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당시를 묘사한 기록화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굳혔고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실상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을사조약의 당시 명칭)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5.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메이지(明治) 38년 11월 17일
주한국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명목상 독립국을 표방하던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서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당시 조선민중들, 특히 지식인들의 충격과 분노는 엄청난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에 분개하면서도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살피고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한 마디로 '선 실력양성 후 독립' 이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나름대로 진단한것이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의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 까지 조약을 맺음'이라는 문구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같은 언론지들의 사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余(여)가 大韓(대한)의 由來 敎化(유래 교화)를 觀(관)하니, 修身(수신) 공부는 具備(구비)하나,
利用厚生(이용후생)의 實業(실업)은 결핍하고 인민의 愛親敬長(애친경장)하는 美俗(미속)은
足稱(족칭)이나 애국하는 열심히 전무한지라. 이용후생의 실업이 결핍한 고로 단체가 不成(불성)하야 국력이 허약이라
내가 우리나라의 교육의 유래를 보니 수양하는 공부는 갖추었어도 실제로 이롭고 풍족하게 하는산업은 부족하며,
백성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좋은 풍속은 충분히 갖추었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힘들여 하지 않으니,
이롭고 풍족케 하는 산업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단체도 성립되지 않아 국력이 허약한 것이다
-1905. 9. 27 <대한매일신보>
즉, 실력을 키우자는 것인데, 그 방법은
교육의 진흥, 공장을 세우고 기술 보급, 의식의 개선, 악습(조혼, 계급제도 등) 타파 등 입니다.
<대한협회(1907)> 임원들
대한협회 회장 남궁억
이로서 탄생한것이 대한협회(1907)인데, 공진회(1904)에서 이어지는 대표적인 자강단체였습니다.
대한협회는 위에서 말한 민족자강을 부르짖는 한 편,
대한협회 하나를 정당으로 하여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08년, 회장 남궁억이 사임하고 김가진이 새 회장으로 취임하는데
이러한 임원의 변화 후, 자강단체였던 대한협회는 점차 권력지향적 친일단체로 변화해갔고
결정적으로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나면서 단체의 활동이 좌절되고맙니다.
*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국 황제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대한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황제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대한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3. 일본국 황제는 대한제국 황제,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는 공로가 있는 대한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하여 완전히 대한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대한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메이지(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 正毅)
자강론은 그래도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라는 을사조약의 문구에 희망을 걸면서 존속할수 있는것이었고
정당활동 역시 껍데기나마 국가가 남아있었기에 할수 있는것이었지만
총독부의 식민통치로 그 국가가 사라졌고, 일본의 식민통치는
이러한 권력지향적 자강단체는 물론 친일파에게조차 정치권력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이후의 독립운동은 비밀결사운동의 특징을 띕니다.
비밀결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단체는 신민회(1907~1911)가 있습니다.
강제병합 전후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에 힘썼던 단체였으나,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결정적으로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105인 사건, 1911) 강제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1910년대 중반부터 많은 단체가 결성되어 비밀결사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때의 비밀결사운동의 목적은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 구분은 과정에 대한 차이로, 궁극적으로는
'국내에서 교육과 산업진흥으로 힘을 키우고, 자본과 인력으로 국외 무장투쟁을 지원한다'
라는 식으로 독립전쟁노선을 긍정하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는 해체되기 전의 신민회가 서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1911~1920)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및 이수 인원들 다수는 서로군정서, 의열단 등 무장투장 단체로 이어졌고
이 단체들은 간도와 만주, 후에 임시정부에서 일본 주요 기관에 대한 습격과 친일파 처단,
게릴라전 등의 무장투쟁 활동을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거국적으로 일어난 국내 독립운동인 3.1운동
1918년, 제 1차 대전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했고,
(사실 1차 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 한하는 것이었지만)
사회주의 진영에서 레닌 역시 앞서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얻기 시작했고, 비밀결사 조직들의 준비끝에
1919년 3월 1일, 거국적인 독립의지의 표방인 '3.1운동' 이 일어납니다.
이는 1910년대 무단통치에 대한 불만이 민중에게서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것이었으며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공표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즈 3면 보도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은 3월 1일을 그들의 독립의 날로 삼았고
이날 전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한국 독립을 위한 행진과 시위를 가졌다.
일본 당국은 수천 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했다. 그들의 옷을 벗겨 거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았다”
“4만 명이 체포됐다. 독립 운동 리더들이 전하기를 일본 군인들은 한 소녀가
성명서를 한 손으로 들고 있을 때 칼로 손목을 잘랐고 소녀가 다른 손으로 성명서를 들자 그 손마저 잘랐다”
“조용한 은자의 왕국으로 4,252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나라가,
33인의 시민들이 서명한 문건을 통해 한국 인민의 자유를 선포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055307#home
3.1운동의 열기는 실로 놀랍고 뜨거운것이었고
일제가 강압적으로 제지하면서 수그러들기까지 수 개월 지속되었으며
좀 더 구체적인 독립의 구심점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한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 기념사진
3.1 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지배 지침을 바꿔야겠다 생각하고
강압적인 지배보다는 회유책과 기만술을 통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됩니다.
일본의 감시와 회유에 의한 어려움으로 국내 민족 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국외에서 독립의군부, 의열단,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등이 계속 무장투쟁 활동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활동이 침체되었습니다.
대신 1920년대부터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기존 민족주의 계열 단체와 양분되어 전체적으로 실력양성운동노선으로 분위기가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양 진영이 힘을 합칠 필요성을 느끼고 진영을 초월한 독립운동,
즉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때 탄생한것이 신간회(1927~1931)였습니다.
신간회는 비밀결사 조직이 아닌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운동단체로서
민족주의계, 사회주의계는 물론이고 각 종교인들과 지식인 학생들을 망라하여
국내외 도합 100여개 단체와 4만여명의 회원수에 이르는 대규모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민중 교육과 노동 운동 전개, 언론과 출판을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광주항일학생운동(1929), 원산 총파업(1929) 등 각종 저항 운동, 노동자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식단체를 표방하는 만큼 그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었고,
최린과 같은 자치론자들이 유입되면서 결성 취지에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치론은 식민지배 하에서 조선인의 자치활동을 받아내는것에 만족하자는 주장인데
총독부가 조선인의 자치를 적극적으로 허용할리 없을 뿐더러 식민지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변질된 타협주의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민족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 양쪽에서 신간회의 취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마침 해외에서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 깨지는 등 사회/민족주의 계열의 갈등이 점화되자
국내에서도 영향을 받아 신간회는 1931년 해산하고 맙니다.
그러나 국외에서는 여전히 각종 무장단체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에 한인애국단을 결성, 각종 의거를 기획합니다.
(좌)이봉창 열사 (우) 윤봉길 의사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為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敵國의 首魁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大韓民國 十三年 十二月 十三日(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宣誓人 李奉昌(선서인 이봉창)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為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敵國의 首魁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大韓民國 十四年 四月 二十六日(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宣誓人 尹奉吉(선서인 윤봉길)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2092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treasure/view?relicId=2090
1930년대에는 민족문화 말살을 위한 일제의 각종 정책이 수반되었습니다.
내선일체론에 의거해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제했으며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을 빼앗고, 신사와 신궁을 지어 아침마다 참배하게 했습니다.
비록 신간회는 해체됬으나 국내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문화 수호운동을 펼쳤습니다.
1935년 한글학회 기념사진
한글학회(韓㐎學會, 1908~)는 주시경이 창립한 단체로
한글을 보급하고 그 체계를 정리하면서 나랏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고,
1926년 한글날을 정하고 한글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정리하여 학회지 <한글(1932)>를 발간했습니다.
(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우) 박은식의 한국통사
역사는 민족을 지키기 위한 근간으로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습니다.
신채호, 박은식 등은 기존의 한국사를 정리하고, 낭가사상, 얼 등 민족 고유의 정신을 강조하였으며
사회주의의 유물사관에 의거해 한국사 역시 세계역사의 보편적 발전과 같다는 백남운,
근대적 실증주의 역사연구의 기틀을 잡은 진단학회의 이병도 등이 활동했습니다.
국문학은 1905년, 이인직의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시작으로
이후 최남선, 이광수 등이 작품을 여럿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인직, 최남선, 이광수 같은 이들은 문학의 발전을 이루었을 지언정
친일파이거나, 자치론자들이거나 하는 식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심훈과 같이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하는 문학을 쓰면서
간접적으로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의 확장과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사회주의 문학단체 카프(1925~1935)가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주일예배 때 신민서사를 외고 천황의 황거방향으로 요배를 하는 모습
황국신민서사
…일본 사람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무언인지도 모르고 신이 났다. 우리는 그전부터 이미 호전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지나사변이라 부르는 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을 '짱골라', 장제스를 '쇼오가이세끼'라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였다. 동무들하고 싸울 때도 짱골라라고 놀려 주는 게 가장 심한 모욕이 되었다. 아침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나서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 교실에 들어갈 때면 괜히 피가 뜨거워지곤 했는데 그건 뭔가를 무찌르고 용약해야 할 것 같은 호전적인 정열이었다.
짱골라한테는 중창 이기고 있다고만 들어서 적으로는 시시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더 큰 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쇼오가이세끼(장제스)에다 '루스벧또(루즈벨트)', '짜아찌루(처칠)'가 무찔러야 할 악의 괴수로 추가되고, 매일매일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하는 노래를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 단박 유행을 시켰고, 남양군도를 하나하나 함락시킨 걸 뽐내고 자축하기 위해 밤엔 등불 행렬이 장안을 누볐다. 고무가 무진장 나는 남양군도가 다 일본땅이 됐다고 전국의 국민학생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거저 나누어 주기도 했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일본 내지는 우리보다는 훨씬 앞선 선진사회로서 그 발달된 지식과 기술로써 만든 무수한 서적과 간행물이 滔滔(도도)의 勢(세)로 이입되는데 조선 내의 교육 있는 지식분자는 거의 다 그것을 독파할 능력을 가졌으므로 한 걸음 앞선 사회의 진보된 학문과 지식과 문학을 원하게 된다. 그나마 조선내의 조선문의 문학작품이나 간행물보다는 어느 점으로나 우위에 있다는 것을 시인치 않을 수 없으니 일반이 이것을 買讀(매독)하는 것은 차라리 자연지세라 할 것이다…
- 개벽(1936), 1, 149면
"우리 조선도 독립이 된대요".
소년은 부자연할 정도로 눈가에 우슴까지 띠우며 이번엔 말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발서 별다른 새로운 감동이 오지는 안는다
...(중략)...
"너도 기뿌냐?", "그러믄요", "그럼 왜 울었어?" 그는 기어이 웃고 말었다.
소년은 좀 열적은 듯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징 와가 신민 또 도모니, 하는 데 그만 눈물이 나서 울었어요...... 덴노우 헤이까가 참 불쌍해요.",
"덴노우 헤이까는 우리나라를 뺏어갓고, 약한 민족을 사십년 동안이나 괴롭혓는데 불쌍허긴 뭐가 불쌍허지?"
"그래도 고-상을 허니까 불상해요"
-지하련, <도정(1946)>
그 사이, 식당 안에는 여러 패의 손님이 찾아든 듯 싶어,
웃고, 지꺼리고, 노래를 하고, 그러는 소리에 좁은 집이 바루 떠날 것 같다.
"가쓰, 잇쬬-"
"오쬬-시 넹아이마쓰"
"오야꼬돔부리 잇쬬-"
"쓰끼다시, 산닌붕."
-박태원 <천변풍경(1938)>
내가 일본어로 문장을 쓴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하고 공상한다.
이것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모국어를 경시한다는 부끄러움도 없다.
내가 언제부터 이처럼 일본어화를 했는가 하면 대부분의 인텔리 조선인이 그러한 것 처럼 8, 9세 무렵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부터 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많은 고단샤의 책, 예를 들면 사루토비 사스케를 읽고,
키리가쿠레 사이조에 친숙해지고, 반즈이인 쵸에베 등을 알게 되면서이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어에 깊은 매력을 느낀것은 쓰레즈레구사를 읽고 난 뒤 부터의 일이다.
나는 이후 호오조키를 읽고, 마스카가미, 마쿠라소오시 등을 읽기에 이르면서는 점점 더 일본어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의 현대 문학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일본어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 장혁주, <나의 포부(抱負), 1934>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식민지 통치가 길어질수록 일본어와 일본문물을 접하는 시간은 늘어났고
특히 일제강점기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 학교와 사회에서 일본어를 읽고 쓰는건 더이상 이상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궁성요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서사를 외웠고 일본어 교재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일전쟁(1937) 이후에는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려 인적 물적 수탈까지 일삼는 한 편,
식민지 조선에도 일본의 대외 승전보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면서
조선인들 또한 전쟁의 광기에 노출시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를 회고하던 문학가들의 증언과
당시의 잡지, 신문, 서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타는 진주만의 미국 함대들
그러나 생각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의 제국주의의 광기에도 종말은 찾아옵니다.
남태평양을 석권하려는 일본에 대해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일명 ABCD) 4국은
철강과 석유수출 제한을 걸었고, 거의 대부분 자원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은
서유럽, 더 나아가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 진주만 공습(1941)이 이어졌고,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을 과소평가 했고, 결국 본토까지 침공당하면서
8월 15일 정오,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합니다.
중국~동남아 방면의 대일본 전선에는 임시정부가 결성한 한국광복군(1940~1946)도 활약하였습니다.
비록 규모는 수백명 정도였지만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여 첩보활동과 정보전 등을 펼쳤고
버마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 교란작전, 회유작전을 펼쳐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그 규모가 적고 작전권이 중국 국민당에 있어 이를 1945년 5월에나 반환받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국외에서 얼마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지,
그 의지를 분명하게 대외에 보여주는 근거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이 광복 후에 대한민국 육군의 부사관에 임관하기도 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그 전통과 의의를 계승하였습니다.
자,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독립까지의 과정을 아주아주 대강 훑어보자는 의미도 있지만
실은 이 말을 하고싶어서 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미국의 참전인가, 소련의 참전인가, 핵 두 발인가?
물론 그것들도 하나의 요소가 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식민지배를 받던 당사자들의 의지였습니다.
국권 피탈이후 일제의 패망까지의 과정에서 계속 나오는 말은 '독립' 입니다.
그것은 자강론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무장투쟁으로, 실력양성으로, 민족문화 수호로
그리고 국내외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카이로 선언 (1943)
1943년 카이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The several military missions have agreed upon future military operations against Japan. The Three Great Allies expressed their resolve to bring unrelenting pressure against their brutal enemies by sea, land, and air. This pressure is already rising."
"The Three Great Allies are fighting this war to restrain and punish the aggression of Japan. They covet no gain for themselves and have no thought of territorial expansion. It is their purpose that Japan shall be stripped of all the islands in the Pacific which she has seized or occupi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first World War in 1914, and that all the territories Japan has stolen from the Chinese, such as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all be restored to the Republic of China.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With these objects in view the three Allies, in harmony with those of the United Nations at war with Japan, will continue to persevere in the serious and prolonged operations necessary to procure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를 위해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반세기 가까운 독립활동의 모든 과정은 일관되게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것이며
그것이 직, 간접적으로 국제정세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2차대전 시기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없었다면
카이로 회담의 저 문구도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긴 세월이었고, 고통스럽고 끔찍하였을 것입니다.
충분히 무시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아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깊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