曰神德 葬于竹城

 

 


54대 경명왕(王, 박승영)

 

3년(서기 919),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상(塑像)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에서 소리가 났는데, 개가 짖는 것과 같았다.

三年 四天王寺塑像所執弓弦自絶 壁畵狗子有聲 若吠者 以上大等金成爲角飡 侍中彦邕爲沙飡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가을 8월, 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夏四月 京都大風拔樹 秋八月 蝗 旱 

 

 

 

- 백제 -

 

31대 의자왕(義慈王, 부여의자)

 

15년 여름5월, 붉은 말이 북악의 오함사에 들어가 불당을 돌며 울다 며칠 후 죽었다.

夏五月 騂馬入北岳烏含寺 鳴匝佛宇數日死



19년(서기 659) 봄 2월, 우떼가 궁궐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19년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과 동잠(桐岑) 두 성을 침범하였다.

      여름 5월, 왕도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8월,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18년 가을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으며, 밤에는 궁궐 남쪽 길에서 귀신이 곡을 하였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 雌雞與小雀交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五月 王都西南泗沘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 鬼哭於宮南路

 

20년(서기 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쪽 바닷가에서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들었다. 

왕도의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에 넘어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두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동쪽과 서쪽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沘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蟆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者 僵仆而死百餘人 亡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으로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에 들어와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六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有一犬狀如野鹿 自西至泗沘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巫者 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寖微者乎 王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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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 신묘한 주술 : 문두루비법

 

백사대전.jpg

 - 중국영화 '백사대전' 중 한 장면 -

 

 

 

 

보통 컨텐츠에서 결계나 비술을 통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많이 나오곤 한다.

 

그만큼 흔한 클리셰이긴 한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런 예가 있었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전한다

 

 

 

 

총장(總章) 무진년(서기 668)에 왕(문무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ㆍ흠순(欽純) 등과 평양에 가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장왕(高臧王, 보장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 유격병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 신라를 습격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이를 깨닫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음 해 당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너희들이 우리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거늘, 어찌 감히 우리 군을 해하려 하느냐?”

 

이렇게 말하고는 인문 등을 가두고, 군사 50만을 훈련시켜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당시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서쪽으로 당나라에 들어가서 인문 등을 만났다. 

인문이 이 사실을 알려주자, 의상대사는 곧 동쪽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크게 걱정하며 여러 신하들을 모아서 방어할 대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아뢰었다.

 

“근래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아 왔으니, 청하옵건대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법사가 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낭산(狼山)의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란 곳이 있사옵니다.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시고 도량을 열도록 명하면 될 것입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서 보고하였다.

 

“무수히 많은 당나라 병사들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서 바다 위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법사를 불러 말하였다.

 

“사태가 벌써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채색 비단을 써서 임시로라도 절을 짓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채색 비단으로 절을 꾸미고 풀로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맡은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珈)에 밝은 스님 12명에게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아직 싸움을 하지도 않았는데 바람과 파도가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들이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 하였다. 

지금도 단석(壇席, 불교의 도량(道場)을 말함)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 뒤 신미년(서기 671)에 당나라에서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또 다시 5만의 군사가 쳐들어왔다. 

그래서 또 그 비법을 사용하자 예전처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당시 한림랑 박문준(朴文俊)이 김인문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당 고종이 문준을 불러 말하였다.

 

“너희 나라(신라)에서는 대관절 비법을 썼길래, 두 번이나 대군을 보냈는데도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저희 신하들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사정을 모르옵니다.

 그저 멀리서 한 가지 들은 바로는,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상국의 은혜를 크게 입었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천왕사라는 절을 세워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오래도록 법석(法席, 설법이나 독경 등을 하는 자리)을 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은 당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것을 먼저 듣고, 이 절(사천왕사)을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서, 

별도로 그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이 신라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저는 우리 황상의 장수를 빈다는 그 천왕사에 한 번 가서 향불을 올려야겠사옵니다.”


이에 따라 사신을 곧 인도하여 새로 지은 절을 보여주었다. 그 사신은 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망덕요산(望德遙山)에 있는 절이 아니오?!”

 

이렇게 말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이 금 일천 냥을 주었더니, 그 사신은 곧 돌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신라에서는 그저 천왕사를 새로이 짓고, 거기서 폐하의 장수를 빌 뿐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돈.jpg

 

(...)

 

 

 

 

 

그래서 당나라 사신의 말에 따라 이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불렀다.

 

왕은 문준이 잘 말해서 황제가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김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글을 써서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황제는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서 보내주었다.


인문이 감옥에 있을 때, 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절을 지어서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다. 

이후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자 미타도량(彌陁道場)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紀異)'편, 문무왕 법민(文武王 法敏) 중 -

 

 

 

 

 

대충 요약해보면, 통수를 치려는 당나라 수군을 '수군이었던 것'으로 

두 번씩이나 만든 비술이 문두루비법인데,

 

시간이 없어서 대충 비단 두르고, 풀로 신장상을 만들어 세운뒤 

법사들을 모셔놓고 경을 외우는 정도에 불과했는데도 그러한 위력을 내는 비범함을 보인다

 

그리고 사신은 돈으로 매수하여, 비법 그런거 모르겠고, 

우린 폐하의 장수나 빌기 위해 절 지었다고 뻥카를 친다

 

물론 의식을 치러서 싸움에 이겼다는건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고,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당시에 호국적 성격을 지닌 불교의식을 

사천왕사에서 행한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고려사>에도 문두루비법을 몇 차례 행한것으로 나오는데, 

역시 대외적 위협에 맞서 호국적 불교의식의 하나로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두루도량1.png

 

 

 

한편, 지난 2018년에는 이 문두루비법을 재현하는 불교행사가 있었는데

 

실제 고증을 위한것이라기 보다는 재현에 목적을 둔 상징적 의식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 

http://www.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50426

 

 

문두루도량4.png

 

 

문두루도량3.png

 

 

문두루도량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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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왜 대장경을 만들었는가?

 

 

 

초조본_대방광불화엄경_주본_권13.jpg

- 초조대장경 주본 -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jpg

-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경판 -

 

 

 

 

 

 

보통 대장경(초조 및 재조)의 제조동기를 파악하기 위한 사료로 인용하는 것이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임금(고려 고종)께서는 삼가 태자와 공⋅후⋅백, 재상과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향을 사르면서, 

허공을 다한 온 세상의 무량하신 불보살과 천신들, 삼십삼천의 일체 호법영관에게 고하나이다.

참으로 참람하옵나니, 달단(몽골)이 환란을 일으켜 그 잔인하고 흉포함이 이루말할수 없습니다. 

어리석고 암둔하며 혼매함이 짐승보다도 심하니, 어찌 천하가 다 섬기는 불법을 저들이 알겠습니까?

 

그 때문에 저들은 가는곳 마다 불상과 경을 모조리 불살라 없애고, 

부인사의 대장경 판본마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여러해의 공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하고, 국가의 보물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부처님과 여러 천신의 자비로 견딜수 있다 한 들, 이 일을 어찌 모두 다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생각컨데, 저희들이 어리석고 식견이 얕아 일찍이 오랑캐의 계략을 막지 못하고, 

힘이 모자라 불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보배(대장경)을 잃은 재난은, 

용서받지 못할 저희의 잘못이오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본디 이루거나 헐게 되는 것은 없는 것이요, 

그 잠시 머무는 것은 모두 그릇일 뿐이라, 그릇의 이룸과 소멸은 자연의 움직임일 뿐이니, 

헐어지면 다시 만드는 것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하물며 국가가 불법을 받들고 있는 상황이온데 

어찌 주저하고 망설일 것이며, 큰 보배(대장경)을 잃었는데 어찌 감히 큰 일을 함을 두려워 

다시 경을 고치는 일을 꺼리겠나이까.

 

이제 재상과 문무백관은 더불어 큰 원을 발하여 이미 담당 부서를 설치하고 관리르 두어 그 일을 맡겨두었습니다. 

 

그 초창의 단서를 살피건데, 옛 현종 2년(1011)의 일이옵니다. 

당시 거란의 군주가 큰 군사로 침략하여 현종께서 남쪽으로 피난하셨는데, 

거란병은 오히려 송악성(개경)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현종께서 이에 신하들과 함께

끝 없는 큰 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새겨 이룰것을 맹서한 후에야 비로소 거란병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만들려는 것 또한 대장경이고, 선후의 조판도 마찬가지이며, 

임금과 신하가 발원하는 것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어찌 달단(몽골)도 거란병처럼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천신들께서 얼마나 살피시는가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이제 지성으로 발원하는 바가 저번에 비해 부끄러워할 바가 없사온 즉, 

엎드려 비옵나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 삼십삼천의 천신께서는 저희의 간절한 기원을 들으시어, 

신통력을 빌려주어 악한 오랑캐를 멀리 달아나게 하여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나라를 안팎으로 평안케 하며, 모후와 태자 등이 만수무강 하게 하시고, 국운이 영원무궁토록 하소서. 

그러면 저희들은 마땅히 더욱 노력하여 법문을 보호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더 갚겠나이다. 

간절히 기도하오니 부디 굽어살피소서.

 

國王諱。謹與太子公侯伯宰樞文虎百寮等。熏沐齋戒。祈告于盡虛空界十方無量諸佛菩薩及天帝釋爲首三十三天一切護法靈官。甚矣達旦之爲患也。其殘忍凶暴之性。已不可勝言矣。至於癡暗昏昧也。又甚於禽獸。則夫豈知天下之所敬有所謂佛法者哉。由是凡所經由。無佛像梵書。悉焚滅之。於是符仁寺之所藏大藏經板本。亦掃之無遺矣。嗚呼。積年之功。一旦成灰。國之大寶喪矣。雖在諸佛多天大慈之心。是可忍而孰不可忍耶。因竊自念。弟子等智昏識淺。不早自爲防戎之計。力不能完護佛乘。故致此大寶喪失之災。實弟子等無狀所然。悔可追哉。然金口玉說。本無成毀。其所寓者。器耳。器之成毀。自然之數也。毀則改作。亦其所也。況有國有家。崇奉佛法。固不可因循姑息。無此大寶。則豈敢以役鉅事殷爲慮。而憚其改作耶。今與宰執文虎百僚等。同發洪願。已署置句當官司。俾之經始。因考厥初草創之端。則昔顯宗二年。契丹主大擧兵來征。顯祖南行避難。丹兵猶屯松岳城不退。於是乃與群臣。發無上大願。誓刻成大藏經板本。然後丹兵自退。然則大藏。一也。先後雕鏤。一也。君臣同願。亦一也。何獨於彼時丹兵自退。而今達旦不爾耶。但在諸佛多天鑑之之何如耳。苟至誠所發。無愧前朝。則伏願諸佛聖賢三十三天。諒懇迫之祈。借神通之力。使頑戎醜俗。斂蹤遠遁。無復蹈我封疆。干戈載戢。中外晏如。母后儲君。享壽無疆。三韓國祚。永永萬世。則弟子等當更努力。益護法門。粗報佛恩之萬一耳。弟子等無任懇禱之至。伏惟炤鑑云云。

 

(http://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04A_0270_030_0040)

 

 

 


이규보의 기고문을 보면 호국의 이유로 대장경판을 재조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대장경판 재조는 불법을 통한 몽골병의 격퇴와 평안을 기원하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장경의 제작 동기는 고려사 열전 42 최충헌-최이-최항-최의 편에도 언급하고 있다.


 

 

 

이듬해(1255년), 왕(고종)이 최항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주공 단과 소공 석이 주나라를 도왔고, 소하와 조참이 한나라를 도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것이 없도다.

진양공 최이는 나의 선친께서 용상에 계실 때, 그리고 짐이 즉위한 후에

충성을 다해 사직을 보위했고 보좌의 사명을 다하였다.

신묘년(1231)에 변방 장수가 국토 수비를 못하여 몽병(몽골)이 침입했을 때,

현명한 전략을 홀로 결정하고 뭇 사람의 시비를 물리치며 혼자 승여를 받들고

터를 잡아 천도하였다(강화도 천도) 그리고 수년 내 궁궐과 관아를 모두 건설하고

국법을 진흥시켜 우리나라를 다시 바로잡게 하였도다.

그리고 역대로 전해내려오던 진병대장경(초조대장경) 판각이 적병(몽골)에 의해

모두 불타버리고 나라에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 다시 만들 겨를이 없었는데

최이가 도감을 따로 두고, 자기 재산을 바쳐 판각을 거의 절반이나 이루어

나라에 복을 주었으니 그 공을 어찌 잊겠는가.

그 아들인 시중 최항은 가업을 이어 임금을 돕고 국난을 제어하였으며

대장경에 대하여는 재물을 내놓고, 일을 감독하여 완성하고 봉납의 의식까지

거행함으로써 온 나라가 복을 받게 하였다.'

 

明年, 王詔曰, “旦·奭相周, 蕭·曹佐漢, 君臣相資, 古今一揆. 晉陽公崔怡, 當聖考登極之日, 寡人卽祚以來, 推誠衛社, 同德佐理. 越辛卯, 邊將失守, 蒙兵闌入. 神謀獨決, 截斷群議, 躬奉乘輿, 卜地遷都. 不數年閒, 宮闕官廨, 悉皆營構, 憲章復振, 再造三韓. 且歷代所傳,鎭兵大藏經板, 盡爲狄兵所焚, 國家多故, 未暇重新. 別立都監, 傾納私財, 彫板幾半, 福利邦家, 功業難忘. 嗣子侍中沆, 遹追家業, 匡君制難, 大藏經板, 施財督役, 告成慶讚, 中外受福.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88%97%E5%82%B3&types=o#detail/kr_129_0010_0010_0100)

 

 

 

진병대장경은 곧 초조대장경을 말함인데, 진병, 즉 병사를 진압한다는 것은 

 

당시 침입했던 거란군의 격퇴를 뜻하는 것이고, 초조대장경이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초기에 대장경을 연구했던 학자들, 가령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池內宏)는,

 

이규보의 기고문은 정사가 아니니 사료로 신뢰하기 어렵고, 불력에 의지하려는 문구를 

 

단지 미신적인 측면으로 치부하면서 대장경은 현종이 부모의 명복을 빌려고 만든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해방 직후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를 답습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위와 같은 사료들의 연구로 초기의 주장이 반박되었고, 대장경의 제조 동기는 

 

위와같은 호국적인 이유가 주된 것임이 정설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장경제작경로.jpg

 - 재조대장경의 육지 및 바다를 통한 이동경로-

 

 

여기에 부가적으로 혼란한 국내 여론과 민심을 수습하고, 군신과 백성을 통합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다.

 

이는 경전 판각의 매 권 끄트머리에 항상 '00(해당 연도의 갑자) 歲 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즉, 고려국 분사대장도감에서 (고려임금의) 칙을 받아서 만들었다는 문구가 들어있는것을 보아

 

고려 국왕이 가장 선두에서 대장경 제조의 칙을 내리려 명목상 총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 아래에서 최씨 등 당대 최고 권력자와 신하들이 재물과 인력을 보태고

 

그 다음 실질적으로 승려와 문필가들이 글씨를 쓰고, 목수들 등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목판에 새겼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백성들조차 불사에 필요한 시주품이나 인력을 제공(재목 운반, 경판 운반 등)했기 때문에

 

사실상 대장경 재조의 주체는 모든 고려국 사람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장경은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경·율·론(經律論)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를 간행했다는 것 자체가 불교국가로서 문화적 위상을 사방에 떨치는 일이었다.


 

대장경명

간행시기

권수

비고



촉판(蜀版北宋官版開寶勅版)

북송(971983)

5,048

勅版開元釋敎錄收錄

고려초조판(高麗初雕版)

고려(1011?)

5,048

勅版〈〃〉

거란판[契丹版]

거란(10311054)

 

勅版

숭녕판(崇寧版福州東禪寺版)

북송(10751103)

5,700

仕版

비로판(毘盧版福州開元寺版)

남송(11121151)

6,117

私版

思溪版(圓覺寺版)

남송(11261132)

5,480

私版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版再雕大藏經)

고려(12331248)

6,561

勅版

홍법사판(弘法寺版金藏)

남송(11491294)

 

私版

사계판(思溪版資福寺版)

(1239?)

5,740

圓覺寺版  補刻

항주판(杭州版普寧寺版)

(12771290)

 

思溪版 重刻

고사판(
砂版延聖寺版)

(12311305)

6,00

私版, 1287 追刻

명판남장(明版南藏報恩寺版)

(13731403)

6,331

金陵(南京開版

명판북장(明版北藏北京版)

(14101440)

6,361

北京 開版

뇌력판(
曆版嘉興

嚴寺版)

(15891676)

7,334

方冊本 北藏 增補

종존판(宗存版)

일본(16141624)

284

高麗大藏經版 底本

천해판(天海版寬永寺版)

일본(16371648)

6,323

木活字

황벽판(黃檗版鐵眼版)

일본(16691681)

6,958

方冊本 萬曆版 底本

용판(龍藏淸版)

(17351736)

7,838

明北藏版 底本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縮藏)

일본(18801885)

8,534

高麗大藏經版 底本

일본교정대장경(日本校訂大藏經卍正藏)

일본(19021912)

7,148

麗明對校錄 底本

상해빈가정사판(上海頻伽精舍版)

(1891)

8,534

縮刷藏 底本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일본(19221934)

9,041

高麗大藏經版 底本

불교대장경(佛敎大藏經)

중국(1979)

 

頻伽精舍版 底本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

중국(1983?)

 

高麗大藏經版 底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57658&cid=46648&categoryId=46648)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자로 제작된 대장경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북송에서 만든 것이며

 

이에 자극받은 고려는 북송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거란의 침입 와중에도 같은 권수로 하되

 

더욱 정교하고 뛰어난 목판인쇄기술로 제작하였다.

 

초조대장경의 상당수는 소실되었으나, 일본으로 유출된 것도 많은데,

 

이들은 교토 난젠지(南禪寺)와 대마도에 상당수가 보관되어 있다.  

 

이렇듯, 대장경 제작은 고려가 동아시아에서 엄연한 불교국가로서 높은 문화적 수준을 이루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수도 있겠다.

  

* 요약 *  

 

- 대장경 제조의 주 목적은 적병의 격퇴와 국가 평안 등 호국적 이유이다

- 그러면서 군신과 백성의 통합, 문화적인 자신감의 발로 등의 이유등이 복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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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매체에서 묘사하는 조선통신사의 모습

 

 

 

 

 

 

* 애니메이션 효우게모노(2011) 

 

경인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맞이하는 히데요시1 

 

이 만화에서 다도가 중요 소재로 나오는 만큼, 통신사를 대접하기 위해

 

당시 일본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도다완(조선식 찻사발)을 내놓는 모습과

 

이에 기가차 하는 조선 사신의 태도가 백미이다.

 

이러한 간소한 대접은 의외로 고증에 맞는데, <징비록>이나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잔치 기구도 없고, 술이랑 떡 한그릇만 올리는데, 술그릇도 보니 질그릇이었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하대에는 대마도주와 연관된 약간 복잡한 사정이 숨겨져 있는데,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와 그 일족은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대마도부터 황폐화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전쟁을 막기위해 애썼고, 급기야 히데요시에게 온 통신사를 일종의 조공사라고 속이게 된 것이다. 

 

이를 모르는 통신사 일행은 히데요시의 언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 KBS사극 징비록(2015) 

 

경인년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맞이하는 히데요시2

 

임진왜란 1592의 응수요시와는 또 다른 김규철의 히데요시의 연기를 볼 수 있다.

 

히데요시의 무례함의 배경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아들 쯔루마츠의 일화가 더욱 상세히 묘사된다.

 

 

조선통신사3.png

 

 

황윤길은 칼날을 놀리는 가신들의 풍모를 보고서 침략의 그림자를 읽었고, 

 

분노한 김성일은 그들에 대한 경멸을 앞세운다.

 

귀국한 그들이 선조에 상반된 인상을 아뢰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조선통신사.jpg

에도 시가지로 접어든 조선 통신사 일행


 

마상재3.jpg

 통신사 일행 중 마상재꾼들이 선보이는 마상재(말 위의 묘기)

통신사가 가져온 눈요기 중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조선통신사2.jpg

 조선통신사의 수행을 호위하는 막부의 무사들

 

왜란 직후 에도막부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고, 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조선에서는

 

강화교섭 및 포로의 교환을 위해 통신사를 보내는데 힘썼고, 

 

이후에는 역대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외교사절 및 문화교류단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 유튜브가 없어져서 링크로 대체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kim49&logNo=221536299968

 

*일본사극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葵 徳川三代, 2000)

 

2대 조선통신사(1617)에서 정사 오윤겸을 맞이하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여기 나오는 히데타다의 배우는 니시다 토시유키라는 배우로, 다른 사극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할을 맡기도 했다.

 

소오 요시나리(소오 요시토시의 장남)에게 무슨 뜻인가를 물으나 대답을 하지 못하자,

 

승려이자 고문인 콘치인 슈덴에게 그 뜻을 묻는 장면이다. 

 

국서의 내용을 듣고는 이의가 없으며, 바로 답변을 작성할 것과, 조선 사신의 대접에 신경쓸것을 당부한다.

 

 

조태억.jpg

 조태억 초상 - 일본인 화가가 1711년 신묘년 통신사로 온 그를 그린 모습이다.

 

아라이 하쿠세키1.jpg

 아라이 하쿠세키 초상 -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문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련의 정치개혁 및 국풍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한편, 1711년, 신묘년의 통신사는 정사 조태억(趙泰億)이 인솔한 약 500여명의 규모로, 역대 최고였는데

 

이 때 일본에서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라는 인물이 정국에서 대두되고 있었는데,

 

그는 조선통신사에 대접하는 비용이 너무 막대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어 이를 간소화 시키려 했고,

 

특히 조선에 보낼 답서에서 쇼군을 일컫는 칭호를 '일본국대군(日本国大君)'에서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표기하여

 

일종의 외교적 우위를 표하려 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무예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4.png 

 

 해석 : 

우리가 예전부터 칼 좀 놀린거 잘 아는데, 이제는 우리도 유교도 잘 숭상하고 하거던?? 

너네 나라 신숙주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며. 우리도 니네 침략할 의사는 더 없으니 걱정 말어

 

 

 

아라이 하쿠세키의 이러한 태도, 일본도 이제는 조선에 지지 않는 유교적 문치를 이룬 나라로서, 

 

더이상 얕보이지 않겠다는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서가 전해졌을때 조선 조정에서는 조태억이 괜히 미움을 사서

 

잠시 삭탈관직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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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로 살펴본 일제강점기의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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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태준(1904~197?) 의 <패강랭(1938)>




현(玄)은 평양이 십여 년 만이다...(중략)... 친구들도 가끔 놀러오라는 편지가 있었다.

학창때 사귄 벗들로, 이곳 부회의원이요 실업가인 김(金)도 있고,

어느 고등 보통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는 박(朴)도 있건만

그들의 편지에 한 번도 용기를 내어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받은 박의 편지는 놀러오라는 말이 있던 편지보다 오히려 현의 마음을 끌었다


< 내 시간이 반이 없어진 것은 자네도 짐작할 걸세. 편한하긴 하이. 

그러나 전임으론 나가주고 시간으로나 다녀주기를 바라는 눈칠세.

나머지 시간이래야 그리 오래 지탱돼나갈 학과 같지는 않네. >


(중략)


오면서 자동차에서 시가도 가끔 내려다 보았다. 전에 본 기억이 없는 새 빌딩들이 꽤 많이 늘어섰다.

그중에 한 가지 인상이 깊은것은 어느 큰 거리 한 뿌다귀에 벽돌 공장도 아닐 테요 감옥도 아닐 터인데

시뻘건 벽돌만으로, 무슨 큰 분묘와 같이 된 건축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현은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경찰서라고 했다.

또 한가지 이상하다 생각한 것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여자들의 머릿수건이다.

운전사에게 물으니 그는 없어진 이유는 말하지 않고,

"거, 잘 없어졌죠. 인전 평양두 서울과 별루 지지 않습니다." 하는, 매우 자긍하는 말투였다.


현은 평양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기 좋았었다.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 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량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 고장에 와서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


(중략)


"이 자식들아, 너이야말루 빌어먹을 자식들인게...... 그까짓 수건 쓴 게 보기 좋을 건 뭬며 이 평양부 내만 해두

일 년에 그 수건 값허구 당기 값이 얼만지 알기나 허나들?"

 

하고 김이 당당히 허리 펴고 나앉는다

 

"백만 원이면? 문화 가치를 모르는 자식들......"


"그러니까 너이 글 쓰는 녀석들은 세상을 모르구 산단 말이야."


"주저넘은 자식....... 조선 여자들이 뭘 남용을 해? 예펜네들 모양 좀 내기루? 예펜넨 좀 고와야지."


"돈이 드는 걸."


"흥! 그래 집 안에서 죽두룩 일해, 새끼 나 길러, 사내 뒤치개질 해......

그리고 일 년에 당기 한 감 사 매는게 과하다?

아서라, 사내들 술값, 담뱃값은 얼만지 아나?

생활 개선, 그래 예펜네들 수건 값이나 당기 값이나 졸여 먹구?

요 푼푼치 못한 경세가들아? 저인 남용할 것 다 허구......"


"망할 자식, 말버릇 좀 고쳐라...... 이 자식아, 술이란 실사회선 얼마나 필요한 건지 아니?"


"안다, 술만 필요허냐? 고유한 문환 필요치 않구?

돼지같은 자식들, 너희가 진줄 알 수 있니? 허......"


"히도오 바가니 수르나 고노야로 (사람 바보로 보지마라 이자식)"


"너이 따윈 좀 빠가니시데모 이이나 (너희 따윈 좀 바보로 봐도 좋다)"


"나니? (뭐?)"


"나닌 다 뭐 말라빠진 거냐? 네 술 좀 먹기루 이 자식,

내 헐 말 못헐 놈 아니다. 허긴 너헌테나 분풀이다만."



- 해설 -


작중 소설가인 현은 평양에 학창시절 친구였던 김과 박의 초대로 오게 됨

김은 평양의 부회의원이자 실업가 (지방의 유력가 쯤으로 보면 됨)이고

박은 조선어를 가르치는데 편지에서 알수 있듯 거진 짤린 분위기

현이 평양 시내를 보는데 새 건물이 많은데 눈에 띄는 것은 경찰서이고

평양의 민속 중 하나인 여인네들 머리수건이 '미개한 문화'취급 받아 없어짐을 알고 분개,

술자리에서 김과 싸우는 도중 일본어로 능숙하게 서로 욕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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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일본 사람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무언인지도 모르고 신이 났다.

우리는 그전부터 이미 호전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지나사변이라 부르는 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을 '짱골라', 장제스를 '쇼오가이세끼'라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였다.

동무들하고 싸울 때도 짱골라라고 놀려 주는 게 가장 심한 모욕이 되었다.

아침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나서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 교실에 들어갈 때면 괜히 피가 뜨거워지곤 했는데

그건 뭔가를 무찌르고 용약해야 할 것 같은 호전적인 정열이었다.

짱골라한테는 중창 이기고 있다고만 들어서 적으로는 시시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더 큰 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쇼오가이세끼(장제스)에다 '루스벧또(루즈벨트)', '짜아찌루(처칠)'

무찔러야 할 악의 괴수로 추가되고, 매일매일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하는 노래를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 단박 유행을 시켰고,

남양군도를 하나하나 함락시킨 걸 뽐내고 자축하기 위해 밤엔 등불 행렬이 장안을 누볐다.

고무가 무진장 나는 남양군도가 다 일본땅이 됐다고

전국의 국민학생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거저 나누어 주기도 했다.'  



- 해설 -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로, 주인공인 '나'가 서울로 상경하여 겪었던 일로

학교에서 황국신민 교육과 중일전쟁의 선전을 대대적으로 하는 장면을 묘사




예시를 든 두 사람 뿐 아니라 다른 동시기 문학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식민지의 현실을 직, 간접적으로 소설로 묘사하고 있다.

 

특기할만항 사항은 식민지에서 세대가 바뀌면서 '일본어'를 읽고 쓰고 하는것은 

 

더 이상 이상할것도 없는 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혁주같이 본격적으로 일본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도 생겼다.

 

조선어는 1910년 통치 초기에는 보통학교에서 간단하게 가르치는 정도였고

 

1920년대에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러 정하였으나

 

그것은 언어체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번역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1938년 조선어를 수의과목으로 바꾸고, 1943년에는 아예 폐지하게 된다(4차 조선교육령)

 

또한 1930년대 이후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당시 태어나 학교를 다녔던 일반적인 조선 아이들의 인식에서

 

이것이 어느면에서 잘못된 것인지 깨닫기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어로 문장을 쓴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하고 공상한다. 

이것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모국어를 경시한다는 부끄러움도 없다.

 내가 언제부터 이처럼 일본어화를 했는가 하면 

대부분의 인텔리 조선인이 그러한 것 처럼 8, 9세 무렵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부터 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많은 고단샤의 책, 예를 들면 사루토비 사스케를 읽고, 

키리가쿠레 사이조에 친숙해지고, 반즈이인 쵸에베 등을 알게 되면서이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어에 깊은 매력을 느낀것은 쓰레즈레구사를 읽고 난 뒤 부터의 일이다. 

나는 이후 호오조키를 읽고, 마스카가미, 마쿠라소오시 등을 읽기에 이르면서는 

점점 더 일본어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의 현대 문학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일본어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 장혁주, <나의 포부(抱負), 1934> 




 

 

언어와 문화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식민지배를 하는 열강들이 왜 그것을 기를쓰고 바꾸려 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수 많은 국내외 독립운동가의 역사와 언어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없었다면

 

이러한 부작용은 더는 되돌리기 어려운 정도로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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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음방송과 역사용어에 대한 시선

 

 

 

 

1. 옥음(玉音)의 의미에 대하여

 

 

 

 


옥음1.png

 

 

보통 역사속에서 옥음이라 함은 위 사진에서 두 번째 경우를 일컫는 경우가 많다. 

 

왕이나 황제의 음성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용례는 찾아보면 여러 예가 있다.

 

 

 

http://db.history.go.kr/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옥음3.png

 

 

조선시대사에서만 수백건에 이르는 옥음의 용례가 보인다.

 

 

 

 

 

옥음4.png

 

 

옥음5.png

 

 

 

 

 

 

2. 옥음방송(玉音放送)에 대하여

 

 

https://youtu.be/vblF1jEeH0U

(옥음방송 원본)

 

 

옥음방송6.jpg

 (소위 말하는 '옥음방송'을 듣는 일본인들)

 

 

 

옥음방송의 원문은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亜戦争終結ノ詔書)> 인데, 이것을 읽은것을 녹음하여 방송한 것을 말한다.

 

즉 일본의 항복을 일본의 수장인 히로히토 본인의 입으로 직접 알리기 위해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방송은 8월 15일 정오에 방송되었다.

 

 

(위키 발췌)

 

원문(문어)한국어 번역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狀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ムト欲シ茲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

朕ハ帝國政府ヲシテ米英支蘇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抑ゝ帝國臣民ノ康寧ヲ圖リ萬邦共榮ノ樂ヲ偕ニスルハ皇祖皇宗ノ遺範ニシテ朕ノ拳々措カサル所

曩ニ米英二國ニ宣戰セル所以モ亦實ニ帝國ノ自存ト東亞ノ安定トヲ庻幾スルニ出テ他國ノ主權ヲ排シ領土ヲ侵スカ如キハ固ヨリ朕カ志ニアラス

然ルニ交戰已ニ四歳ヲ閲シ朕カ陸海將兵ノ勇戰朕カ百僚有司ノ勵精朕カ一億衆庻ノ奉公各ゝ最善ヲ盡セルニ拘ラス戰局必スシモ好轉セス

世界ノ大勢亦我ニ利アラス

加之敵ハ新ニ殘虐ナル爆彈ヲ使用シテ頻ニ無辜ヲ殺傷シ慘害ノ及フ所眞ニ測ルヘカラサルニ至ル

而モ尚交戰ヲ繼續セムカ終ニ我カ民族ノ滅亡ヲ招來スルノミナラス延テ人類ノ文明ヲモ破却スヘシ

斯ノ如クムハ朕何ヲ以テカ億兆ノ赤子ヲ保シ皇祖皇宗ノ神靈ニ謝セムヤ

是レ朕カ帝國政府ヲシテ共同宣言ニ應セシムルニ至レル所以ナリ

朕ハ帝國ト共ニ終始東亞ノ解放ニ協力セル諸盟邦ニ對シ遺憾ノ意ヲ表セサルヲ得ス

帝國臣民ニシテ戰陣ニ死シ職域ニ殉シ非命ニ斃レタル者及其ノ遺族ニ想ヲ致セハ五内爲ニ裂ク

且戰傷ヲ負ヒ災禍ヲ蒙リ家業ヲ失ヒタル者ノ厚生ニ至リテハ朕ノ深ク軫念スル所ナリ

惟フニ今後帝國ノ受クヘキ苦難ハ固ヨリ尋常ニアラス

爾臣民ノ衷情モ朕善ク之ヲ知ル

然レトモ朕ハ時運ノ趨ク所堪ヘ難キ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以テ萬世ノ爲ニ太平ヲ開カムト欲ス

朕ハ茲ニ國體ヲ護持シ得テ忠良ナル爾臣民ノ赤誠ニ信倚シ常ニ爾臣民ト共ニ在リ

若シ夫レ情ノ激スル所濫ニ事端ヲ滋クシ或ハ同胞排擠互ニ時局ヲ亂リ爲ニ大道ヲ誤リ信義ヲ世界ニ失フカ如キハ朕最モ之ヲ戒ム

宜シク擧國一家子孫相傳ヘ確ク神州ノ不滅ヲ信シ任重クシテ道遠キヲ念ヒ總力ヲ將來ノ建設ニ傾ケ道義ヲ篤クシ志操ヲ鞏クシ誓テ國體ノ精華ヲ發揚シ世界ノ進運ニ後レサラムコトヲ期スヘシ

爾臣民其レ克ク朕カ意ヲ體セヨ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비추어 본 결과 비상의 조치로써 시

국을 수습코자 하여 이에 충량한 그대 신민에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 사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하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애시당초 제국신민의 강녕을 꾀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함은 황조황종의 유범이요 짐이 권권하여 마지않는바

일찍이 미영 이국에 선전한 소이 역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서기함에서 나온 것이라 

타국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범하는 따위는 애초에 짐의 뜻이 아니었느니라

그럼에도 교전은 벌써 사년을 경과하고 짐의 육해장병의 용전, 짐의 백료유사의 여정, 짐의 일억중서의 봉공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은 결코 호전되었다 할 수 없고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게 이롭지 아니하며

이에 더하여 적은 새롭게 잔학스러운 폭탄을 사용하여 잇따라 무고한 이를 살상하여 

그 참해하는 바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느니라

하물며 아직도 교전을 계속코자 함은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조차 파각할 것이라

이러할진대 짐은 어이 억조의 적자를 지키고 황조황종의 신령께 사죄하랴

이것이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케끔 한 소이이니라

 

 


짐은 제국과 더불어 종시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맹방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에서 죽고 직역에서 순하고 비명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매 오장이 찢기는 듯하노라

아울러 전상을 입고 재화를 당하고 가업을 잃은 자의 후생에 이르러는 짐이 깊이 진념하는 바이라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을 고난은 분명히 예사롭지 않을지라

그대 신민의 충정을 짐은 족히 아노라

 

 

 

그럼에도 짐은 시운이 향하는바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고 참기 어려움을 참아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고자 하노라

짐은 이에 국체를 호지하며 충량한 그대 신민의 적성을 신의하여 언제나 그대 신민과 함께하노니

만일 감정이 격해지는바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또는 동포를 배제하여 서로 시국을 어지럽힘으로써 

대도를 벗어나고 신의를 세계에서 잃게 되는 따위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바이니라

모름지기 거국일가 자손상전하여 굳게 신주의 불멸을 믿고 소임을 무겁게 여기고 갈 길의 멂을 생각하고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기울여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건케 하고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여 세계의 진운에 뒤떨어지지 않게끔 기약하라


 

그대 신민은 짐의 뜻을 잘 명심하고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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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옥음방송' 에서의 '옥음'은 역시 1에서 살펴봤듯이 일본에서 자국 최고 지도자인 일왕의 목소리를 일컫는다.


역사학에서 말하는 '옥음방송'은 히로히토의 이 항복선언을 일컫는 사건으로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어 쓰이고 있다.

 

이 방송은 현대사에서 일본의 패전을 언급할때 매우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물론 '일본의 종전선언' 내지 '항복선언'이라고 언급할수도 있지만, 종전선언이라 함은 

 

일방적인 항복의 의미를 희석(실제로 그래서 종전 조서라고 하였다)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맞지 않으며,


항복선언이라 함은 다른 수 많은 역사 속 항복선언과 햇갈리기 쉽다.

 

그래서 쉬이 말해 '옥음방송' 이라고 한다면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가 녹음한 

 

이 방송을 바로 일컫기 때문에 바로 이해가 되는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적 용어로서 옥음방송이 고유명사가 된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옥음방송이라 쳐보면 용례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옥음9.png

 

 

옥음10.png

 

 

 

 

따라서, '옥음방송'이라고 한다고 해서 무슨 전쟁범죄를 옹호하거나 일본을 찬양한다는 식의 논리는 옳지 않다.

 

이는 사실 일제(日帝), 천황(天皇)이라는 용어에서도 비슷한데,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도 역사학 자체에서는

 

역사 용어로서 고유명사로 계속 쓰이고 있다.

 

옥음8.png

 

 

다만 옥음방송과는 달리,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일본의 국왕 개인을 특정하여 부르는 명사인데다, 

 

대중에게는 천황이라는 단어가 오랫동안 민감하게 받아들여졌으므로 

 

정치인, 방송인들이 '일왕'이라 순화해서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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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정리

 

1. 옥음은 옛날부터 임금이나 황제의 목소리를 일컫는 의미로 자주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도. 

2. 그러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옥음방송은 해당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로서, 찬양이나 특별한 의도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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